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사의 금강경 강의가 끝났습니다”
선지식은 적멸과 지혜와 자비를 원만히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쯤은 겁내지 않는다.
부대사가 법상에 올라 경상을 내리친 것도
본래의 자리에서 보자면 먼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잘 알면서 짐짓 그렇게 하는 것이 대자비다.
텅 빈 기원정사의 여래향실에서 석존의 금강경을 듣는 자라면 부대사의 설법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양무제(梁武帝)는 양(梁)나라의 황제 소연(蕭衍, 464~549)이다. 중국 남조 양의 초대 황제(재위:502~549)로 묘호는 고조(高祖)이고 시호는 무제(武帝)이다. 남조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치세 48년 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 전성기를 보냈다.
양무제는 네 번(혹은 세 번)이나 동태사(同太寺)에 출가를 하려고 하였는데, 그때마다 승복을 입고 절에서 수행 생활을 하였기에 ‘황제보살(皇帝菩薩)’ 또는 ‘불심천자(佛心天子)’로 불렸다. 동태사는 양무제가 서기 527년에 건립한 사찰로 지금의 남경(南京) 계명사(鷄鳴寺)다. 양무제는 거의 매일 이 절에 가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예불을 드렸고, 가장 오래 출가생활을 한 것은 37일이었다고 한다. 잠깐씩 ‘출가’라는 형태를 취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부대사(傅大士, 497~569)는 양(梁)나라에서 진(陳)나라에 걸쳐 살았던 거사(居士)이다. 존칭으로 부대사라고 하는데, 이때의 대사(大士)는 보살의 별칭이다. 절강성(浙江省)의 동양(東陽) 출신으로 성(姓)은 부(傅), 이름은 흡(翕), 자(字)는 현풍(玄風), 호는 선혜(善慧)라고 하였다. 쌍림대사(雙林大士) 또는 동양대사(東陽大士)라고도 하였다. 16세에 혼인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나, 24세에 서역(西域)에서 온 숭두타(嵩頭陀)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동양(東陽)의 송산(松山)에 은거하여 수행하였다. 534년에 입궐하여 양무제(梁武帝)에게 설법하고, 칙명으로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 머무르니 학인들이 운집하였다. 540년에 송산에 쌍림사(雙林寺)를 창건하고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금강경오가해>의 게송을 보면 부대사는 선(禪)과 유식(唯識)의 대가인데, 유식을 전공한 이가 아니면 해석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부대사의 게송은 번역만 있고 해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공(志公, 誌公)스님은 원래 금릉 보지(金陵 寶誌, 418~514)화상이시다. 어려서 출가하여 강소성(江蘇城) 건강(建康) 도림사(道林寺)에서 선정(禪定)을 닦았다. 양나라 무제의 스승이다. <대승찬(大乘讚)>을 지어 양무제에게 바쳤으며, 달마대사와 양무제 사이에서 인연을 맺게 하려고 애썼다. 입적 후 내려진 시호(諡號)로 광제대사(廣濟大師), 묘각대사(妙覺大師), 도림진각(道林眞覺), 자응혜감(慈應慧感), 보제성사(普濟聖師), 일제진밀(一際眞密) 등이 있다. 저서로는 <문자석훈(文字釋訓)> 30권과 <십사과송(十四科頌)> 14수, <십이시송(十二時頌)> 12수, <대승찬(大乘讚)> 10수 등이 있다.
본칙 원문
擧 梁武帝 請傅大士 講金剛經 大士便於座上揮案一下 便下座 武帝愕然 誌公問陛下還會톬 帝云不會 誌公云大士講經竟
본칙 번역
이런 얘기가 있다. 양무제가 부대사를 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부대사가 법좌 위에서 문득 경상을 한번 내리치고는 곧바로 법좌를 내려왔다. 무제가 깜짝 놀랐다.
지공스님이 “폐하 아시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무제가 “모르겠습니다”하고 답했다.
지공스님이 “부대사의 금강경 강의가 끝났습니다”고 하였다.
강설
아무리 경전을 잘 설파한다고 듣는 사람이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의 알음알이(지식) 자랑하려 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 부대사는 양무제를 대단히 높게 대접했다. 하긴 걸핏하면 절에 가서 가사를 두르고 있을 만큼 건방을 떠는 황제니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도 좋으리라. 평소에 입만 벌리면 경전의 구절을 말하던 양무제에게 자상하게 설명한다고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금강경>의 핵심이야 말로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번다한 언어를 떠나 간결한 초월적 언어를 보여주는 것도 좋으리라. 그래서 부대사가 보여준 것은 경상을 한번 내리친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려와 버렸다. 참 좋다.
눈이 휘둥그레진 양무제. 그 꼴이라니…쯧쯧.
지공스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알았습니까?”하고 물었다. 양무제는 솔직하게 고백하고 말았다.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공스님은 참 친절하시다. “부대사의 금강경 강의가 끝났습니다.” 정말 좋다. 참 친절하시다. 여기에 말을 보탰다면 양무제를 데리고 지옥으로 곧장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선지식들의 친절이다.
송 원문
不向雙林寄此身 却於梁土惹塵埃
當時不得誌公老 也是栖栖去國人
쌍림(雙林) 부대사가 살던 곳.
야진애(惹塵埃) 티끌 먼지를 일으키다. 부대사가 금강경 법문을 한 것.
서서(栖栖) 아주 급한 모양.
거국인(去國人) 달마대사.
송 번역
머물던 쌍림사에 그 몸 의탁하지 않고
도리어 양나라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네.
당시에 지공노인네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역시 바삐 나라 떠난 사람 되었으리.
강설
설두선사는 제1구와 2구에서 “머물던 쌍림에 그 몸 의탁하지 않고, 도리어 양나라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네”라고 부대사가 양나라 왕궁에 와서 금강경 법문할 것을 평했다.
쌍림사는 부대사가 창건하여 머물던 사찰이며, 또한 본래면목의 경지이기도 하다. 자비심을 펼치기 전이라면 그저 적멸한 상태로 지내는 것이지만, 그러나 선지식에게서 자비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선지식은 적멸과 지혜와 자비를 원만히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먼지 뒤집어쓰는 것쯤을 겁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대사가 양무제의 청으로 법상(法床)에 올라 경상(經床)을 내리친 것도 본래의 자리에서 보자면 먼지를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잘 알면서 짐짓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대자비이다.
설두노인네는 송의 제3구와 4구에서 “당시에 지공노인네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역시 바삐 나라 떠난 사람 되었으리”라고 하여 지공화상으로 인해 부대사의 기이한 법문이 빛을 발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부대사가 대자비심을 발하여 스스로 티끌 먼지를 뒤집어쓰면 뭘 하겠는가. 근본도리에서 보자면 양무제는 까막눈이고 귀머거리인 것을. 만약 지공화상이 그 자리에서 “부대사가 금강경을 설법하여 마쳤습니다”라고 자기 일처럼 밝히지 않았다면, 양무제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대사를 괴이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만난 이후 아무 소득 없이 서둘러 양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가버렸던 것처럼, 부대사도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