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월4일 [(백)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수도회] 다가감과 관상으로 싹틔우는 영원의 씨앗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요한 3,7-10
† 복음 요한 1,35-42
◈ 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을 따라 나선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본디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보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곧 기름부음받은 ‘새 다윗’을
기다리던 이들이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소개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당연한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실 때, 그들이
예수님을 ‘라삐’(스승님)라 부르고, 그분의 거처를 물은 것은, 이미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율법 교사들과 같은 권위를 지닌 스승으로 여기고
따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자랑하거나,
그들을 설득하지 않으시고, “와서 보아라.”고만 하십니다. 화려하고
명예로운 라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새로운 빛과 희망을 보았을 것입니다.
시몬에게 ‘케파’, 곧 베드로(반석)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은 그에게
맡겨질 새로운 소명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 동안 영광과 치욕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의 양 떼를 맡기신 것은 이 첫 만남에서
베드로를 “눈여겨보며” 그의 선한 마음을 읽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 안에 ‘하느님의 씨’가 담겨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씨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첫 마음이고,
열정이며, 때로는 좌절과 죄악을 치유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씨입니다. 내 안에 뿌려진 그 씨앗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도 하고, 악마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해답은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2018년 나해 1월4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제1독서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7-10
복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2
성지를 찾아오신 분들이 종종 불편한 사항들을 제게 말씀해주십니다.
“신부님, 화장실이 너무 좁아요. 성당이 너무 더워요. 공기가 탁해요.
성물방이 너무 좁습니다. 길이 미끄럽습니다. 등등....”
고칠 수 있는 부분들은 개선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도 많지요.
더군다나 제가 있는 성지의 재정 상태가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 것에는 “죄송합니다.”라고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제가 갑곶성지에 처음 시작할 때에는
불평불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약한 상태였거든요. 너무 추운
겨울이지만 난방이 없어서 벌벌 떨면서 미사를 해야만 했고, 동파되어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을 때도 많았습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땀으로 목욕을 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미사 할 장소가 없어서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음에도 야외에서 비를 맞으며 미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순례객이 많이 와도 화장실이 여자 4칸, 남자 1칸이 전부였기
때문에 늘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을 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평불만을 듣기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열약했던 당시를 이야기하시면서 “신부님, 그때가 더
좋았어요.”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불평불만이 더 많아야 하는데 오히려
“좋았다.”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힘들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으시는 것이고, 당시에는 열약한 모습에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용의 마음이 있으니
불평불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지요.
주님의 제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오늘 복음에도 등장하지만, 제자들은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분과 함께 묵고는 따라
나서지요. 예수님을 불평불만이 가득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따를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신
긍정적인 수용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네딕토 성인도 불평을 매우 엄격하게 대하셨다고 합니다. 불평은
성공하는 삶에 꼭 필요한 2가지 요소인 ‘감사와 기쁨’을 가로막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불평을 하시는 분에게
감사의 말과 기쁜 표정을 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을
가질 때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얼굴에 표시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면서 당신을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세상과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긍정적인 수용의 마음 자체가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불만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해답은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난 매번 틀렸다. 지금껏 살아오며 나 자신, 타인, 사회, 문화, 세계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잘못 생각했다. 나이가 들고 경험을 쌓는 과정에서
틀린 점을 조금씩 덜어 매일매일 덜 틀린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게 내
삶이 개선된 이유다(마크 맨슨).
하느님의 어린양.
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내 자신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지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존재를 알고 있고 기억해 주는 주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혼자 있을 때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아끼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스스로를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이제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나’를 아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행복합니까? 만약 ‘나’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도 별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우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조금만 노력하면 분명히 ‘나’를 아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거창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 사람은 그 행복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람은 아주 작은
것들에서도 큰 행복을 얻습니다. 그 행복을 찾고 또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은 먼저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귀도 레니의 성 베드로.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다가감과 관상으로 싹틔우는 영원의 씨앗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8년 나해 1월4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요한 1,35-42
“와서 보아라.”(요한 1,39)
다가감과 관상으로 싹틔우는 영원의 씨앗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인 안드레아와 또 다른 제자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하는 스승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들은 스승 요한의 말을 듣고 관심을 보이며 조심스레 따라간 것입니다.
그들은 수동적 자세를 보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먼저 다가오시어
“무얼 찾느냐?”(1,38) 하고 물으십니다.
구세주 예수께서는 능동적으로 찾아오시어 말을 건네며 관계를
맺어주십니다. 이런 움직임은 단순한 친분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 관계는 성사적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이 관계맺음으로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이기심과 탐욕을 지닌 인간이 사랑을 만난 때문입니다.
“무얼 찾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겉치레 관심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갈망이 무엇인지를 물으신 것이지요.
그들이 품고 있는 씨앗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며 진정
구세주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를 확인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십니다(1,38-39).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가치와 생명을 만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라’ 하신 것은 단순한 방문 권유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와 자비를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을 세상이
아닌 하느님께 두라는 결단의 촉구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고통과 시련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곳, 공권력에 의해
짓밟혀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이들의 가슴,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는
곳, 국민의 인간다운 삶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당리당략만 앞세우는
한심한 정치 현장에 그분께서 계십니다.
