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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넷플릭스에 올라온 다큐멘터리 6부작 '히틀러와 나치, 심판대에 선 악마'(조 벌린저 감독)를 왜 봐야 할까? 비슷한 다큐멘터리나 시사 교양물들은 널려 있지 않은가 말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득세할 조짐이 (미국에서도) 보이기 때문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생명들을 무자비하게 빼앗아 간 시절을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홀로코스트 등 히틀러와 나치가 벌인 잔혹한 행위를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에게 교훈을 들려주기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여섯 편을 보며 가장 놀랍고 인상적이었던 대목을 정리해 본다.
1편 악의 기원
이 시리즈는 미국 CBS 라디오에서 유럽 전황과 관련한 특종 기사들을 여러 건 내보낸 윌리엄 샤이러의 일기와 저서의 문장을 인공지능(AI) 기술로 그의 목소리를 재현해 풀어나간다. 샤이러는 1934년 9월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를 현장에서 취재한 것을 시작으로 뉘른베르크 재판까지 지켜본 생생한 증인이다.
1945년 11월 시작해 이듬해 10월까지 진행된 뉘른베르크 재판을 동영상으로 담은 것은 35시간 분량 뿐이다. 그나마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번 시리즈는 아카이브에서 발굴한 필름에 컬러 색채를 입혀 100년 넘은 일까지 최근의 일로 착각하게 만든다.
위대한 화가가 되고 싶어 했으나 히틀러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지 못해 빈 예술아카데미 입학을 거절당했다.
1차 세계대전 패전의 책임을 독일에게 과도하게 지운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목표를 잃고 방황하던 이들의 극우 민족주의 성향에 불을 지펴 끌어들이는 재주가 탁월했던 히틀러였다. 헤르만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에 매주 월요일 저녁 집회를 연다고 해서 찾아가 히틀러를 처음 만났는데 그의 연설이 "내 영혼에서 들리던 목소리를 듣는 감동을 느꼈다"고 돌아본다.
히틀러는 독일노동당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당으로 바뀌던 순간부터 당에 가입하면 자신이나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 지도자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해야 한다는 서약을 받았다.
히틀러는 어떤 정치세력도 제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판단,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일종의 정치 깡패인 돌격대(SA)를 만들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공격하는 데 활용하는 한편, 지방 말단조직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1923년 바이에른주 각료들을 구금하는 맥주홀 봉기를 일으킨다. 그가 직접 의자 위에 올라가 허공에 총을 쏘고 정부 실권을 선언한다. 하지만 바이에른주 경찰에 진압되는데, 괴링은 다리를 심하게 다쳐 모르핀을 사용한 바람에 평생 중독자로 지내게 된다. 재판 과정에 오히려 히틀러는 국내와 국외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재판부 일부와 몰지각한 대중은 그가 조국 독일을 지독히 사랑한다고 느꼈다. 베르사유 조약과 이를 뒤에서 부추긴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히틀러 주장에 공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당시 유럽인들은 볼세비키를 유대인과 연결짓는 등 근거없는 음로론에 공감하고 있었다. 정치 엘리트들은 분열됐고, 베르사유 조약이 불러온 경제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는데 히틀러는 이 틈을 활용해 '뭔가 열심히 하는 존재'로 나치를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2편 제3제국의 부상
히틀러가 가석방된 1924년부터 1929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구가한다. 하지만 지방은 사정이 달랐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력으로 붕괴시키기 어렵다고 판단, 투표를 통한 합법적인 전복을 노린다.
사진작가 하인리히 호프만은 히틀러에게 다양한 제스처를 취하도록 한 뒤 사진을 찍고 다시 미세조정했다. 선전선동의 천재 요제프 괴벨스는 청중의 기대감이 높아지도록 히틀러가 늦게 도착하고 아무말 않고 있다가 천천히 시작해 연설을 끌어올리도록 훈련을 시킨다. 독일을 이끌 지도자요 구세주 이미지를 각인시키려 열심이었다.
