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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2.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1762년)
사실 어린 시절 사도세자의 특기와 성격은 전형적인 조선 중~후기 왕들과 다를 뿐, 객관적으로는 흠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전혀 문제가 없다. 특히 사도세자는 그 좋은 특기와 문제가 없는 성격이 기본적인 천성이었다. 부드럽고 유약한 성격은 영조의 할아버지이자 사도세자의 증조부인 현종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이해해주질 않고 무조건 자기 방식에만 맞추라고 고집 및 강요하는 영조의 아들로 태어난 죄로, 억울하게 개고생을 해야 했다.
조선의 세자 교육이 혹독했다고 해도, 엄연히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교육과정도 국왕이 명망 있는 문신들을 서연관(書筵官)으로 임명한 뒤, 그들에게 믿고 맡기며 틈틈이 세자와 스승들을 불러 점검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영조는 전례도 없이 이런 단계를 싸그리 무시하고는 세자에게 무리하고 혹독한 조기교육을 시키며, 교육과정에도 과도하게 개입하고 간섭했다.
1743년 9월경부터 세자는 "눈에 어지럼증(눈병)이 생겼다"고 스승들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스승들은 영조에게 "세자 저하를 먼저 치료받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십시오"라고 영조에게 말하지만, 영조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스승들이 재차 충고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내가 세자에게 물어보니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그러니 치료는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승정원일기 1743년 음11월 10일과 음11월 14일의 기록이다. 아들이 진짜로 병이 나서 치료해야 하고 스승들도 걱정하는데 영조는 오히려 "세자가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승들의 조언을 무시한 영조는 계속해서 공부하게 했고, 논어(論語)를 읽게 한 후에 세자에게 공부하라고 훈계하는 글을 내리는가 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공부하라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영조 23년 11월 11일에 영조가 세자와 주강을 같이 행하다가 질문을 한 일이 있었다.
영조 : 한나라의 어느 제왕(帝王)이 우수하다고 여기느냐?
세자 : 문제(文帝)입니다.
영조 : 너는 어째서 고조(高祖)를 말하지 않느냐?
세자 : 문제와 경제(敬帝)의 치적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영조 : 너의 기질로는 필시 무제(武帝)를 좋아할 것인데, 도리어 문제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세자 : 무제는 비록 쾌활(快活)하지만, 오히려 오활(迂闊)한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조 : 어떤 일이 오활하고 어떤 일이 쾌활한 것이냐?
세자 : 급암(級岩)을 포용한 것이 영웅의 일이고 쾌활한 부분입니다.
영조 : 그것을 어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반드시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세자 : 급암의 강직함을 포용하고 주었으니 자못 고조의 활달한 기상(氣像)이 있습니다.
영조 : 네가 만약 급암을 포용한 것을 두고 참된 영웅이라 생각한다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중략) 심하다. 어리석은 말이다. 비록 강직함을 포용하였으나 역시 등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중서는 강도에서 늙어갔고, 급암은 회양으로 내쳐졌던 것이니 진실로 개연한 일이다.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것은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하니, 너는 이러한 것에 더 힘써라!
여기서 나오는 '급암'이라는 자는 무제의 신하로, 왕에게 쓴소리, 즉 바른말 잘하는 신하였다. 한번은 회의하다가 급암이 한무제에게 대놓고 돌직구를 던진 적도 있었는데, 한무제는 쌍욕만 하고 끝냈다고 한다. 급암의 돌직구에 기분이 상해서 욕은 했지만 따로 벌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문제는 급암을 중용하지도 않았고 그의 주장을 잘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급암은 회양 태수로 세월을 보냈는데, 이 일화를 두고 서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사도세자의 말을 "어리석다"고 말하면서 가르친다. 말하자면, "돌직구 한번 던진 걸 넘어가 주는 게 영웅이냐? 폭군이 아니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지. 근데 중용(重用)하지는 않았잖아. 강직한 것을 포용하는 건, 강직한 이를 등용하는 것만 못해!"라고 질책을 한 것. 이때 세자는 (세는 나이) 13세, 현대의 초등학교 6학년이다.
