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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의 밤 강론 자료[2020년 5월 28일]
이진수 스테파노 신부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hard de Clairvaux), 아가 설교 28에서 발췌
들음에서 오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외적 초라함(약함) 안에서 알아본다.
(아가 설교 28)
사랑은 염려와 함께-아파함을 통해 외적으로 초라해짐을 감행한다.
“예루살렘 아가씨들이여, 나 비록 가뭇하지만 어여쁘답니다, 케다르의 천막처럼 솔로몬의 휘장처럼.”(아가 1,5).
1. 여기서 신부는 자신을 “솔로몬의 휘장처럼 가뭇하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솔로몬 왕의 천막을 두른 휘장을 말합니다. 휘장이 검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매일매일 태양열을 받고 비바람을 견뎌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가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휘장 덕분에 안에 있는 진귀한 물건들이 그 빛을 잃지 않고 보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가 자신의 가뭇함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검은 것을 이해해 달라고 호소하며, 이렇게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그는 사랑 때문에 또 진리의 요구를 들어 주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결국 볼품없이 검게 된 것은, 허약한 자라면 함께 아파하지 않은 이가 없고, 죄에 빠진 자 때문에 애태운 결과입니다(2코린 11,29). 다른 사람의 욕정의 병을 이완시켜 주고 고쳐 주기 위한 자비 때문에 그녀 자신이 그렇게 검게 변한 것입니다. 그들을 빛나고 하얗고 아름다워 돋보이게 해 주려는 걱정으로 인해 그녀는 가뭇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 때문에 스스로 자진하여 우리의 초라함(비참함)을 함께 나누셨다.
2. 만일 한 사람이라도 자진해서 검게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많은 사람을 희게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해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도 보살펴 주는 사랑으로 상처를 받습니다. 성경에도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요한 11,50)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모두를 위해서 “죄 많은 육의 모습”(로마 8,3)으로 검게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백성 모두가 죄로 인해 검게 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 종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구름으로 당신 자신을 감추시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빛이신 분이(지혜 7,26), 육신 안에서 육신을 정화시키시고자 검게 되시고, 인간 가운데 가장 수려하신 분께서(시편 45,3) 암흑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십자가의 치욕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밝은 빛을 되돌려 주시려고 죽음의 창백함에 자신을 내맡기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훨씬 더 좋습니다. 그분은 교회를 아름답고 품위 있는, 흠도 티도 없는 신부로 만드시려고(에페 5,27 참조), 자신은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찾아볼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이사 53,2 참조).
나는 나 자신의 볼품없음(초라함) 안에서 나의 구원자 하느님을 인식한다.
이제 나는 솔로몬의 휘장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솔로몬을 그의 검은 휘장과 함께 포옹합니다. 솔로몬은 검지만 단지 외면만 검습니다. 그의 외면은 검고 피부 역시 검지만, 그의 내면만은 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한껏 화사하게 꾸민 임금의 딸들이 “화려하게 꾸며진 것과 같습니다.”(시편 45,14 참조). 그 안은 하느님의 광채로 빛나고, 성덕으로 장식되었으며, 은총의 광채가 반짝이고, 무죄의 순결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허약함의 매력 없는 검은 색깔로 덮여 있으며, 그의 얼굴은 가려졌고 멸시만 당했습니다(이사 53,3 참조). 죄만 빼놓고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비슷해지려고 그렇게 하셨습니다(히브 4,15 참조). 나는 그분의 가뭇해진 모습을 알아보았습니다. 나는 죄 많은 우리 원조들의 가죽 옷, 짐승 가죽으로 만든 옷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진해서 스스로를 검게 만드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똑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나는 죄를 뜻하는 염소 가죽 옷 밑에 보이는 무죄의 깨끗한 손을, 악한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어깨를 당신에게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습니다(1베드 2,22 참조).
당신은 본성이 선하시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어”(마태 11,29), 매력적인 얼굴, 매혹적인 정신과 거기에 더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하느님께서 기쁨의 기름을 당신 동료들에 앞서 당신에게 부어 주셨습니다.”(시편 45,8). 왜 당신은 지금 그렇게 거칠게 털이 난 에사오처럼 되셨습니까? 주름투성이, 흉하게 된 얼굴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이 털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것은 나의 것입니다: 털이 숭숭 난 손들은 죄인과 닮았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는 그 털이 나의 것임을 다시 알게 되었고, 나의 살 속에서 하느님, 나의 구원자를 바라봅니다(욥 19,26 참조).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시려고 나와 똑같이 되셨다.
