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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로 대 웨이드’ 판결 파기 1년… 51개州 절반이 낙태 금지-제한
내년 美 대선 핵심 이슈로 떠오른 ‘낙태권’
공화당 우세한 남부 주 다수
낙태 금지 환영하며 법안 통과
임신중절약 판매 금지 처분도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했던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했다. 이로써 각 주(州) 정부는 독자적으로 낙태권 존폐를 결정할 수 있게됐다. 텍사스주 등 야당 공화당이 득세한 남부 주들은 일제히 환호한 반면 뉴욕주, 캘리포니아주 등 집권 민주당 소속 지사를 둔 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텍사스주의 한 여성이 성폭력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했지만 낙태가 허용되지 않자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낙태할 권리가 포함되며 국가가 이에 간섭할 수 없다고 결정한 판례다. 원고 ‘제인 로’(가명)와 피고 측 텍사스주 댈러스카운티 지방검사장 ‘헨리 웨이드’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판결로 인해 미국에서는 연방 차원에서 최근 약 50년간 임신 약 24주까지 낙태가 허용됐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868년의 수정헌법 14조 ‘사생활 보호 권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에 이 판결이 폐지된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대법원이 미국을 (낙태가 범죄였던) 150년 전으로 돌려놨다”고 맹비난했다.
지난달 21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주 주 대법원 앞에서 낙태 반대 단체 소속 시위자들이 ‘낙태약은 살인(abortion pills are murder)’이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이 판결이 뒤집힌 뒤 약 1년이 지난 지금, 낙태권으로 분열된 미국은 여전히 진통을 앓고 있다. 전체 51개 주(수도 워싱턴 포함) 가운데 절반 수준인 26개 주는 로 대 웨이드 판결 폐지 이후 낙태를 금지 또는 제한했다. 대부분 공화당 지지 성향이 강한 남부 주들이다. 반면 수도 워싱턴을 포함한 25개 주는 낙태권을 주 법에 따라 보호하는 등 허용하고 있다. 특히 일리노이주나 콜로라도주 등 중부 지역에 있는 주들은 법적 처벌 없이 낙태를 받기 위해 온 여성들을 위한 ‘낙태 피난처’가 됐다.
지난달 15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주 대법원 앞에서 낙태권 지지 단체 ‘가족계획연맹’ 소속 시위자들이 ‘모두를 위한 낙태 접근권’이란 문구가 담긴 푯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내년 11월 미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낙태권을 둘러싼 집권 민주당과 야당 공화당 간 ‘입법 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재선 출마를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은 이번 선거에서 여성 유권자를 겨냥해 낙태권을 핵심 의제로 끌고 갈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공화당의 주요 주자들은 “낙태 반대”를 외치며 보수 지지층 결집에 나섰다. 이 이슈의 폭발력을 염두에 둔 듯 공화당 유력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근 ‘CNN 타운홀’ 생방송에 출연해 ‘재선에 성공하면 미 전역에서 낙태를 금지하는 연방법에 서명할 것이냐’는 질문에 “미국인 모두를 위해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 美 전역 확산되는 낙태 입법 전쟁
미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은 23일(현지 시간) 임신 6주 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기존에는 임신 22주 이내 낙태를 허용해왔다. 낙태 시술을 하는 의사들의 면허도 취소된다. 통상 임신 6주까지 여성들이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만큼 사실상 이번 법 제정으로 주 내 낙태가 전면 금지된 셈이다. 낙태 금지 법안을 주도한 공화당 소속 헨리 맥매스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는 “가능한 한 빨리 법안에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바이든 대통령의 집권 첫해인 2021년에도 낙태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당시 연방법원에 의해 즉시 저지됐지만 이후 미 전역에 ‘낙태 논쟁’의 불씨를 지피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며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의회는 동일한 법안을 2년 만에 재추진했다. 다만 올 1월 주 대법원이 “낙태는 주 헌법에 명시된 여성의 사적 권리”라고 판결하며 논란은 일단락됐다. 이번 법안에도 낙태권 옹호 단체들이 효력 저지를 위해 소송에 나선 만큼 치열한 법정 공방이 예상된다.
