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군 여행] 진천 길상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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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군 여행] 진천 길상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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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祥祠(길상사). 오늘 유랑자는 나당 연합군의 주역,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그 댓가로 북방 영
토 대부분을 포기했던 김유신! 그의 사당이 있는 진천 길상사를 난생 처음으로 찾았다. 때는 바야흐로 만물이 소
생한다는 “봄” 봄꽃이 진자리에 움튼 연초록 신록이 꽃보다 눈부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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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랑자의 발길이 별로 내키지 않았던 곳. 김유신의 사당! 약간의 망설임 끝에 결국은 주차장에 들어서게 되
었다. 망설였던 이유는 수하를 희생시키는 걸 특기로 삼았다는 점과.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외세
인 당의 힘을 빌렸고 그 과정에서 김유신이 군사적으로 활약했던 주역이었다는 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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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소속했던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외세인 당의 힘을 빌렸고 그 과정
에서 김유신이 군사적으로 활약했던 주역이었다는 점,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
치가"라고 비판 받고 있다는 평가,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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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였다는 점. 이를테면 요즘 비열한 방법
은 현시국과도 엇비슷하다는 점, 말 그대로 야비한 냄새가 곳곳에서 난다는 점이 닮았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
다. 조디로는 정의를 부르짖고 공정과 상식을 부르짖으면서 뒤로는 호박씨 까는 정치세계. (이간질 해서 동족의
피를 본 사람들 김유신. 이성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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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정치는 비열하고 야비한 넘들이 하는 것이고 오늘은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볼 생각이지만 그러나 유
랑자의 마음이 어떠한 생각으로 뒤바뀔지는 두고 볼일이다. 먼저 길상사의 입구는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가 길
양쪽으로 도열해 유랑자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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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김유신에 대해 평할 때 수하(관창·반굴, 비령자 父子,등)를 희생시키는 걸 특기로 삼았다는 이미지가 짙게
배어있다는 점 또한 요즘 채상병 사건처럼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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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에서 파란 은행잎은 혈액 순환에 좋아 ‘경증 치매’, ‘중풍’, ‘뇌경색’, ‘뇌졸증’에 좋은 약초로 쓰인다. 또한 동의
보감에 은행은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성이 있으나 폐와 위에 탁한 기를 맑게 하고, 숨찬 것과 기침을 멎게 한
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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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오면 나무밑에 노란 눈이 소복히 쌓이듯 상당한 은행잎 단풍으로 길 가득 메우고도 남을 것 같은 그야말
로 가을 속 낭만어린 길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유랑자가 천천히 오르는 길, 그러나 그 길은 나름의 운치를
다한다, 도당산성이 있는 胎靈山(태령산길상산(453m) 골짜기 자락에 자리 잡은 길상사는 산 위에 김유신의 탯
줄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령산‘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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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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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08:30)인지라 사당 문이 열이지 않았을 것이려니 생각이었지만 벌써 누군가가 부지런한 방문객이 있
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산비탈을 타고 이어지는 사당엔 고목나무들로 채워져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꽃 피고 지
기를 되풀이해 온 흔적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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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벚나무가 꽃을 피웠을 무렵이면 황홀한 벚꽃을 감상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 화려한 벚꽃
이 지고나면 그 뒤를 이어 겹벚꽃이 가득했을 길상사, 그러나 이젠 꽃을 떨군 가지마다 꽃잎대신 초록을 내달았다.