국가와 결혼해 여성과 사귈 시간도 없다고 했던 히틀러는 1931년 23세의 조카 겔리 라우발과의 염문 소문이 돌았다. 뮌헨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외모 비하를 비관하고 히틀러 통제가 심하다는 이유로 괴로워하던 라우발은 히틀러 집에서 히틀러 총으로 자살한다.
1928년 3% 지지에 그쳤던 나치는 1930년 18%, 1932년 37%로 제 1당이 됐다. 프란츠 폰 파펜 총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해 히틀러를 연립정부에 끌어들여 나치를 길들일 수 있다고 오판했다. 히틀러는 총리 직을 내놓으면 받겠다고 고집했고, 좌파가 개입하는 것보다 극우 정부가 낫다고 판단한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인다. 1933년 1월 30일 전통적인 엘리트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은 히틀러는 총리에 취임했다. 내각에 참여한 나치 당원은 둘 뿐이었다. 파펜은 "우리가 히틀러를 궁지로 몰아넣었어요.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겁니다"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엄청난 오판이었다. 파펜은 뉘른베르크 재판 도중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돌아봤다.
다음달 베를린 독일 의회 건물에 큰 불이 났는데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시민들의 자유를 통제하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한다. 또 4년 동안 독일 의회 입법권을 자신에게 부여하도록 했다. 공산 혁명을 막는 길은 자신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허용하는 것이라고 강변했다.
1933년 3월 뮌헨 외곽 다하우에 하인리히 힘러가 최초의 강제수용소를 열었다. 조용하고 안경을 썼으며 현학적이었던 힘러는 재교육 수용소라고 말했다. 잘 먹고 잘 지낸다는 나치 선전과 달리 고문 당하고 살해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히틀러와 나치는 유대인을 인간 이하로 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둘 다 조종하는 강력한 집단으로 보는 모순을 드러냈다. 1933년 4월 1일 괴벨스는 유대인 불매 운동을 시작하자고 선동한다. 하지만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돌격대의 과도한 행동을 우려한 히틀러는 다음날 철회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 군인 수를 10만명으로 제한해야 하기 때문에 군은 돌격대를 해체하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히틀러를 위협했고, 룀은 나치의 권력 장악으로 정치적 반대자가 모두 사라져 돌격대 위상을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돌격대 부상에 위협을 느낀 괴링과 괴벨스는 룀을 몰아내기로 마음먹는다. 히틀러는 게이였던 룀이 상관 없다고 했는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룀을 축출하고 돌격대를 해체하는 데 그의 동성애 성향을 빌미로 이용했다. 일명 긴 칼의 밤인데 히틀러는 직접 총을 들고 룀을 체포한다. 폰 파펜 부총리도 축출됐다. 룀은 친위대원이 자결을 권유했지만 끝내 거부하자 친위대원의 총알 세례를 받았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즉각 자신을 국가원수이자 정부 수반, 총통으로 선포했다. 제1 제국은 신성로마제국, 제2 제국은 비스마르크가 건설하려다 1차 대전으로 망가진 것, 그에 이어 제3 제국이 되고자 했다. 샤이러는 나치의 광기 속에 독일이 전쟁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3편 히틀러의 집권
히틀러가 총애했던 에바 브라운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표방했던 새로운 여성 상에 근접했다. 직접 히틀러 영상을 촬영하기도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널리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히틀러는 하기 싫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게으른 성격이었다. 밤늦게 자리에 들고 늦게 일어나 점심을 느긋하게 즐기고 영화를 두세 편 보기도 했다.
가끔 엉뚱한 얘기를 늘어놓고, 자신을 사로잡을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부하들을 못 살게 굴었다.
