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의 감각
김광섭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현대문학』 145호, 1967. 1)
[작품해설]
김광섭의 문단 활동은 크게 해방 전후로 나눌 수 있는데, 해방 전의 문단 활동은 해외문학파로서의 활동, 연극 비평을 중심으로 한 평론 활동, 시작(詩作) 활동 등으로, 또 해방 후의 문단 활동은 해방 문단에서의 좌익과 대항한 민족주의 문학 운도, 6.25 이후의 문단 활동, 투병기의 창작 활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는 1965년 시인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1주일 동안 무의식의 혼미 상태에 있다가 가까스로 깨어났던 자신의 체험을 구상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생의 감각’은 바로 ‘생의 자각’, 곧 생명의 불할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인생론적인 면과 소생 과정의 극적인 면이 동시에 수용되어 있다. 화자는 부활의 시간적 출발점을 ‘여명’으로 잡고 있다. 여명은 밤으로부터 아침으로 연결되는 과도기적 시간으로, 밤이라는 절망에서 아침이라는 희망으오의 전이를 상징한다.
2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시간적으로 역순(逆順)의 짜임으로 되어 있다. 2연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절망적 상황과 극복의 순간을, 1연에서는 병마로부터 벗어난 후에 느끼는 새로운 삶의 인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1연은 재생한 삶의 첫 새벽에서 바라보는 화자의 인생론으로, 청각과 시각을 통해 생명의 부활을 감각적으로 보여 준다. 새벽 종소리, 닭의 홰치는 소리, 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화자는 비로소 자신이 죽음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생한 생명의 결이로움에서 새벽별을 바라보며 그는 마침내 자신이 산 자(者) 가운데 있음을 확인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의미를 강조하기보다는 내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세계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화자의 깨달음을 엿볼 수 있다.
2연은 죽음에서 극적으로 소생한 과정의 회강으로,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기 전까지 화자가 겪은 고통과 시련의 극복 순간이 형상화되어 있다. 화자가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육체적 고통과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와 같은 저인적 혼란을 겪으며, 소멸하는 생을 뜻하는 ‘무너지는 둑’에 서 있었던 중, 그 곳에 ‘무더기로 피어난’ ‘채송화’가 자포자기 상태이던 그의 생명에 새로운 삶의 의지를 깨우쳐 준 것이다. 60세라는 생의 원숙함에서 비롯된 개인적 체험이 모든 이의 보편적 정서로 확대됨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깊은 자아 성찰 의식에서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고통과 절망으로 이어진 투병 체험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생명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작가소개]
김광섭(金珖燮)
이산(怡山)
1905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24년 중동학교 졸업
1932년 와세다대학 영문과 졸업, 극예술연구회 참가
1945년 중앙문화협회 창립
1950년 『문학』 발간
1952년 경희대학교 교수
1956년 『자유문학』 발간
1957년 서울시문화상 수상
1961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974년 예술원상 수상
1977년 사망
시집 : 『동경』(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이삭을 주을 때』(1965), 『성북동
비둘기』(1969), 『반응-사회시집』(1971), 『김광섭시전집』(1974), 『동경』(1974),
『겨울날』(1975), 『김광섭』(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