그러고도 영조 24년(1748) 음5월 19일 소대(訴對)를 행하고 똑같은 내용을 또 물어본다. "한무제하고 한고조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세자가 "고조가 나았지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그럼 한 문제와 한무제 중에서는 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냐?"라고 물었다. 세자는 "문제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또 화를 냈다.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한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당황한 세자가 "문제, 경제가 무제보다 훌륭한 정치를 했습니다"라고 변명하자, 영조는 수그러들지 않고 "네가 시를 쓴 것을 보니 호랑이가 울부짖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으로 네 기가 매우 승한 것을 알 수 있다." 라고 꾸짖었다. 즉 말 같지도 않은 것을 트집 잡아 갈궜다는 소리. 다음은 영조실록에 실린 원문이다.
임금이 소대(訴對)를 행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무제(武帝) 중 누가 더 훌륭한가?”하니,
왕세자가 대답하기를, “고조의 기상이 훌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문제와 무제(武帝)는 누가 더 훌륭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가 훌륭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나를 속이는 것이다. 너의 마음은 반드시 무제를 통쾌하게 여길 것인데, 어찌하여 문제를 훌륭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문제·경제(景帝)의 정치가 무제보다 훌륭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는 앞으로 문제·경제의 반 정도만으로 나를 섬겨도 족하다. 내가 매양 한나라 무제로 너를 경계했는데, 너의 시 가운데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虎嘯深山大風吹]’는 글귀가 있어 기(氣)가 크게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니,
시독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기(氣)가 승한 것 같지만 매우 안중(安重)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촌음(寸陰)을 아끼라는 옛말이 있는데, 춘방의 여러 신하들은 매양 서연이나 소대가 있을 적마다 성심을 다하여 부지런히 해서 원량으로 하여금 학문에 정진하게 함으로써 임금 노릇하는 방도를 알게 한다면, 종사의 다행이겠다.” 하니,
이영복(李永福) 등이 일어나 절하면서 말하기를, “삼가 하교를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5월 19일 임인 2번째 기사
무엇보다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는 성격이 매우 달랐다. 한중록에서 두 사람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영조는 꼼꼼히 살피고 재빠른 성품인데, 세자는 덕성은 거룩해도 과묵하고 행동이 빠르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세자의 모든 일이 부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평소 묻는 말에도 즉시 대답하지 못해서 머뭇거리면서 대답하고, 영조는 매번 갑갑하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영유아기부터 학대받고 자란 사람이 그 주체 앞에서 기죽고 눈치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공부를 해도 야단 맞고, 안 해도 욕 먹고, 영조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면 생각과 말이 다르다며 혼나고, 솔직하게 말하면 임금 될 사람의 마음가짐이 그따위냐며 갈굼만 받으니, 공부를 더 싫어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도세자와 영조가 이러한 갈등을 빚은 것은, 영조가 정통성 문제로 신하들에게 오래 시달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영조는 왕세제를 거쳐 즉위한데다 어머니 숙빈 최씨마저 무수리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신분이 미천했고, 오죽하면 '게장으로 이복형 경종을 암살했다'는 항간의 소문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것도 영조의 태도를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는데, 사도세자는 영조 자신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려면 형인 경종이 후사 없이 일찍 죽는 것 외에도 한 가지가 더 필요했는데, 바로 영조 자신에게 아들이 없을 것이었다. 만약 사도세자가 경종 생전에 태어났다면 사도세자가 경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를 계승할 수도 있었다. 즉 따지자면 사도세자의 왕위 계승권이 더 높을 수 있었을 정도로 사도세자의 출신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영조가 구태여 사도세자를 그렇게 갈굴 이유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사도세자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면 어머니가 비록 후궁일지언정 양인 출신으로 추정되는 궁녀 출신이었고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도 않았으니, 오로지 아버지 영조뿐이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투했다", 혹은 "열등감을 느꼈다", "편하게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못마땅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3.3. 대리청정과 이후
한편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또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자주,아니 많이 선위 파동을 벌이곤 했다.