아무튼 꽃더미에 묻힌 길상사가 아름답고 멋스럽다면 신록 속에 자리한 그 모습은 또 다른 운치와 기상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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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북방 영토 대부분을 포기한 것도 오늘날 협소한 영토로 남았다는
점,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 한국인들에겐 뼈저리게 와 닿는 대목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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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유랑자는 잘 정비된 경내를 걸어 외삼문으로 들어가 본다. 제법 가파른 계단이 내삼문까지 이어진다. 얼음
이 얼어붙는 겨울엔 정말 조심해야 할 것같은 가파른 경사도다. 그 경사도에 어떻게 모진 세월을 견뎌내고 살아
남았을까 싶을 정도로 계단 중간엔 왕벚나무가 실팍한 몸피를 내보이며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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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그 곳에 자리하고 있었를 고목은 지난 봄 꽃 피웠던 흔적을 말끔히 털어내고 푸른 나
뭇가지를 활짝 펼치며 유랑자를 맞이한다. 이곳을 지나 내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본전인 흥무전의 당당한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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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祥祠重建事蹟碑(길상사중건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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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당 연합군이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손잡고 3국 통일을 했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떻게 변해 있을
까 하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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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는 현재의 길상사를 재건한 김만희의 공적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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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무전 안에 봉안된 영정 속 김유신의 모습은 생각 보다 당당하고 늠름하다. 유랑자는 뒤돌아서서 멀리 시내를
조망해 본다. 저 멀리 진천 읍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주변을 에워싼 고목의 꽃들과 운치 있는 흙돌담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봄날의 진풍경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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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길상사’란 이름은 각각의 역할이 있지만 전국적으로 많다. 그러나 이곳은 법정스님이 생전에 머물렀던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 절집 吉祥寺(길상사)가 아닌, 진천에 있는 吉祥祠(길상사)는 사찰이 아닌, 바로 신라 김유신
(595~673)의 영정이 봉안된 사당이다. 실제 태령산 정상에 올라가면 장군의 태를 묻은 태실이 있는데, 고려·조선
시대의 태는 많이 남아 있지만 신라 태로는 유일하고 가장 오래된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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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는 1408년 '김유신사(寺)'로 처음 건립된 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소실과 이전 과정을 반복하
다 1926년 삼국시대 석축산성인 도당산성 자락인 현재의 터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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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 吉祥祠(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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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되었든 김유신 하면 삼척동자도 다 알만큼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이자 비열한 인물로도 꼽힌다. 김유신
이 소속했던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알겠지만 김유신은 태
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도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인물로, 신라 역사상 가장 높은 관등인 태대각간에 올랐으
며 사후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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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유신의 무덤이 경주에 있는 것과 달리 이곳에 사당이 있는 건 어떤 인연에서일까. 그 까닭은 바로 진천
이 김유신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때부터 김유신의 태가 묻힌 태령산 아래 사당
을 짓고 조선초기까지는 국가에서 향과 축을 내려 봄과 가을로 국행제를 올리다가 조선 태종 8년부터 관행제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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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4천948㎡ 부지에 김유신 영정을 봉안한 사당과 흥무전, 재실, 내삼문 활터, 협문 등을 갖췄으며 1975년 새롭
게 정비돼 충북도 기념물 1호로 지정됐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속에 폐허가 되었지만 1926년에 재건 후 1959년
에 개축했다. 이후 1975~1976년에 사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전면 신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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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지난 자리에 등나무 꽃이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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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병화를 입어 폐허가 된 걸 여러 차례 재건해 오다 1927년 현 위치에 건물을 짓고
길상사라 했다. 지금의 모습은 1976년 사적지정화사업으로 갖춰진 것으로, 본전인 흥무전에는 월전 장우성 화백
이 그린 김유신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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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가 태어난 동기에 대한 야사를 잠깐 들여다 보자면 역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나
게 된 사연을 벌써 짐작했을 것이다.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의 로맨스는 신분제가 엄격했던 당시 사회
에서 용납받기 어려운 결합이었다. 왜냐하면 김서현은 멸망한 가야의 왕손이었고, 만명부인은 신라 진흥왕의 아
우인 숙흘종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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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삼문 鎭護門(진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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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舞殿(흥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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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도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듯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던 듯, 결국 만명부인이 만노군(지금의 진천군)
태수로 부임하던 김서현을 따라가자 둘의 결혼을 묵인하게 됐고, 그 결과 김유신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것
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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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유랑자는 발길을 돌려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당시 그 교활했던 머리로 나당
연합군이 아닌 다른 방법을 써서 3국을 통일 했더라면 지금쯤 압록강을 넘어 옛 고구려 땅, 아니 지금 중국의 東
北 三省(동북3성,흑룡강, 길림,요녕)은 우리나라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하는 아쉬운 생각으로 가득하다, 물
론 우리 민족의 靈山(영산)인 白頭山(백두산)을 포함해서 말이다. 돌아오는길 역시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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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遇聖(장우성)이 그린 영정(가로 98cm, 세로 187cm) 1976년 11월에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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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세운 ‘(新羅開國公太大角干興武王神聖碑( 신라개국공태대각간흥무대왕신성비 )’ 이선근(李瑄根)이 글을
짓고, 金萬熙(김만희)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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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 여행기 어보기
https://cafe.daum.net/b2345/9toB/2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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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찾아가기
*충북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
(지번) 진천읍 벽암리 산 36
*문의처:043-539-3841
*주차: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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