1935년 9월 15일 독일인 혈통과 명예회복법을 만들어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불확실한 자신들 지위가 분명해졌다며 거리에서의 폭력을 줄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대공황을 이겨내 완전고용을 이뤘다는 거짓 선전, 힘을 통한 즐거움 운동을 통해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이제 독일 내부를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믿은 나치당은 1936년 3월 라인강을 따라 늘어선 프랑스 국경 가까운 라인란트에 군대를 파견, 베르사유 조약을 형해화했다. 독일인들은 다시 독일이 위대해졌다고 열렬히 환여앴다. 영국과 프랑스 일부는 자신들이 지나쳤다고 독일을 동정했고, 히틀러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해 8월 베를린올림픽은 독일의 위대함을 만방에 떨칠 기회로 활용됐다.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입증하려 했다. 미국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가 3관왕을 차지, 나치는 굴욕감을 느끼긴 했지만, 많은 세계인들은 독일인들이 나치와 조화롭게 지낸다고 오판하게 됐다. 힘러 친위대장은 1936년 베를린 북부 작센하우젠에 2세대 강제수용소를 짓게 한다. 나치가 전쟁 준비에 매달리기 시작한 해인데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 도중 4년 동안 전쟁 준비를 마칠 계획이었다고 인정했다. 젊은 시절 건축가를 꿈꿨던 히틀러는 젊고 유능한 건축가 알버트 슈페어를 끔찍히 아꼈다. 베를린을 게르마니아로 바꿔 천년 제국의 수도로 삼을 작정이었다.동맹으로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를 선택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독립 지지를 철회하도록 무솔리니를 설득한 다음 1938년 2월 12일 쿠르트 슈슈니크 오스트리아 총리를 베르크호프 은신처로 불러들여 친나치 오스트리아인을 정부 요직에 앉히라고 강요했다. 슈슈니크는 국민 투표를 부쳤는데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침공을 준비했다. 다음달 독일군은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히틀러는 고향 브라나우와 불우한 시절을 보냈던 린츠를 통해 25년 만에 빈에 돌아왔다. 젊을 적 즐겨 들었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로엔그린'처럼 말이다. 히틀러는 빈 대중 연설을 통해 "독일 동쪽 영토가 이제 새로운 땅을 얻었다"고 선포했다. 파리 대사관의 독일 외교관이 살해되자 히틀러와 1938년 11월 괴벨스는 빈 시나고그 등에서 깨진 유리의 밤을 일으켰다. 히틀러는 이듬해 총리 취임 4주년 연설을 통해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유대인들이 말살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샤이러는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히틀러의 이런 계획을 알아채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4편 파멸의 길
히틀러와 나치의 목표는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나도록 더 많은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1937년 11월 5일 작성된 호스바흐 메모는 히틀러가 총리 관저에서 진행된 비밀 회의 도중 몇몇에게 "우리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할 것이다. 생활 공간(레벤스라움)을 정복해야 한다.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국민으로서 실패할 것이고 살 자격이 없으니 멸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체코 서부 주데텐란트에 몇몇 독일인이 살고 있는 점을 들어 침략하겠다고 공공연히 위협했다. 1938년 9월 뮌헨 협상에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독일이 주데텐란트 권리를 갖고 있다고 결정했다. 이듬해 3월 프라하를 점령했고 체코 군은 저항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요하임 폰 리벤도르프와 몰로토프가 모스크바에서 만나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게 했다.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길이 열렸다고 보고했다. 불과 며칠 뒤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폴란드 침공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힘러는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군복을 입혀 죽인 다음 폴란드가 도발했다고 모략을 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이 시작됐다.
같은 달 17일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를 분할 통치하기로 경계선을 정했다는 사실이 뉘른베르크 재판 도중 리벤드로프의 증언으로 확인되자 소련측 검사조차 처음 듣는 얘기라고 놀라워했다. 폴란드는 영국의 보장도 헛되이 18일 만에 지도에서 사라졌다.
독일의 인종차별 움직임과 레벤스라움 뒤에 숨어 있는 아이디어, 동유럽 지배를 위한 잔혹한 비전 뒤에 숨은 모든 아이디어는 '나의 투쟁'과 히틀러의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나치가 이런 정책을 처음 수해할 기회를 얻은 곳은 1939년 폴란드였다. 권력이 엄청 세진 힘러는 폴란드 장악과 동시에 유대인 탄압을 급진화했다. 폴란드는 유럽에서도 가장 많은 유대인 인구를 거느리고 있어서 나치는 아주 좁은 게토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기로 했다.