"자꾸 신하들이 말 안 듣고 노골적인 당파 싸움(붕당 정치)만 하니까 왕 노릇 못 해 먹겠다. 이게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니 왕 때려 치울란다."라는 내용으로 난리를 쳐서 노론ㆍ소론 신하들에게 "한 번만 더 저희가 당파싸움을 하면 저희를 벌하소서."란 맹세를 받아내는 식이었다. 왕이 선위한다고 하면 신하와 세자가 일단 "아니 되옵니다!!!"라고 격렬히 반대, 또는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싹싹 비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다. 왜냐하면 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다른 왕을 세운다는 건, 그 다른 왕이 지금의 세자라 할지라도 금상(今上)에 대한 역모 및 반역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는 조선에서 가장 석고대죄를 많이 한 인물로 추정된다. 사도세자가 2살 때 벌인 선위 파동이야 2살짜리에게 책임이 돌아갈 순 없었으니 별 일 없었지만, 사도세자가 15세 때 벌어진 영조 25년의 선위 파동은 "선위가 싫으면 대리청정이라도 시켜라. 그것도 싫으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영조가 막나가는 바람에 선위보단 한 단계 낮은 대리청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희대의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영조의 대리청정은 이름만 대리청정이지, 실제론 왕권 강화를 위한 쇼에 불과했다. 이 대리청정을 들어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믿고 대리청정을 시켰다는 서술이 과거에는 많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고, 영조는 왕의 일을 세자에게 맡길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당장 정사를 보기 시작한지 달포가 안 되는 영조 25년(1749년) 2월 16일에 바로 영조의 의도가 드러난다.
영조 : "오늘은 곧 원량(元良)이 시좌하여 처음으로 정사를 여는 날이다. 품달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원량에게 품달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 (사도세자에게) 무릇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에 대하여 만약 ‘그렇게 하라.[依爲之.]’라는 3글자로써 미봉적으로 대답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한 뒤에 결정하라."
영의정 김재로 : "함경북도 성진 방영(城津防營)은 도로 길주(吉州)에 소속시키는 것이 편리합니다."
좌의정 조현명 : "육진(六鎭)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 9갈래가 있는데, 길주는 요충에 해당하지만 성진은 단지 3갈래 길만 막을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 : "방영(防營)을 비록 길주에 도로 소속시키더라도 성진에 역시 군졸이 있는가?"
김재로 : "진졸(鎭卒)이 있습니다."
사도세자 :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옳겠다."
영조 :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당초 방영(防營)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이미 나에게서 나온 것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의당 먼저 대신에게 물어 보고, 또 나에게도 품(稟)한 뒤에 시행하는 것이 옳다."
결국 영조는 이 문제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 지켜보겠다고 하던 영조가, 첫날부터 자기 말을 대놓고 어긴 것이다. 거기다 세자가 한 결정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세자가 처리한 방향이 옳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영조가 화를 낸 이유는 단지 자기가 한 걸 마음대로 바꿨다는 이유였다. 거기에 영조는 길주ㆍ성진의 병영 배치 문제를 자신이 직접 그대로 주관한 다음에 또 질책해서 사도세자의 기를 죽이는 발언을 한다.
"너는 깊은 궁중(宮中)에서 태어나 안락하게 자랐으니 어떻게 임금 노릇하기가 어려운 줄을 알겠느냐? 지금 길주에 관한 한 가지 일을 보니 손쉽게 처리해 버리는 병통(病痛)이 없지 않다. 나는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명령도 감히 방심하여 함부로 하지 않았고, 조제에 고심하여 머리와 수염이 모두 허옇게 되었는데, 25년 동안 서로 살해한 적이 없었으니 너는 이를 금석(金石)처럼 지킴이 마땅하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도리는 그들을 모아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분리해서 쓰는 것이 옳겠느냐? 저 여러 신하들은 그들의 선대를 따져 보면 모두 혼인으로 맺어진 서로 좋은 사이지만, 당론이 한번 나오게 되자 문득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멀어져 각기 서로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내가 고집스럽게 조제(造製)에 힘쓴 것은 단연코 옳은 것이다. 지금 진언하는 자들이 혹자는 말하기를,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당파 하나를 만들었다.’ 하고, 혹자는 ‘조제하는 것이 도리어 편협하다.’ 하며, 혹자는 ‘현명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등 그 말하는 바가 천만 갈래로 나뉘었다. 비록 감히 서로 살해하지는 못했으나, 서로 살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적이 없었다.