3. 그렇지만 그에게 옷을 입힌 것은 레베카가 아니라 마리아이십니다. 그분의 어머니가 거룩할수록 그는 축복 받기에 더 합당합니다. 좋습니다, 그분이 나의 몸과 같은 처지에서 아버지 앞에 나아가셨음은.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위해서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청하셨고, 나를 위해서 상속권을 청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들었습니다: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 2,8). “너의 재산”이란 “너에게 그것을 소유로 주리라.”는 뜻입니다. 그에게 이미 속한 것인데, 왜 다시 그에게 준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것을 청하라고 권합니까? 아니면, 어떻게 그것이 그분의 것입니까, 만일 그가 당신에게 그것을 청해야만 한다면? 그분은 나를 위해서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중재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나와 같은 모습을 취하셨고, 나와 똑같이 되셨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습니다.”(이사 53,3). 사도 역시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7).
그렇기 때문에 말소리는 야곱의 소리인데, 손은 에사오의 손이었습니다(창세 27,22). 그분에게서 듣는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그분에게서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고(요한 6,23), 그분의 모습은 죽어야 할 운명과 죽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과는 약간 다른 것을 봅니다. 우리의 오관은 검은 것을 알려 주지만, 믿음은 희고 아름다운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검게 보입니다, 그러나 단지 어리석은 자의 눈에만 그러합니다.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가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뭇하지만 어여쁩니다(아가 1,5): 헤로데의 생각에 그는 검지만, 십자가 오른쪽에 못 박힌 죄수의 고백과 백인대장의 믿음에 따르면 아름답습니다.
믿음은 망가진 흉한 외적 모습을 꿰뚫어 내면의 아름다움을 본다.
4.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한 사람의 눈에는 그분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겠습니까? 어떤 점에 그가 주의를 기울였었는지 한 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가 눈에 보이는 외적 모습만을 보았다면, 어떻게 그를 하느님의 아드님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며, 그를 아름답게 보았겠습니까? 그분은 구경꾼들의 눈에는 흉측한 몰골에 검게만 보이고, 죄수들 사이에서는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조소의 대상이었고, 믿는 이들에게는 눈물 쏟는 연극이었지 않았습니까? 하필이면 그분을, 놀라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유일하게 영광만을 받으셔야 될 분을 조롱하다니. 어떻게 백인대장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에게서 아름다움을 보고, 죄인들 사이에 끼어 죽어가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았을까요?(이사 53,10 참조).
우리는 이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전혀 대답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이 질문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이에 대해 대단히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성경에서 읽은 바와 같이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은 그분께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두시는 광경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소리를 통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고,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쩌면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라고 말씀하신 그 양 무리에 이미 속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불신이 불순종에서 오듯, 믿음은 들음과 순종에서 온다.
5. 청각은 얼굴에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들음으로 찾아냅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 모습은 눈을 속일 수 있지만, 진리는 귀를 통해서 마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눈은 다만 허약한 외모, 흉한 몰골, 비참한 인간, 수치스런 죽음의 판결을 받은 사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귀는 하느님의 아들을, 아름다우신 분을 알아봅니다. 이 백인대장은 약함으로 드러난 모든 표시들을 보고서도, 죽어가는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영광의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제공되는 어떤 것도 경멸하지 않습니다. 그는 눈에 제공되지 않은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고, 들은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로마 10,17). 눈을 통해 진리가 우리 영혼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잘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 영혼이여, 그것은 우리가 후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될 때를 위해 유보되어 있습니다. 병이 감염된 곳에 먼저 치료제가 투입되어야 하듯, 생명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로, 빛은 암흑의 흔적에로, 진리의 해독제는 뱀의 독이 있는 곳에로 투입되어야 합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흐려진 눈이 치유되고, 흐려져서 보지 못했던 그분을 다시 볼 수 있게 됩니다.