국민이 주인임을 망각한 채 저질러진 뿌리 깊은 적폐의 온상, 국가나
민족 간의 분쟁의 현장, 폭력과 불의가 저질러지는 곳,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와 자본가들의 끝없는 탐욕이 저질러지는 곳 바로 이런 곳들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곳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라고 하시며 ‘보라’ 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소박한
거처를 보라는 것일까요? ‘보라’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자리’를 보라는
것이고 당신과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당신 자신을
보라는 것이지요. 이 초대는 관상으로의 초대인 셈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씨앗을 품은 사람들입니다(1요한 3,9). 이 씨앗을
싹틔우도록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신 주님께 다가가 그분과 함께하며
그분을 관상해야겠습니다. 오늘도 수난 받으시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을
찾아가 사랑을 나누고 불의와 악에 맞섬으로써 주님의 씨앗을 잘
키워가야겠습니다.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지요(1요한 3,10)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원] 마음을 준다는 것|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1월4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요한 1,35-42
마음을 준다는 것
전에 한 자매가 저를 좋아한다는 표를 하기에 저는 그러면 저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자매는 저에게 ‘마음’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사랑하면 육체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여자가 ‘마음’을 준다는 것은 ‘모든
것’을 준다는 말이에요.”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아 정말 주는 것인지, 혹은 주는 척만 하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나 노력, 모든
행위 등을 함께 주지 않는다면 마음을 주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단 몇 분도 행동으로 상대를 위해 사랑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마음을 주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을 준다는 말은
곧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동시에 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도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물로써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가진 전부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느님이 아닌 사람으로서 성령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물을 통한 회개의 세례밖에는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주신다는 말은 동시에 그 분의
신성-인성, 모든 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마음을 준다고 했을 때 자신의 육체까지도 포함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주신다고 하셨을 때는 그 분의 몸까지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하느님이셨고 영이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로부터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이 영과 육은 이제 서로 ‘갈라질 수 없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셔서도 영혼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그 육체도 함께
부활하신 것이고, 그 육체는 십자가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을
때의 바로 그 육체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성체성사도 하나의 밀떡과 포도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라
피로도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물이란 신성을 상징하고 피는 인성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 진짜 인간의 육체를 지니고
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영지주의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물로써만 오신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육체, 즉 피로써도 오셨다고
증언하는 것이고, 이 영적인 측면과 육적인 측면의 결합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거짓말쟁이요 적그리스도라 칭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께서 몸을 주신다는 것은 그와 함께 결합되어
있는 영, 신성, 성령님을 함께 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분의
육체, 즉 몸을 먹지 않으면 그 분의 신성에 참여하지 못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하는 사랑의
행위, 즉 선물을 주거나 하는 등의 모든 사랑의 표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동시에 그 사람의 사랑의 마음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아먹으라고 하셨던 육체를 믿고 받지 않는다면 동시에
주시는 그 분의 신성 또한 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둘은 더
이상 갈라놓을 수 없게 일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물만이 아니라 피로써 세상에 오셨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은 신성이고 피는 인성입니다. 이 신성과 인성은
성령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
성체를 모셔야 성령님이 오십니다. 사제의 사죄경을 받아야 죄가
용서됩니다.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기름 바름을 거부하지 말아야 성령의 인호가 새겨집니다.
이 모든 상징적이고 물질적인 행위들이 보이지 않는 은총이 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언어, 즉 물질을 당신과 하나가 되게 결합시키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새해를 지내면서 덕담을 하게 됩니다. 올해는 개의 해이기 때문에 이런
덕담을 들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모두 버리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으니 바르게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부색, 성별, 혈연, 학력, 계층, 신분, 신념,
종교, 지역”이라는 색안경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명동에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식당이 있습니다.
요리하는 분들의 정성을 볼 수 있었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청결하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식당입니다. 마치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감출 것이 없다면,
자신이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세요.’
모든 혼란은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명동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습니다. 주일이면 볼
수 있습니다. 매 미사가 끝날 무렵이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다음
미사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 성탄 미사에는 30분전부터
기다려야만 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추운 겨울임에도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게 한 것일까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진리에 목이 마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또 있습니다. 2009년 2월 16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던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을
때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서 명동 성당 주위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고 조문하기
위해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자원 봉사자들이 따뜻한 차를
마련하였고, 추운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하였습니다.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시오.”
요한 복음사가는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진실은 드러나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거짓은
감추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삶이 ‘와서 보시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실과 함께 살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와서 보아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1월4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요한1,35-42)
와서 보아라.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3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 치며 상대를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는 것이 요한의 진심입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을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 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나의 삶이 이러니 너희도 내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아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났으면 전해야 합니다. 먼저 나를
예수님께 인도해 준 이에게 감사를 드려야 하고 또한 나도 누군가를
주님께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이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필리피2,15)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우리의 삶이 주님을 증거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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