1939년 9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지만 두 나라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때를 기다리고만 있었다. 히틀러는 1차 대전 패전의 원인으로 지목된 두 개의 전선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또 동부로 진격해 레벤스라움을 확장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영국을 철저히 고립시키려 했다. 해서 스페인 북부까지 길다랗게 영국 봉쇄선을 펼쳐놓고 있었다. 덩케르크 철수 이후 프랑스는 극심한 정치적 분열에 시달렸고 결국 휴전 협정을 맺는다고 발표했는데 실은 프랑스의 항복 협정이었다. 1차 대전 때 독일에 굴욕적인 협정을 체결했던 장소에서 1940년 6월 22일 협정에 서명했다. 파리 외곽 콩피에뉴 작은 박물관에 있던 열차를 철로에 앉히고 히틀러가 그곳을 직접 찾아 서명했다. 히틀러는 에펠탑과 팡테온, 나폴레옹 기념비를 돌아본 뒤 독일로 돌아갔다. 히틀러나 독일인에게 엄청난 승리였다.
이제 영국 침략을 고민해야 했다. 괴링은 공중전에서 영국을 압도할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아니었다. 스핏파이어란 뛰어난 항공기 덕이었다. 런던 등의 공습 피해로 오히려 영국인들은 똘똘 뭉쳤다. 1939년 10월 22일 폴란드 점령지 행정에 관한 총리 포고령이 공포돼 유대인 노동자들을 강제로 노동하도록 했다.
독일이 차츰 강대국이 되는 것에 스탈린은 내심 불안해 했다. 그 틈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합병했다. 히틀러는 영국 침략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서유럽과 중부 유럽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몰로토프를 보내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자고 종용했다. 1940년 11월 몰로토프는 베를린을 찾았다. 몰로토프는 히틀러가 유럽의 미래를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 스탈린으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았다. 핀란드에 왜 독일 군대가 있는지도 묻고 싶어했다. 히틀러는 몰로토프에게 곧 영국을 굴복시킬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이튿날 협상을 재개하려는 순간에 영국 폭격기들의 공습이 있다며 벙커로 피신하라고 했다. 리벤트로프도 영국군을 곧 물리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자 몰로토프는 '그러면 왜 우리가 지금 벙커에 앉아 있는 거지?'라고 농을 한 뒤 협상을 관두고 돌아갔다. 히틀러는 곧바로 소련과의 전쟁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했다. 300만 병력에 3000대의 탱크, 60만 마리의 말, 3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고, 발트해부터 북해까지 3000km에 이르는 전선을 형성했다. 중세 독일 황제 이름을 딴 바르보르사 작전이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200만~250만 병력이어서 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 충돌이 벌어졌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읍습한 마수리아 늪지대에 만들어진 늑대 소굴을 군사본부로 삼았다. 몇 주만 이곳에서 지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정한 듯 대량살상과 파괴를 목표로 한 작전이었다.
5편 인류에 대한 범죄(불편한 영상이 포함돼 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이 전쟁에 참전해야 하느냐는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히틀러가 미국을 상대로 전쟁하자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전쟁에 끌려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맞서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야말로 유대인 세계의 시장이라고, 모스크바는 유대인 음모론의 중심지라고 확신했다.
스탈린은 독일 침공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100건 이상 받고도 가짜 정보라고 넘어갔다. 히틀러는 이념전쟁과 인종전쟁은 같은 것이라며 절멸이란 단어를 줄곧 썼다. 독일군은 발트해에서 레닌그라드를, 벨라루스를 거쳐 모스크바로, 리투아니아를 거쳐 흑해를 차지하는 세 방향으로 진격했다. 이에 반해 소련은 이미 검증된 대로 사람과 자원을 끊임없이 전장에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시간과의 싸움에서 독일은 지기 시작했다. 강력한 반격에 서쪽으로 100km를 병력을 퇴각시켰다. 거기에서 옴짝달싹 못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중단됐고, 장군들은 신경쇠약에 걸려 히틀러가 묘수를 찾아주기만을 고대했다. 몇몇 장군은 전술적 후퇴를 주장했는데 히틀러는 막무가내였다. 장군들이 겁쟁이고 반역을 한다고 생각, 본인이 최고 사령관이 되겠다고 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 "육군 소속 야전사령관 17명 중 한 명만이 자리를 유지했다"고 증언했다.