법이 시행될 경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낙태를 전면 또는 사실상 금지한 16번째 주가 된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남부 주 지역이 대거 낙태를 금지하며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의도치 않게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의 목적지가 됐었다”며 “이 법안으로 남부 여성들의 낙태에 대한 접근이 크게 줄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텍사스 앨라배마 아칸소 등 10개 주는 성폭행 및 근친상간 등에 따른 임신에도 예외 없이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특히 공화당 소속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지난해 성폭행 피해자들이 임신을 피하기 위해 “의료 돌봄 서비스를 받고 ‘사후피임약’을 복용할 수 있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네브래스카주는 임신 12주 이내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과 함께 19세 미만 트랜스젠더 청소년에게 성전환수술을 금지하는 법안을 함께 통과시켰다. 켄터키·텍사스주 등 보수 성향이 강한 5개 주에선 공화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낙태를 살인죄로 기소하는 방안까지 추진되고 있다.
다만 민주당과 낙태권 옹호 단체들을 중심으로 집단 반발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아이오와주와 와이오밍주 등 5개 주에서는 주 법원 차원에서 법 집행이 금지된 상황이다.
● ‘낙태약’ 법정 공방도 이어져
낙태권에 대한 논쟁은 ‘낙태약 판매’로 확산되고 있다.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 낙태 금지 입법화에 맞서 바이든 행정부가 낙태약 판매 지원에 나서자 일부 주에선 낙태약 사용 자체를 금지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올 1월 미 식품의약국(FDA)이 먹는 임신중절약의 주요 성분 중 하나인 ‘미페프리스톤’ 판매 관련 규제를 완화하면서 비롯됐다. 기존에는 병원이나 의료시설 등에서 직접 받았어야 했지만 현재는 미국 내 대형 소매 약국에서도 의사 처방전이 있을 경우 구할 수 있게 됐다. 이에 공화당 소속 20개 주 검찰총장들이 낙태 금지 지역에서 이를 판매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소매 약국들에 경고하며 논란이 불거졌다.
미페프리스톤 승인 여부를 둘러싼 소송도 이어지고 있다. 텍사스주 연방법원은 지난달 7일 FDA의 미페프리스톤 사용 승인 처분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2000년 승인 이래 약 23년간 사용되던 낙태약을 한순간에 불법화하겠다는 뜻이다. 미 법무부는 항소와 함께 즉시 연방대법원에 낙태약 승인 취소 판결에 대한 일시 중지를 요청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여성의 자유를 박탈하고 건강을 위협하는 전례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현재 연방대법원은 지난달 21일 텍사스 법원의 판결을 번복하고 항소가 진행되는 동안까지는 낙태약 긴급사용 요청을 승인했다. 다만 낙태약 판매 금지 항소심이 시작되면서 1심 판결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항소 재판이 열리는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제5항소법원의 판사 대부분이 낙태 금지에 찬성하는 공화당 행정부에서 임명한 판사들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우세 지역에서는 반대로 낙태권을 보호하는 입법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 소속 그레천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가 올 4월 낙태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을 퇴출시켰다. ‘낙태 피난처’인 일리노이주는 올 1월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다른 주에서 방문하는 여성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다른 민주당 텃밭인 캘리포니아주 역시 다른 주 여성들에게 낙태약을 우편 배송하는 의사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 공화당 내부서 “대선 패배할라” 우려
낙태권을 둘러싼 갈등은 내년 대선에서도 표심을 가를 핵심 이슈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11월 미 중간선거에서 ‘레드 웨이브(공화당 열풍)’를 예측했던 공화당이 사실상 민주당에 패배한 주요 원인으로 낙태권이 꼽힌다.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은 낙태권 이슈를 대선 캠페인의 핵심으로 내세울 태세다. 낙태 금지법을 통과시킨 주에서도 여전히 낙태 금지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한 가운데 낙태권 이슈를 전면에 내세워 여성과 청년층 표심을 결집하겠다는 계획이다.
