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563) - 영화, ‘노무현입니다’와 ‘박열’을 보고
간헐적으로 퍼붓는 장맛비와 폭염이 지속되는 한 주간을 독서와 운동, 영화감상 등으로 잘 견뎌낸다. 이번 주 최근에 개봉된 영화, ‘노무현입니다’와 ‘박열’을 감상하였다. 밖은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 쾌적한 공간에서 시원하게 휴식할 수 있어 다행인데 내용도 흥미롭고 감동적이어서 금상첨화다. 감상후기를 덧붙인다.
1. 노무현입니다
영화, ‘노무현입니다’는 엄혹한 시대를 함께 겪은 동년배 정치인의 치열한 삶을 리얼하게 재현한 기록영화다. 지지율 바닥권의 노무현 후보가 2002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는 과정을 뼈대로 숱한 역경과 좌절을 극복하고 대통령에 당선된 그의 성공과 실패, 강점과 약점을 실감나게 담아낸 수작이라 여겨진다.
대통령 선거당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그를 적극 지지하였으나 당선 후 몇 차례 기대 밖의 잘못을 목격하며 크게 실망하였던 터, 성공하는 대통령에서 벗어난 행보가 못내 안타까웠다. 특별히 그가 집권여당인 민주당을 쪼개 열린 우리당을 창당하는 모습에서 4.19 후 압도적인 지지로 정권을 잡은 민주당이 신구파로 갈라 서 5.16쿠데타의 빌미를 준 전철을 밟는 것에서 현실 정치의 한계를 느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탄핵소추를 받았고 그 후 그의 정치반경은 크게 축소되었다. 결국 그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폐족의 굴레를 뒤집어썼고 그는 10년 보수 집권세력의 무지와 횡포로 이어지는 암울한 단초를 제공하였다.
노무현은 정치인으로서보다 인간으로서 더 매력적인 캐릭터를 지녔던 셈, 열렬지지그룹인 노사모를 비롯하여 수많은 민초들이 비명으로 마감한 그의 우직하고 순수한 열정과 결기를 못내 아쉬워하고 지금도 추모한다. 2009년 5월, 63세의 나이로 고향의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진 그의 장렬한 최후는 희열과 아픔을 함께 겪은 우리 모두에게 삶과 죽음 앞에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일깨는 커다란 교훈을 안겨줬다.
영화의 가장 극적인 부분은 광주에서 치른 경선에서 전 국민의 예상을 깨고 1위를 차지하여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장면, 광주 극장가의 본산인 광주극장을 가득매운 800여 관객들과 함께 그때의 열띤 분위기를 호흡할 수 있어 뜻깊다. 상영에 앞서 가진 토론회에서 영화의 배역으로 출연한 당시의 비서관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행적도 미처 알지 못한 인간 노무현의 면모를 일깨는 기회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2012년 4월 말경 한일 걷기동호인들과 전국을 일주할 때 진영에 있는 그의 생가와 고향마을, 그가 공부하던 정토원과 몸을 던진 부엉이바위 등을 돌아보고 묘역에 헌화한 후 사저에서 부인 권양숙 여사와 다과를 나누며 담소하던 일이 그의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추억이다.
*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은 국내외에 난마처럼 엉킨 실타래를 풀어줄 경세가, 영화처럼 미미한 지지율에서 들불같이 번진 함성으로 질풍노도의 변혁을 재현하여 한반도에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을 걷어낼 현자가 그립다.
2. 박열
영화, ‘박열’은 아내가 먼저 보고 강력 추천하였다. 아내가 서정물이 아닌 실명영화를 상찬하기는 드문 일, 기대를 안고 극장을 찾았다. 젊었을 때 무정부주의자로 그 이름을 들었던 박열의 구체적 행적을 알지 못하던 차, 더구나 그의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전혀 뜻밖의 내용이다. 영화를 보고난 소감, 적지 않은 대사가 일본어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제대로 익혀 연기하는 배우들의 재능과 열정이 놀랍다. 마지막 화면을 통해 박열이 22년간의 투옥생활 후 석방되어 이봉창 등 독립 운동가들의 유해송환에 힘썼던 일, 6.25 후 납북되어 평양의 열사 능에 묻힌 사실, 그가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것,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가 묻혀 있고 그의 기념관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나중의 신문보도를 통해 영화의 뒷이야기를 접하게 된 것도 가외의 소득이다. 그 내용을 덧붙인다.
1) 박열의 동지, 가네코 후미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뛰어든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의 삶을 그린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 관객 200만 돌파를 앞둔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인물로 주인공 박열(이제훈)보다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역시 실존인물인 가네코(1903~1926)는 박열의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두 사람은 도쿄에서 만나 동거했고, 아나키스트로서 일본 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반역하는 모임 불령사를 함께 조직했다. 박열이 천황가에 폭탄 투척 혐의로 체포됐을 때 가네코도 함께 붙잡혔다. 가네코는 재판 중에 일곱 차례 전향을 요구받지만, 끝까지 박열과 뜻을 같이하며 사형을 선고받았다. 어쩌다 일본인이 목숨을 걸면서까지 조선을 위해 자국의 체제를 부정했을까. 영화가 설명하지 않은 뒷이야기를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가 쓴 ‘가네코 후미코’(산처럼)에서 찾아본다.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이준익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참고한 책이기도 하다. 야마다 쇼지는 가네코가 옥중에서 남긴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과 재판 기록, 당대의 신문, 잡지 등을 그러모아 가네코의 삶을 재구성했다.
