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취재는 ‘이태석신부기념관’에 다녀왔다.
이 기념관은 2019년 9월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서구에 지어졌는데, 서구에서 운영을 못하게 되어 이태석 신부님를 잘 아는 사람을 찾다가 ‘살레시오회’ 라는 곳에 이태석신부기념관을 맡기게 되었다. 지하 1층에는 이태석 신부님 생가를 복원 해 놓은 곳이 있고, 1층에는 카페테리아라고 청년들의 꿈과 자립을 지원하는 직업학교이며, 2층에는 사무실과 각종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실, 3층에는 이태석 신부의 유품과 톤즈방을 전시 해 놓은 전시실, 4층에는 강의를 위한 다목적실, 5층에는 야외테라스가 있었다.
이태석 신부는 1972년 10월 17일에 부산에서 4남 6녀 중 9번째로 태어났다. 이태석 신부는 집 근처 송도성당에서 신부의 꿈을 키워나갔고,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중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는데, 성당에 있는 오르간 앞에서 몇 시간씩 연습을 했고, 초등학생 때는 ‘해’, ‘별’ 등을 중학생때는 ‘묵상’ 이라는 곡을 작사, 작곡 했다. 이태석 신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원래 의사가 되려 했지만,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신부’ 라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들의 반대에 불구하고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2001년 6월 24일 서울 구로3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신부는 해외에서 봉사를 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그 계기가 바로 소 안로이시오 신부 덕분이었다. 소 안로이시오 신부는 6.25 전쟁 이후, 전쟁고아와 아픈 사람을 돌봐주었는데 그 신부님도 우리나라로 와서 봉사하여 도와준 것처럼 이태석 신부도 다른 나라로 가서 봉사를 해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태석 신부는 오랜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남수단 톤즈로 가서 병원을 지어 사람들은 치료해주고,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주민들과 나병환자들을 위해 흙담과 짚풀로 집도 지어주었으며, 깨끗한 물도 마시게 해 주었다. 그리고 학교를 지어 그 지역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브라스밴드’를 만들어 총과 칼을 든 아이들의 손에 악기를 대신 쥐어주어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상처를 입을 아이들의 마음에 음악으로 위로해 주고 치유를 해 주었다. 이태석 신부는 육체적인 아픔 뿐만 아니라, 마음의 아픔까지 헤아리고 어루만질 줄 아는 진정한 의사이자 선교사 였다. 이태석 신부는 2008년 한국에 휴가차 입국 하여, 종합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아직 할 일이 많다며 살려달라고 했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10년 1월 14일 새벽에 ‘Every thing is good(모든 것이 다 좋았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48세에 사망하셨다.
나는 이태석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책을 통해 읽어 보았고, 또 영화로도 접해 보았다. 이태석 신부님의 업적은 다시 생각해도 정말로 대단한 것 같다. 내가 봉사를 한다고 해도 이태석 신부님은 못 따라잡을 것 이다. 그리고 이태석 신부님의 가족은 매우 많은데 그 좁은 집에 살았다는 게 안 믿긴다. 그리고 전시실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유품을 볼 수 있어서 되게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자신이 원하는 꿈을 접지 않고 이룬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이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신부기념관을 방문해서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봉사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여러 가지 많은 봉사를 하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설명을 쉽고 재밌게 해주신 이세바 신부님과 또 잘 안내를 해 주신 오혜원 팀장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