16일(현지 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에 있는 주 상원 의사당 앞에서 낙태 반대 시위자들이 ‘생명을 위해 투표해라(vote pro-life)’라는 문구가 담긴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특히 최근 낙태 금지 법안을 통과시킨 노스캐롤라이나주는 2020년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가장 근소하게 패배한 ‘최대 격전지’ 중 하나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의회는 16일 민주당 소속 로이 쿠퍼 주지사의 비토(veto·거부)에도 불구하고 임신 12주 이내 낙태 금지 법안을 다시 통과시켰다. 이 지역은 현재 공화당이 주의회 상·하원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19일(현지 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 지역 바이센테니얼 몰 앞에서 낙태권을 지지하는 수백 명의 시위자들이 모여 ‘우리 몸을 금지하지 말아라(Bans off Our Bodies)’등의 문구가 담긴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롤리=AP 뉴시스
바이든 대통령의 참모진은 “낙태 금지 법안이 선거 쟁점이 될 것은 분명하다”며 “노스캐롤라이나주는 낙태권 문제에 대한 확고한 메시지를 부각할 핵심 지역”이라고 CNN에 밝혔다. 아베 존스 노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은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며 “주 여성들은 (미 대선이 있는) 내년 11월에 이 일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공화당 대선주자들은 대부분 낙태 금지에 찬성하고 있다. 다만 정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공화당 유력 주자로 초반 우위를 달리고 있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예외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면서도 낙태 금지에는 원칙적인 지지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10일 진행된 CNN 타운홀 생방송에서도 “내가 임명한 (보수 성향)의 대법관 덕분에 판결이 폐지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재선 시 낙태를 금지하는 연방법에 서명할 가능성에 대해선 “모두를 위한 효과적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다른 주요 주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는 낙태 금지 시기를 현행 임신 15주 이후에서 6주 이후로 앞당기는 주 법안에 서명하며 더 적극적인 낙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역시 낙태 전면 금지에 찬성하고 있다. 현재까지 나온 유일한 여성 공화당 주자인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미국대사는 “낙태를 금지하는 연방법에 서명하겠다”고 밝히면서도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며 회의적 태도를 보였다.
다만 공화당 내부에서도 낙태권 이슈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강경 지지층을 결집시키지 않고는 공화당 내 경선에서 승리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자칫하다 본선에서 경합주 내 중도층의 표심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과거 낙태는 50 대 50 문제였다면 지금은 공화당의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운) 늪”이라고 전했다.
실제 지난달 미국 내 대표적 경합주로 꼽히는 위스콘신주 대법관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재닛 프로터세이위츠 후보가 보수 성향의 현직 주 대법관인 대니얼 켈리 후보를 약 11%포인트 차로 누르고 당선에 성공했다. 위스콘신주로서는 2008년 이후 15년 만에 진보 우위의 대법원이 구성된 셈이다. 패배한 켈리 후보는 낙태 반대 단체의 지지를 받던 대표적 인물로 알려졌다. AP통신은 “주요 경합주에서 낙태권 문제의 중요성이 드러난 승리”라고 전했다.
여론조사에서도 낙태 금지 법안에 대한 반대 기류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미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가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낙태 찬성 비율은 약 62%, 반대는 약 36%였다. 공화당 지지층에서도 낙태 금지에 대해 크게 호의적이지 않다. 로이터통신과 입소스가 지난달 함께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임신 6주 후 낙태’에 대한 찬성 비율은 45%로, 반대(44%)와 오차범위 내에 있었다. 낙태 금지를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밝힌 공화당 지지자는 43%로, 투표하겠다(40%)는 응답보다 많았다.
이에 따라 공화당 내에서도 낙태 금지 법안을 밀어붙이다 정작 2024년 대선 본선에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공화당 소속 낸시 메이스 하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은 NYT에 “극단주의의 늪에 빠지면 우리는 계속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며 “공화당은 정치적으로 잘못된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워싱턴=문병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