히틀러는 오직 동부만 중요하게 생각했고, 서부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군 전력의 3분의 2가 이곳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는 서부는 별개로 치더라도 동부에서 두 전쟁, 즉 군사적인 전쟁과 인종전쟁을 치르려 생각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이란 학살 특수부대를 창설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쓰레기 같은 지휘관들이 지휘했겠거니 생각하겠지만 학위도 있는 이들이었다. 폴란드에서는 오래 전에 학살할 6만명 명단을 추려놓은 상태였다.
1941년 9월 29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독일군은 붉은 군대에 보복한다며 유대인 3만 5000명을 바빈야르 골짜기로 끌고가 옷을 벗게 한 다음 총으로 사살했다. 오토 올렌토르프는 아인자츠그루펜 D부대 지휘관으로 법학 학위를 갖고 있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 도중 "1941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9만명을 처형했다. 두 차례 직접 처형 현장을 점검했다. 유대인을 박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친위대는 이런 처형을 집행하는 이들에게 술을 내려 보상했다. 정신건강을 심히 걱정했다. 150만명이 이런 식으로 처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힘러는 한 현장을 보러갔다가 뇌수가 상의에 튀는 바람에 낯색이 창백해졌다. '고작 100명 처형하는 데도 이렇게 힘드나' 말했고, 그 뒤 유대인 처형 방식이 달라졌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히틀러는 늘 구두명령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해 역사가들이 추적할 만한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힘러의 지시를 받아 유대인 학살을 계획하고 개념화한 인물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였다.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비아냥을 들은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아리안인의 외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반제 빌라에서 부하인 아돌프 아이히만과 함께 소집한 회의로 제3제국 고위 관료들의 협조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이드리히는 "지금까지 우리는 유대인 문제를 이민으로 해결해왔는데 오늘부터 유럽의 서쪽부터 동쪽까지 모두 뒤져 남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수용소로 보내 없애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친위대가 주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모든 부처가 협조해야 가능한 일인데 하이드리히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모두 순순히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유럽 유대인 1100만명을 끝장내겠다고 결의한 이들은 뷔페 음식을 들었고, 하이드리히와 아이히만은 일이 순조롭게 풀렸다며 샴페인으로 축배를 들고 안 피우던 시가를 물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J) 검찰은 영상보다 좋은 증거는 없다면서 폴란드 당국이 세운 여섯 군데 절멸수용소를 촬영한 필름들을 꼼꼼이 살펴보게 했다. 소련은 로만 카르만을, 미국은 버드와 스튜어트 슐버그 형제와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에게 그 일을 맡겼다. 수용소가 해방된 직후 촬영한 영상을 피고인들에게 보여주자 피고인들은 깜짝 놀라며 딴 곳을 쳐다보거나 수치심에 고개를 떨궜지만, 지루해 죽겠다는 반응을 보인 이들도 있었다.
1942년 1월 20일 히틀러는 봄이 오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하고, 청중은 하일 히틀러를 연호한다. 늑대소굴에서 히틀러는 유전과 스탈린그라드를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며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운다. 6월에 진격을 시작했는데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빨랐다. 붉은군대는 작정한 듯 뒤로 물러섰다. 스탈린그라드 주변에서 멈춰선 붉은군대는 도시에 숨어 시가전을 벌인다. 파울루스 장군은 항복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간청했지만 히틀러는 절대 안된다고 답한다. 그래도 파울루스가 항복하자 히틀러는 광분한다. 30만 병력 가운데 절반이 몰살한 처참한 패배였다.