귀는 죽음이 맨 처음 들어온 문입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귀는 제일 먼저 생명을 위해 열려야 합니다. 들음이 우리의 시력을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이 시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인식(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들음은 우리에게 청구권을 허락하는데, 볼 수 있게 됨이 우리가 그 청구권으로 받는 보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자는 말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시편 51,10). 즉 복된 직관은, 믿는 들음의 보상이며, 믿는 들음은 그 청구권으로 볼 수 있음(직관)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하느님을 바라보게 될 눈은, 믿음을 통해서 깨끗하게 정화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에 적합한 말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셨다.”(사도 15,9).
들음과 순종은 봄(직관)을 위한 필요불가결의 예비교육이다
6. 시력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동안에는 청각을 훈련시켜서 그 청력을 연습해야 하고, 청력으로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증명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제 말을 듣자마자 저에게 복종했습니다.”(시편 18,45 참조). 볼 수 있기 전에, 내가 순종하는 자로 증명된다면, 나는 봄(직관)을 위해 합당한 자일 것입니다. 만일 내가 주님께 나의 순종을 먼저 선물로 드린다면, 그분께서 분명히 나로 하여금 그분을 뵙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이사 50,5)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는 얼마나 복됩니까! 이에 더하여 당신은 자발적 순종의 모범과 인내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반대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고, 꽁무니를 빼지 않으면 참아 견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모두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습니다.”(마태 10,22). 간절히 청하옵건대 주님께서 나의 귀를 열어 주시기를, 내 마음에 지혜의 말씀이 가득 채워지기를, 내 눈을 깨끗하게 하시어 명쾌하게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그래서 “당신 귀는 내 마음이 준비한 것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시편 10,17) 하고 나도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 역시 그분에게 순종한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너희는 내가 한 말로 이미 깨끗해졌다.”(요한 15,3)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다고 모든 사람이 다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깨끗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합니다.”(루카 11,28). 이런 들음을 요구하시는 이가 바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신명 6,3)고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들음을 실천하는 이는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들음을 굳게 약속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듣고자 하네.”(시편 85,9) 라고 말합니다.
7. 당신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성령께서도 당신 영혼의 진보를 이런 순서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 즉 그분은 당신에게 직관의 기쁨을 주기 전에 먼저 듣는 것을 가르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어라, 딸아, 보고 네 귀를 기울여라.”(시편 45,11). 왜 당신의 눈을 그렇게 피곤하게 만듭니까? 당신의 귀를 기울이십시오! 당신은 꼭 그리스도를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그분을 들으십시오. 그분에 대해서 들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 우리가 보았네.”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광채는 너무도 엄청나서 당신의 그 하찮은 시력으로는 도저히 그분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습니다(시편 139,6 참조). 당신의 청력(聽力)으로는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지만 시력으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라고 아담을 부르실 때, 그는 그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직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들을 수는 있었습니다. 들음은 볼 수 있는 시력을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랑과 주의 깊은 깨어 있음과 충실함으로 시력을 키워 주고 인도해 준다면. 믿음은 하느님께 불충실했던 죄로 인해 흐려졌던 시력을 다시 정화시켜 줄 것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닫혀진 것을 순종이 다시 열어 줄 것입니다. 시편에 “당신의 규정으로 제가 현명하게 되어 거짓된 모든 길을 제가 미워합니다.”(시편 119,104)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규정을 지킨다는 말은, 규정을 거역함으로 인해 잃었던 인식을 회복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늙은 이사악의 예: 모든 감관은 속여도, 청각만은 진리를 알아차린다.
우리는 거룩한 이사악에게서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각이 다른 감각 기관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얼마나 예리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성조는 이미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고, 그의 미각(입맛)도 속일 수 있었고, 손의 촉감도 속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귀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놀랄 일 아닙니까, 그의 귀가 먼저 진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로마 10,17)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그 말씀이 진리 아닙니까?(요한 17,17). 이사악은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창세 27,22)라고 말합니다. 아무 것도 이보다 더 진실일 수 없습니다. “손은 에사우의 손입니다.”(창세 27,22). 아무 것도 이보다 더 틀린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속을 수 있습니다: 손은 혼동할 정도로 매우 비슷합니다. 또한 미각도 그에게 진실을 말해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놀라운, 잘 요리된 음식일지라도.
