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芭蕉) 숲으로 가다 / 유종인
1.
파초 숲에 가니
지난밤 비바람에 꺾인 파초 잎이 배를 깔았다
나는 먹물을 대령하고
쥐수염붓을 바랑에서 꺼냈다
어머니 당신 이름을 써 보니
빗방울이 모여 파초 잎맥을 따라 눈물처럼 구른다
파초에 새로 오신 당신,
오늘 생신이라고 나는 축 자를 밥상처럼 납작하게 쓴다
어머니 앞에서 고민은 장난 같다
초록 옷에 검게 머리를 물들이고 오신 어머니,
그 말씀 그 눈빛이 슬프고 수려하니
이게 살아 있는 신령인가
2.
나보다 앞서간 숨탄것들 이름을 써 보듯
아, 이 붓을 남기려 수염을 보탠 쥐들의 이름도
생쥐부터 시궁쥐까지 바람 냄새 가득한 들쥐도 함께
떡잎 같은 쥐의 귀까지 그리듯 써 본다
그대를 떠올릴 때는
그 눈을 바로 그릴 수 없어 눈썹을
버들눈썹의 고요한 그늘을 가만히 흘려 본다
그러면 그대 눈이 고요히 나를 눈부처로 담으리
곁을 따라온 개가 내 파초 잎 낙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어렴풋한 전생을 떠올리듯 심각하게 또 물끄러미 바라보니
나는 오동잎 지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 라고 쓰고
개의 왼발을 먹물에 담가 낙관(落款)하니
개는 어리둥절한다
가끔 물초가 된 가마우지 소리를 흘려 쓰면
파초 잎에 물비린내가 번진다
어느 날 산기슭에서 데려온 돌의 이마를 쓰니
파초에 그늘이 드리우는 듯
그러나 먼 우레 소리로 돌의 등짝을 밀어내니 가뿐하다
그래도 뭔가 섭섭한가
사랑을 다 짓지 못한 저 섬 같은 돌은
부처님 머리 육계(肉髻) 같아서 이를 어쩐다
3.
다시 물어보고 싶은 사람들
다시 캐 보고 싶은 비밀들
마음은 다 살고도 남고 다 지나오고도 남는 파도 소리 같은 거
파초 잎에 아직 들키지 않은 소낙비 소리가 잔귀 먹어 남은 거
그런 미련 같은 거 가만히 받자 하는 파초 잎
쥐수염붓이 망설이는 것
그건 종지부를 찍을 수 없는 설렘 같은 것
전생으로부터 흘러온 당신이란 끌림 같은 거
포개듯 파초 잎에 쓰고 써 보니 까만 점이 되는 것.
그것이 당신 눈동자라는 걸 아는 것.
그러나 파초 잎에 듣는 비꽃들
나보다 먼저 물초가 되는 글자들
검은 눈물로 파초 잎을 떠나는 이여
파초 잎은 아마도 샛강에 가려는가
옴두꺼비 두 마리 싣고 신행길 보내 주러 가고 싶은가
여우비보다 먼저 쥐수염붓을 걷고
나는 파초 우산을 쓰고 강으로 왼 어깨가 젖어 가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