검사가 뉘른베르크 재판 증인으로 파울루스의 이름을 부르자 법정 안이 술렁였다. 모두들 파울루스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배신자로 생각한 괴링은 매우 불쾌해 했다. 파울루스는 전쟁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검사가 묻자 "군사고문들"이라며 카이텔, 알프레트 조들, 괴링의 이름을 들었다.
사실 이 때 전쟁의 향배는 결정됐는데 히틀러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희생된 15만명 이상에게 어떤 위로나 유감 표명도, 자신의 책임도 인정하지 않았다. 늑대소굴에서 장군들을 향해 화를 낼 뿐이었다. 국민들 앞에 나서려 해도 군사적 성공을 거둔 뒤에나 가능하다고 뻗댔다. 괴벨스는 1943년 2월 18일 전격전 연설을 기획했다.
연합군은 독일 도시들을 전멸시킬 수 있을 전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매일 밤 보여줬다. 함부르크에서만 4만명이 사망했다.
힘러는 1943년 10월 폴란드 포젠에서 지휘관들을 상대로 연설했는데 "유대인 이주란 절멸을 의미한다"고 했다. 나치 지도자가 공개 인정한 몇 안되는 경우다.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예외는 제외하고 품위있는 사람으로 지내는 건 우리를 강인하게 만들었다. 이건 기록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기록되지 않을 우리 역사의 영광스러운 한 페이지다. 전반적으로 우리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가장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내면, 영혼, 인격에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1943년 바르샤바 봉기는 대단했다. 유대인들이 열차에 실려 동쪽으로 끌려가는데 항상 빈 채로 돌아오자 절멸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게토를 공격하자 화염병과 약간의 총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이 기습했다. 새 독일 사령관은 화염방사기로 불을 질렀다. 구경하던 이들은 "유대인들이 구워지고 있어"라고 말했다. 그렇게 봉기는 막을 내렸다.
1944년 6월 6일과 다음날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에 미국, 영국, 캐나다가 합동 상륙작전을 펼쳐 독일로 진군할 길을 열었다. 히틀러는 전날 참모들과 호시절 얘기를 늘어놓다가 이른 아침 노르망디 얘기를 듣고 절망했다. 히틀러는 그저 주의를 돌리려는 연합군의 술책이라고 과소평가했다.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은 히틀러에게 진짜 두 개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히틀러는 환상에 젖어 끝까지 싸울 태세였다. 이런 상황에 그라프 클라우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히틀러를 암살하는 발키리 작전에 자원했다. 1944년 7월 20일 늑대소굴을 찾아 폭탄을 히틀러 발치에 내려놓았는데 화장실 문을 자꾸 두드려 포폭탄을 하나 밖에 조립하지 못했고, 하필 회의 직전 목조 건물로 옮겨져 폭발 위력이 줄어들었고, 누군가 폭탄 가방을 옮긴 바람에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 충격으로 히틀러는 무턱대고 남을 의심하고, 자제력을 잃고, 폭력성이 두드러졌다. 반쯤 미친 채 빠르게 무너져내리는 남자가 거의 혼자 힘으로 전쟁의 고통을 일 년 가까이 연장했다. 그렇지만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6편 심판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1944년 말 서부전선에서의 대대적 반격을 꾀했다. 고위 장성들의 조언을 일축하고 동부 병력을 빼내 서부로 배치했다. 독군은 전격전을 계속해 벨기에 남부 벌지 쪽으로 돌출된 전선을 갖게 됐다. 연합군은 잘 버텨냈고, 독일 탱크는 연료 부족으로 진격을 멈추게 됐다. 동부는 허술해졌고 이 틈을 타 붉은군대는 속도를 높였다. 그 시기 독일 열차는 전선이 아니라 헝가리의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아우슈비츠로 이동하고 있었다.
붉은 군대는 4년을 끈 전쟁에 대한 보복으로 말도 안되는 강간을 일삼았다. 독일 국민들의 공포는 극대화됐다.