그는 연한 염소 고기를 먹으면서 그것이 야생 동물의 고기로 요리된 별미로 착각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눈은 진실을 파악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고, 지혜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불행하여라,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이사 5,21)이라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불행하여라”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유용한 지혜가 아닙니까? 이것은 세상의 지혜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8. 복된 욥이 알고 있듯이 선하고 참된 지혜는 “진주보다 더 값있습니다.”(욥 28,18 참조) 당신은 무엇을 자신의 육신의 오감에서 찾습니까? 미각은 입속에 있지만 지혜는 마음속에 있습니다. 육안으로 지혜를 찾지 마십시오. 지혜를 알려 주는 것은 살과 피(마태 16,17)가 아니라,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혜를 입의 미각으로 찾지 마십시오. 그것은 편안하고 안일하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촉감으로도 찾지 마십시오. 성인은 말합니다: “내 마음이 남몰래 유혹을 받아 손으로 입맞춤을 보냈다면, 이 또한 심판받아 마땅한 죄악이니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배신하는 일이기 때문일세.”(욥 31,27-28). 이런 경우는 사람들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총, 즉 지혜를 하느님께 돌려드리지 않고 그 성공을 자신의 노력의 대가로 돌려 버릴 때입니다. 이사악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감관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말을 듣는 청각만이 진리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예: 경험도 속일 수 있다; 그녀는 믿음에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여전히 인간적으로만 느끼는 막달레나에게는 부활하시어 다시 살아나신 말씀이신 육신에 손을 대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녀는 계시보다는 눈에 더 신뢰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의 오감에 더 의존하려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죽은 자로 보았고, 그토록 부활에 대해서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부활을 믿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눈은 만족할 정도로 충족되지 않고는 쉬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믿음 또한 그녀에게 위로가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과 육신의 눈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하느님이 하신 말씀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마태 5,18; 24,35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분을 눈으로 직접 뵙고서야 울음을 그쳤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으려하지 않았고, 믿음보다 자신의 체험에 더 의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체험 역시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9. 결국 그녀는 믿음 안에서의 인식에만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권고를 받습니다. 이 인식(깨달음)은 오감이 알지 못하고 체험이 찾아내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믿을 수 없는 오감에 의존하는 것을 그만두고, 말씀에 신뢰하고 믿음에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거짓을 모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고 오감에 매이는 그런 결핍을 모릅니다. 믿음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성을 넘어, 본성상 통상적인 경험의 한계를 초월합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의 눈은 자신의 포용력을 훨씬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보려고 합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의 손은 자신의 촉감을 훨씬 초월하는 것을 만지려고 합니까? 그것들이 전해 줄 수 있는 정보는 너무도 적습니다. 그와는 달리 믿음은 그것들로 인해 나 자신의 숭고함의 크기가 조금도 감소되거나 좁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믿음이 당신에게 알려 주는 것이 더 정확하고, 더 안전하기 때문에 그것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배우십시오.
우리는 제일 먼저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마음으로만 그리스도께 접촉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 이 말은 그분이 하늘로 올라간 다음에야 당신을 붙들 수 있고 또 붙들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녀는 실제로 그분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녀의 손이 아니라 사랑으로, 눈이 아니라 갈망으로, 오감이 아니라 믿음으로 붙들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너는 아직도 너의 육신의 오감으로 부활의 영광 속에 있는 나를 붙들려고 하느냐? 내가 아직 죽어가는 육신으로 살아 있을 때, 제자들의 눈은 머지않아 사형에 처해질 내 몸의 변용의 광채마저 견디어내지 못했던 것을 너는 모르고 있느냐?(마태 17,6 참조). 아직 나는 네게 익숙한, 네가 알고 있는 종의 모습으로 나를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나의 영광은 너에게 신비롭고 너무 높아 네가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시편 139,6). 그러니 일단 너의 판단을 접어라. 너의 의견을 거두어라. 이토록 중요한 일을 오감에 맡기지 말고 오히려 믿음 안에 간직하여라. 믿음은 더욱 합당하고, 믿을 만한 설명을 너에게 해 줄 것이다. 믿음은 그것을 더욱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음은 그 깊은 신비의 품속에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포용하고 있다(에페 3,18 참조). 믿음은 어떤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떤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1코린 2,9) 그 안에 지니고 있고, 보호하며 동시에 힘 있게 묶어서 자신 안에 굳게 닫아 보관하고 있다.