오늘부터 네가 만약 신하들이 아뢰는 대로 듣고 믿어서 시원스럽게 그 말에 따르기를 지금 길주의 일과 같이 한다면, 그 결과 종묘사직과 신하와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한쪽은 나아가고 한쪽은 물러남이 겉으로는 시원스럽게 보이지만 당쟁을 열어 놓게 되는 것이니, 네가 이 명을 지키지 않으면 뒷날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느냐? 400년 조종(祖宗)의 기업과 한 나라의 억만 백성을 너에게 부탁하였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기대를 저버림이 없도록 하라."
특히 위에서 영조는 반드시 '대신에게 묻고' 자신의 의견을 참작하여 결정하라고 했고, 사도세자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방영의 일을 마음대로 정했다"고 나무라는 이 대목에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신하들이 옛날부터 혼맥 등으로 연결돼 사이가 돈독해 보여도, 실은 초나라와 월나라의 지간처럼 철천지 원수들이라 틈만 나면 물어뜯기 바빠. 네가 신하들 하는 말을 곧이 들어주는 게 일단 시원스러워 보여도, 그렇게 어느 한 쪽에 힘을 실어주고 뺏고 하다보면 당쟁의 빌미가 된다. 나는 25년 동안 신하들 중재를 게을리한 적이 없는데 네가 나처럼 안 하고 방금처럼 니 멋대로 하다 나중에 사고 터지면 무슨 낯으로 내 얼굴 볼래? 널 믿고 맡기는 건데 잘 좀 해라!"라고 한다. 이쯤되면 사도세자 입장에선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싶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사실 애시당초 목적이 그냥 갈구는 것이었으니 답이 없기는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가 마음대로 뭘 할 수 있었을까? 세자는 말만 대리청정이지 "알았다.", "안 된다.", "대조(大朝, 영조)께 물어보고 결정하겠다."라는 말들만 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처럼 이렇게 신하들 앞에서 세자의 권위를 박살내는 건 세자를 견제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입만 열면 욕먹는 세자를 신하들이 불쌍히 여길지언정 '윗사람'으로서 권위를 느낄 리는 없고 신하들도 임금을 좋게 볼수 없다.
이덕일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친소론 성향을 보이자, 불안해진 노론 대신들이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론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도세자가 골수 소론이라도 친소론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다. 영조의 질책이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됐는데, 세자가 사소한 걸 물어보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고 화내며, 안 물어보면 "제멋대로 했다"고 화를 내는것이다. 그러니 가뜩이나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세자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성질 더러운 숙종조차 아들 경종의 대리청정 기간에 일부러 1시간이나 늦게 입시한 승지 때문에 경종이 벌컥 화를 냈다가 곧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입시시킨 일을 비망기(備忘記)로 책망했다가, 신하들이 "그렇게 뭐라 하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지적하자 뻘쭘해한 일이 있었다. 하물며 영조는 신하들과 사도세자 사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것도 단둘이 있을때 혼내거나 꾸짖는거면 또 모를까,훗날 세자가 즉위하면 신하가 될 대신들 앞에서 갑자기 불러다가 막말을 퍼붓고, 보다못해서 이를 말리는 신하에게마저 화를 내며 모욕하는 수준이었으니, 사도세자가 얽히면 군신관계에서의 조심스러움마저 안중에 없었다는 거다.
그 와중에 자기 권위 높이려고 선위하겠다는 둥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세자를 괴롭혀서,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혼절하고 궁인들에게 실려 나가는 일도 있었다. 보다못한 신하들이 "잘 하고 있는 세자를 왜 못살게 구세요?"라고 항의해도, 영조는 오히려 그들에게도 막무가내식으로 화를 냈다. 특히 세자를 옹호한 신하들 중엔 노론 대신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당파 싸움보다는 영조의 학대와 독단적인 결정이 더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애초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틈만 나면 학대하는 모습은, 당파고 성향이고를 넘어 신하들 개개인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