히틀러의 총애를 받던 슈페어 군수부 장관은 1945년 초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판단, 히틀러 앞으로 투항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 도중 "히틀러가대역죄로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들었다"고 증언했다.
괴벨스는 국민돌격대를 만들었는데 소년들, 노인들을 징집한 것이어서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500만명이 죽고 젊은 자원들이 고갈됐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폭격이 심해지자 총리 관저 대신 벙커 단지로 숨은 히틀러는 폭격으로 피해 입은 이들을 찾아 위로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팔다리 떨림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각종 약물을 섞어 복용했고,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그리고 심드렁해 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종전 후 곧바로 독일에 책임을 묻기로 합의했다. 이 때문에도 히틀러는 완강히 버티려 했다. 연합군은 공습 강도를 높여 드레스덴 같은 도시는 폐허가 됐다. 공포를 일으켜 전쟁을 끝내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틀 동안 2만 5000명이 숨졌다. 화재 폭풍 때문에 방공호에 피해 있던 사람들이 질식사했다.
3월 15일 슈페어는 직접 히틀러를 찾아 "독일인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간청했지만 히틀러는 "우리 스스로 파괴하는 게 더 낫다. 이 나라는 약소국임이 입증될 것이고 미래는 오직 더 강한 동부 국가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뒤 나가버렸다. 히틀러는 인종 투쟁이 역사와 삶의 전부라고 믿었다. 히틀러는 무분별한 초토화 작전을 지시했다.
오랜 연인 에바 브라운이 벙커를 찾아왔다. 바이에른에 숨어 있으란 히틀러의 당부를 어기고 최후의 순간을 함께 보내려 찾아왔다.
1945년 4월 15일 독일 북부 베르겐 벨젠 수용소를 영국군이 해방시켰다. 리처드 딤블비 BBC 기자가 현장 리포트를 했다. "장벽 너머로 들어가자 악몽의 세계가 펼쳐졌다. 시체 일부는 부패한 채로 바퀴 자국이 움푹 팬 길을 따라 널브러져 있었다. 죽은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이 가까이 누워 있었다. 몸 위로 이가 기어다니고 오물이 묻어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한 여성은 한 영국 병사에게 몸을 던지더니 품에 안고 있는 아기에게 우유를 달라고 애걸했다. 아이는 죽은 지 며칠 된 상태였다." 나치 수용소에 대한 최초의 진정한 폭로였다.
샤이러는 이 보도를 듣고 나치가 나쁜 정권이란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며 자신이 조금 더 많이 홀로코스트의 진상을 세계 언론에 고발하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죽자 히틀러와 괴벨스는 전세를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4월 베를린 폭격이 더 심해졌다. 히틀러의 마지막 영상은 청소년 단원 20명을 격려하려고 잠깐 벙커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소년들은 곧 죽을 운명을 모른 채 웃고 있었다.
히틀러의 마지막 생일은 비참할 정도로 단촐했다. 힘러는 히틀러에게 벙커를 떠나라고 얘기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저혼자 벙커를 떠났다. 괴벨스는 아내와 여섯 자녀를 데려왔다.
4월 25일 라이프치히 부근 엘베강 유역에서 연합군과 붉은 군대가 조우했다. 전쟁 초기 독일의 전쟁 기계를 막을 수 없다고 보였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다.
4월 22일 히틀러가 일부 지휘관들에게 역정을 냈는데 히틀러가 자기 생각에도 과했는지 뉘우친 뒤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총통 자리를 자신에게 물려줘 고맙다"고 했고, 당연히 히틀러는 또 광분했다. 힘러는 연합군과 항복 조건을 놓고 협상을 시도했다고 BBC가 보도했다. 힘러를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로 여겼던 히틀러는 크게 낙담했다.