가네코는 천황제를 신봉하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와 하층 계급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가네코가 태어난 뒤 어머니를 버리고 어머니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가네코는 자연스레 호적이 없는 무적자가 됐다. 차별과 학대의 세월을 보내던 그는 부모에게 버려져 9세 때 친할머니가 있는 조선으로 향한다. 7년간의 조선 체험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인을 수탈해 부를 쌓은 할머니는 대단한 권위주의자로 가네코를 멸시했다. 때리고 밥을 굶겼는데, 동네 조선인 아낙네가 불쌍히 여겨 밥을 주려던 적도 있었다. 가네코는 피지배계급인 조선인에게 더욱 심정적 동의가 일었다고 책은 전한다. 무엇보다 1919년 3·1운동을 두 눈으로 보고 나서 그 저항정신에 매료됐다. 일본에 돌아와서도 수난은 계속됐다.
가네코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시종일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나는 자아라는 것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나온 모든 날들에 감사한다. 만약 내가 부족함이 없게 자랐다면, 내가 그렇게도 혐오하고 경멸해 마지않는 그 사람들의 사상과 성격과 생활을 그대로 수용했을 테고 결국에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네코의 옥중 수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신념이 투철했고, 이를 지켜나갔는지 알 수 있다. '산다는 것은 단지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행위가 비록 육체의 파멸(사형)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다. 긍정이다.'
사형 판결을 받았던 가네코는 무기 징역으로 감형된 후 석 달 만에 옥중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 셋이었다.(중앙일보 2017. 7. 11, 박열의 동지 가네코 ‘산다는 건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것’에서 발췌)
2) 재일동포 2,3세 일본인 역 열연
지난 6월 말 개봉한 영화 ‘박열’(이준익 감독)에는 내가 주목하는 배우가 나온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에도 나온 김인우 씨다. 그가 내 눈에 들어온 건 일단 일본어가 완벽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가 잇따라 개봉되고 있지만 항상 아쉽게 느끼는 점이 일본인 역 배우들의 일본어다. 영화의 다른 부분이 아무리 좋아도 배우의 일본어가 어색하면 영화에 몰두하기 힘들다. 영화를 보면서 일본어가 완벽하고 연기도 잘하는 김 씨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그는 ‘자이니치’였다. 자이니치는 재일(在日)의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에서 자이니치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인이나 그 자손들을 가리킨다. 김 씨는 자신을 ‘재일동포 3세’로 소개한다.
김 씨 같은 재일동포 3세들은 한국에서 유학을 하든 민족학교에 다니든 따로 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한 한국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를 못하는 자이니치 대부분이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인데 왜 우리말을 못하느냐'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일본에서 차별 대우를 받고, 조국이라 생각했던 한국에서도 무시당하면 정말 속상할 것 같다.
그는 한국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2008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어학당부터 등록한 그는 한국 사람인데 한국어를 못하는 게 억울해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한국어 공부만 했다고 한다. 엄청난 노력 끝에 ‘암살’ ‘아가씨’ ‘덕혜옹주’ 등 20여 편의 영화에 일본인 역으로 출연했고 무대인사도 유창한 한국어로 할 정도가 됐다.
‘박열’에는 김 씨 외에도 일본어 네이티브 배우가 10여 명 출연한 덕분에 몰입감이 더욱 높아졌다. 이들 대부분이 도쿄의 극단 ‘신주쿠양산박(新宿梁山泊)’ 멤버다. 영화에서 박열에게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장을 연기한 김수진 씨가 극단 대표다. 그 또한 자이니치이며 유명한 무대 연출가다. 김 대표도 박열이 법정에서 조선인 학살에 대해 호소하는 장면에서 복잡한 내면 연기를 보여 줬다.
얼마 전 만난 이준익 감독은 '그런 표정이 나온 건 김 대표가 재일동포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한국 영화 팬으로서 ‘자이니치’라는 일본어 네이티브 배우들의 활약 덕분에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게 무척 기쁘다. 한국 영화 출연이 그들로서도 보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들의 활약을 계기로 자이니치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과 이해가 더욱 깊어지길 기대한다.(중앙일보 2017. 7.15, 나리카와 아야의 서울 산책, ‘자이니치 배우들 일본인 역 열연, 일제 강점기 영화 실감 나네’에서 발췌)
첫댓글 박열 ,저는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영화내용과 배우에 대한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샘, 저랑 같이 보실래요?
^^좋은정보 올려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