10. 그리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는 비천한 자의 차림이 아니라 천상 옷을 입고, 아버지와 함께 옥좌에 앉아 있는 나를 포옹하게 될 것이고, 같은 육신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지닌 나를 만지게 될 것이다. 너는 내가 아직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갖추지 않았는데, 무엇을 붙들려고 하느냐? 기다려라, 네가 나를 새로운 모습으로 만질 수 있게 될 때까지. 아직 덜 아름다운 것이 미래에는 완전히 아름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는 만질 만하고 볼 만한 아름다움이 없다. 오감에 더 의지하고 있는 아름답지 못한 너를 위해 아름답지 않다. 네가 믿음보다 감각에 더 매달리고 있는데, 그런 아름다움을 이제 내게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름다워져라, 그러면 너는 나를 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믿음 안에 살아라. 그러면 너는 아름답다. 네가 아름다우면, 너는 아름다운 이에게 손을 대기에 합당하고, 더욱더 행복해질 것이다. 너는 믿음의 손으로 나를 만지고, 그리움의 손가락으로 나를 만지고, 봉헌의 포옹으로, 네 마음의 눈으로 나를 만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때에도 가뭇할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너의 연인(戀人)은 눈부시게 하얗고 붉다(아가 5,10). “화려한 의복을 입고 위세 당당하게 걸어오시는 이 분은 아름답다.”(이사 63,1 참조). 왜 하필이면 너는 나를 종의 모습으로 볼품없이 되었을 때, 이 비천한 옷차림을 하고 있을 때 붙들려고 하느냐? 그보다는 멋지게 천상의 옷을 차려입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고(시편 8,6), 권능으로 위엄을 떨치고, 온유와 자비와 기쁨으로 충만할 때 붙들어라.
신부는 볼품없는 외적 껍질을 초월하여, 감추인 내적 아름다움을 꿰뚫어 본다.
11. 우리는 여기서 신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녀의 현명함과 심오한 말에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 그녀는 솔로몬의 휘장, 즉 육신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죽음 안에서 생명을, 불명예 속에서 영광과 존귀함의 절정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검은 옷에서 무죄함의 흰색과 내적 강인함의 광채를 발견합니다. 이렇게 휘장은 그 자체가 검고 볼품없지만, 부유한 임금님의 진귀하고 빛나는 보석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휘장의 가뭇함을 멸시하지 말라는 신부의 말이 맞습니다. 신부는 그 가뭇함 안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이 가뭇함을 무시했습니다. 그 안에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1코린 2,8). 헤로데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래서 그분을 업신여겼습니다. 유다인의 회당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고통과 약함에서 오는 가뭇함을 비난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그와는 달리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죄수는 그분을 알아봅니다. 십자가에 달려계실 망정 그분의 무죄함과 성실함을 증거했고, 장엄하게 영광과 왕다운 통치권을 그분께 고백합니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카 23,41-42)라고 그는 간청합니다. 백인대장 역시 그분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았고, 큰 소리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마태 27,54 참조). 그리고 교회가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아름다움을 나누어 받기 위해서 그분의 가뭇함까지도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 또 교회는 사랑하는 분에게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습니다.”(시편 69,10)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교회는 검게 보이고 검다는 말을 듣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솔로몬의 휘장처럼 내면이 아닌 외면만 검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의 솔로몬은, 그 내면만큼은 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부는 말합니다: 나는 솔로몬처럼 가뭇하다고 하지 않고, 솔로몬의 휘장처럼 가뭇하다고 말했습니다. 평화를 가져다주는 사람은 단지 외관만 검기 때문입니다.
죄의 검음은 내면이고, 내면의 죄는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 먼저 내면을 검게 만듭니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힙니다.”(마태 15,19). 그러나 절대로 솔로몬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한테서는 이런 불순한 것들을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은(요한 1,29) 죄가 없어야만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렇게 그분은 죄인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기에 합당한 자 되었고, 비로소 “Salomo 평화” 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