같은 달 29일 히틀러는 두 가지 중요한 문서를 여비서 트라우들 융게에게 타이핑하도록 했다. 하나는 개인적 유서, 하나는 정치적 문서였다. 융게는 히틀러가 늘 하던 말, 유대인과 복수, 유대인을 상대하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결을 결심한 히틀러는 애지중지하던 저먼셰퍼드 블론디에게 억지로 청산가리 약을 먹여 숨을 끊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무솔리니가 주유소에 교수됐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그런 일은 당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듯했다. 28일 아니면 29일 밤 그는 에바와 결혼식을 올렸다. 브라운은 융게에게 "히틀러 부인"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조찬을 마친 히틀러는 모두에게 청산가리 캡슐을 나눠줬다. 브라운이 먼저 깨물고 숨이 끊겼는데 히틀러가 깨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관자놀이에 권총을 쏴 자결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친위대원들은 시신들을 모두 지상으로 옮겨 끌어모을 수 있는 석유를 모두 끼얹어 불태웠다. 괴벨스는 부인 마그다와 여섯 자녀에게 청산가리를 먹이고 자신들도 먹었다.
히틀러의 죽음이 알려진 뒤 고위급 인사들이 차례로 자결했다. 힘러도 자살했는데 영국군에 체포된 뒤였다. 조들 장군은 "독일 운명을 승자의 손에 맡기는데 너그럽기만을 바란다"고 말했다. 전 유럽이 축하했는데 샤이러는 "그렇게 강해만 보이던 독일이 무너졌다"며 의아해 했다.
승리의 얼굴이나 패배의 얼굴이나 같다. 나치 고위직들의 체포 순간이 줄줄이 이어진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찾은 샤이러는 이런 날이 올줄 몰랐다고 말한다. 피고인들의 최후 진술이 이어지는데 "히틀러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거나 슈페어처럼 자신도 피해자란 점을 부각시키려 애썼다. 리벤트로프는 영국과 미국, 러시아의 야욕에 책임을 돌렸다. 폴란드 괴뢰정부 책임자였던 한스 프랑크는 "독일 국민에 대한 충심이 나쁜 지시를 내리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당시는 몰랐다"고 변명했다. 괴링은 아예 "내가 한 일에 당당하다. 단 한 사람의 살해도 지시한 적이 없다"면서 "어떤 문서나 증거도 내 잘못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강변했다.
파펜과 샤흐트 등 3명은 무죄를, 19명이 유죄를 인정받았다. 슈페어는 전쟁을 포기할 것을 히틀러에게 청했다는 점을 들어 징역 20년형을, 루돌프 헤스는 종신형을, 괴링 등 1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괴링은 형장에 끌려가기 직전 미리 반입한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었다. 교수형을 당한 11명의 최후 모습이 짤막하게 보여진다.
샤이러는 어느 정도 정의가 살아 있었음을 확인하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계속 살아나갈 의지를 갖고 자신과 동료,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마음 속에 어떤 긍지가 차오른다"고 말한다.
자막으로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은 뉘른베르크에서 12차례 추가 전범 재판을 열었다. 관료 185명을 기소해 142명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2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고 알린다. 여성의 내레이션으로 "전범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냉전이 시작됐고 미국의 정책이 바뀌어 과학이나 기술 분야에 도움이 되는 나치들은 미국으로 초청됐다. 그들의 쓰임새가 도덕적 심판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샤이러와 전문가들의 음성이 들려온다. "흔히 역사를 쓸 때 독자더러 결론을 내리게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분열과 극도의 편협함이 만연해 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치 독일에서 일어난 일의 교훈을 대부분 잊어버린 듯하다. 권위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다시 자막. 현재 미국에는 적어도 30곳 이상의 신나치 단체가 활동 중이며 유럽 전역에선 훨씬 더 많은 수가 존재한다.
샤이러의 손녀는 말한다. "할아버지는 늘 얘기했다. 독일에서 일어난 일은 여기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요. 최대한 경계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고도요. 현실에 안주해선 안됩니다."
다시 샤이러의 경책이다. "전체주의 땅에서 배운 것은 독재자들이 부정하는 것들을 매우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 타인에 대한 존중, 무엇보다도 인간 정신의 자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