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불가능 하겠습니까?
남태평양 사모아제도의 주교가 예루살렘에 머무를 때였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를 궁지로 몰아 넣으려 했습니다. "주교님, 이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뀐다는 말입니까?" 주교가 대답하였습니다."우리는 미소한 생명체로 시작되고 자라서 어른이 되었지요. 그동안 먹은 빵과 포도주가 우리 몸인 살과 피로 변한 것이지요. 사람이 이렇거늘 하물며 하느님이 못하시겠습니까?"
그들이 빈정대며 다시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밀빵 안에 어떻게 예수님이 계실 수 있습니까?" 주교는 눈 앞에 펼쳐진 예루살렘과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머리 위의 하늘과 눈 앞의 땅은 얼마나 광대합니까? 그에 비해 우리 눈은 얼마나 작습니까? 우리 눈은 이렇게 작지만 하늘과 땅의 풍경을 전부 담아 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조그만 성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어찌 불가능 하겠습니까?"
30년 4월, 최후 만찬에서 남기신 예수님의 유언을 이어받아 카톨릭은 2000년 동안 성체성사를 거행해오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카톨릭 전례의 핵심이며 모든 은총의 샘이요, 교회의 심장이며 교리의 요약입니다.
실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체로 부터 해답을 얻습니다. 곧 성체성사를 제대로 안다면 계명의 본질을 알고 있는 셈 입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우리의 욕심 앞에 인간을 먼저 사랑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성체로 오셨습니다. 언제나 자기 것을 챙기기에 급급한 우리의 탐욕 앞에 당신의 살과 피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한 몸 호의호식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착각 앞에 참행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매 주일 한없이 가볍게 다가오는 성체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이토록 심오하고도 깊습니다. 성체성사는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삶의 완성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완성을 향한 시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미사 때 마다 그분의 현존을 실제로 받아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를 수십 년 모셔왔어도 성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예수님은 그안에 머물러 계실 수 없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시게 될 그날까지 성체의 신비가 알려주는 바를 삶 속에 재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요한 6, 54) 그러기에 네리(P.Neri) 성인은 성체를 일컬어 '구원으로 이끄는 보약' 이라고 했던 모양 입니다.
첫댓글 아멘.
하느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