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등본을 번역해 보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는 호적이나 주민등록이라는 문서가 없다. 한국, 북한 그리고 일본에만 그런 종류의 문서가 있는데, 모든 국민에게 주민등록 번호를 부여하고 주민등록증에 지문을 찍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한다.
그럼 이런 문서가 없는 미국에서는 출생 일자나 가족관계를 어떻게 증명할까?
운전면허증이나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출생 일자를 증명하려면 태어난 병원에서 발급하는 출생 증명서를 제출하면 된다. 거기에 태어난 날짜와 시간 그리고 부모의 성명 등이 기록되니까.
미국에서 부부임을 증명하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미국 내에서 결혼한 부부는 결혼식을 거행하고 그 사실을 등록한 시청에서 발행하는 혼인등록서가 증명서로 사용될 수 있다.
외국에서 결혼한 부부는 해당 국가에서 발행하는 혼인관계 문서를 제출하면 되는데, 한국에서 결혼한 부부는 호적등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하면 된다. 물론 원본에 더하여 번역문을 첨부하여야 한다. 오래된 문서일수록 신빙성이 높다고 여긴다는데 아마도 오래된 것이 위조나 변조가 어렵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에서도 지금은 호적등본이라는 문서가 없어지고 가족관계증명서로 대체되었다고 들었는데 미국에 온 지 35년이 훌쩍 지난 나는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한자투성이에다가 가족 이름이 서열에 따라 나열되어 있고, 맨 뒷장에는 고무인으로 찍힌 읍장, 구청장 등의 책임자 이름, 빨간색으로 찍힌 직인 그리고 인지가 몇 장 붙어있어서 좀 구식으로 보이는 그런 문서는 없어졌을 것만 같다.
주재원으로 근무하다가 미국에 눌러앉으며 오래전에 영주권을 신청할 때 혼인 사실과 가족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호적등본이라는 문서를 번역하여 이민국에 제출한 적이 있었고, 그 몇 년 후에 시민권을 신청하며 또 호적등본을 제출했고, 얼마 전에는 아내가 배우자 연금 혜택을 신청하며 부부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사회보장국에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해당 관공서에서는 담당자가 원본을 꼼꼼히 확인한 후 복사하여 보관하고 원본은 다시 돌려주었다.
며칠 전에 결혼한 지 35년 된 부부의 호적등본을 번역해 주었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배우자의 의료보험 가입을 위해 종업원과 배우자의 혼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요구했는데 마침 오랫동안 보관해 둔 호적등본이 있기에 한인 타운의 번역 전문가에게 번역을 부탁했더니 한자투성이인 문서는 번역할 수 없다고 난감해하더라며, 그걸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나에게 전화를 해 왔다. 딱한 사람 같으니라고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기로서니 바로 옆에 도움을 줄 사람을 두고 그렇게 헤맸느냐고 핀잔을 주고 기꺼이 번역을 떠맡았다.
가족이 많아서 여섯 쪽으로 된 한자투성이의 호적등본은 색까지 바래어서 그야말로 고색창연하였다. 푸른색 고무인, 빨간 직인, 그리고 지금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이 붙어있는 인지가 고문서로서의 관록을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호주인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그분들의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 손부의 이름이 줄이어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미 세상을 떠난 분들도 몇 분 있었다. 그래도 35년 전에는 생존하셨고, 원문 그대로 번역해야 하기에 내 번역본에도 그분들을 그대로 두었다.
호적등본에 사용된 편제(編制), 재제(再制), 이기(移記), 멸실 우려(滅失 憂慮) 등의 한자어를 보니 젊은 번역전문가가 두 손 든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딱딱한 용어야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하면 되지만 호주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 예를 들면, 손부(孫婦), 그러니까 손자의 아내이자 손자며느리라는 뜻을 한자로 쓰면 의미가 금방 머리에 들어오고 무게가 있어 보이는데 영어로 granddaughter-in-law라고 쓰니 law라는 단어가 차가운 느낌을 주고 거리가 제법 먼 느낌을 주는 게 아무래도 언어의 차이겠지.
지금은 사라진 문서라는 호적등본이라는 걸 오랜만에 대하니 반가웠다. 조손 3대의 가족 기록이 나이 순서대로 호주와의 관계, 생년월일, 결혼 일자 등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정리된 이런 문서를 왜 없앴을까? 가족의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좋은 문서인데. 핵가족 위주로 세대주와 세대주의 부모, 배우자 그리고 자식에 관한 간략한 기록만 담고 있는 가족관계증명서는 호적과 비교하면 삭막하고 이기적인 느낌을 준다.
서둘러 호적등본이라는 문서의 번역을 마치고 돌이켜 보니 그간 번역을 제법 많이 한 셈이다. 성인 전, 신앙 체험담, 선교사 전기, 파티마 성모 발현관계 문서, 요한복음 해설서 등 종류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모두 신앙서적이다. 아주 오래전 L 전자 사원 시절에도 몇 년 동안 특허 문서를 번역하느라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번역으로 돈을 좀 벌었느냐고? 한 푼도 못 벌었다. 회사직원으로 특허문서를 번역할 때는 봉급이라도 받았지만, 그 이후에는 봉사라는 이름의 품팔이만 한 셈이다.
(2017년 1월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