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악마가 되었을까? (임인년 세밑에)
♡ 유언의 취지
수림정에서 내다보는 북한산 자락과
그 위에 걸쳐진 푸른 하늘은
지극히 싱그럽고 청명하여
산새들조차 흥겨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
여기저기서 지저귀는 소리 낭랑한데
눈 아래 고요한 연못의 수면도
즐거운 파장으로 제 홀로 일렁이고 있구나.
나는 오늘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호젓이 앉아 김난석의 입회 하에
내 사후 정리되어져야 할
몇 가지 사안에 대해 말하노니
유루(遺漏)없이 조치되기를 바란다.
1. 우선 서울 000 소재 부동산 매각대금 중에서
20억원을 차출(差出)해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운영하도록 하되
그 추진은 김난석의 도움을 받도록 하고
정관은 내 책상 서랍에 비치된 것을
참고하도록 할 것이며
2. 000빌딩은 지하1층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재단에 현물 출연하고
이를 매각하는 일이 없도록 정관에 규정하도록 하라
.
.
.
16. 서울 000 소재 나의 거처인 가옥은
현재 나와 너희들 어미가 거처하는 곳이니
우선 너희 어머니의 이름으로 소유권을 이전하라
위와 같은 나의 뜻이 잘 이행되어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가족들이 내내 화목하도록 할 것이며
그 집행자로 김난석을 지정하니
이 사람을 돕거나 도움을 받아
아무쪼록 차질 없기를 심심 당부한다.
♡ 구술자 0 0 0 (인)
♡ 연월일 2002년 0월 0일
♡ 위 구술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입회인 서울특별시 송파구 000 거주 김난석 (인)
그분은 ‘묻지 마라 갑자생이다’ 라 했으니
지금 생존이라면 98 세다.
선대로 3대가 새벽에 일어나 칼을 갈았단다.
남의 집 소나 돼지를 잡아주고 주검을 거두어 염을 해주는
궂은 일만 해왔단다.
그 음덕으로 그렇게 돈을 많이 번 것이라고 늘 말씀하시더니...
“김형, 나는 남들이 회장 회장 하지만
나는 책 읽은 것도 공부한 것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야
그저 닥치는 대로 돈만 벌었어...“
그래도 책 이야기만 들려드리면 좋아하시더니...
“김형, 난 아직 누구 도와준 일도, 자선사업 한 일도 없어.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그런 거야.
라이온스클럽에 회비나 댔지.”
“ 엊그제 자식놈들을 불러놓고 따져봤더니
다 20억은 넘더라구.
그래서 내 재산은 모두 사회에 바치려고 해.“
우여곡절 끝에 2002년 0월 0일
장문의 유언장을 대필해 작성해뒀다.
“내일 저녁에 다 모이라고 해, 난석형이 입회하기로 했어.”
내가 왜 그런 신뢰를 받았는지
그것은 지금도 고마움이다.
그리고는 이튿날 건강 체크나 한다고
서울대학병원에 가셨다. 가벼운 마음이었을 게다.
왜냐하면
내과과장이 함께 라이온스클럽에서 활동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선 요즘 가슴이 답답하다니 혈관조형술을 권한 것 같았다.
그런데
조형술 도중에 혈장 하나가 혈관을 타고 흐르다가
뇌세포에 붙었다는 거다.
이런 사고가 날 확률은 만분의 1이라는데...
그것도 국내 최고의 병원에서...
저녁에 병원에 들려보니 혀를 움직이지 못했다.
편안하시냐고 물었더니 잡은 손에 힘만 주었다.
점점 혈압은 올라가고...
머리도 못 움직이고...
뇌수술을 해서 혈장을 떼어내야 하는데
그래도 정상 회복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었다.
수술을 안 하면 바로 숨진다는 것이고...
결국 수술을 하기로 했지만
수술은 잘 됐다 하나 응급실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곤 아무 말씀도 못하고
30일 만에 운명했다.
30일 전, 그날 저녁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언장에 서명을 할 참이었는데...
하나의 인생이 그렇게 마감되었던 것이다.
장례식은 무사히 끝나고
큰아들이 유언장을 보여 달라 했다.
난감했다.
서명이 안 된 것이니 효력이 없는 건데.
그러나 당신들 아버님의 뜻이 무엇인지나 알라고
보여주었다.
나는 그 상속세 신고대행을 부탁받고 사양했으니
그것은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싫어서 였다.
결국 재산분배는 균등히 이루어지고
당시 천억이 넘는 재산을 사회사업에 내놓겠다던
그분의 뜻은 허공에 흩어지고 말았다.
자신의 뜻을 한 번에 이루려던 것이
이렇게 허망하게 미수로 끝났으니
그분은 잘 사신 것인지 못 사신 것인지
하느님은 알고나 계신지...
나는 가끔 가끔 떠오르곤 하는데
나를 신뢰한 그분이 한없이 고맙기만 한 것이다.
비록 그 유지는 미수에 그첬다 하더라도.
내가 그분과 인연을 맺은 경위는 이러하다.
내 외종사촌이 다리를 놓아 회계컨설팅을 해준 일이 있었다.
그리곤 컨설팅 비를 받지 않았다.
내 외종사촌이 그 사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전차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달려가
자문해주곤 했는데
물론 밥은 같이 먹었지만 대가는 받지 않았다.
그러노라니 그분은 나에게 점점 더 친근감을 가졌던 것 같다.
나도 친구를 얻은 듯 흐뭇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자주 외로움을 토하기에
혼자 지내는 여류 문인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멀어지고 말았다.
유일한 말벗은 나 혼자였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재산 사회환원 이야기가 나왔는데
재산 중에서 집 한 채는 나에게 명의이전한다는 거였다.
그러다가 네째 딸이 이혼하면 그 딸에게 이전하라는 거였다.
네째 딸은 재산을 넘겨줘도 사위가 바람 피우며 다 탕진하니
방편으로 그렇게 한다는 거였다.
압구정에 있는 일식집도 나에게 명의 이전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월세는 손주들 학비로 충당하라는 거였으며
그 관리를 나에게 하라는 거였다.
물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해 비영리재단을 만드는 것도
그 관리를 나에게 맡기는 거였다.
이런 모든 절차는 위 유서에 포함되었는데
모든 걸 나에게 맡긴 그분의 신뢰가 고마울 뿐이다.
하늘에서 평안하시라 님이여!
1961년도 사범학교 시절이다.
국어선생님이 한시간 내내 영화이야기를 해주셨다.
미국영화 <가스등> 이다.
어느 보석여인이 이층에 보석을 쌓놓고 원인 모르게 죽었다.
그 유산을 조카녀가 물려받게 되었는데
이걸 안 미남의 사내가 조카에게 접근해 심리조작을 해들어간다.
그래서 자기 말만 듣게 만든다.
목적은 이층에 숨겨진 보석을 탈취하기 위함이다.
밤마다 이층에 몰래 올라가 가스등을 조작해서
불빛이 커졌다 작아졌다 명멸하게 한다.
조카녀는 이게 신경이 쓰여 혼란을 일으키지만
사내는 그게 그렇지 않다며 조카녀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간다.
자기 말만 들으라고 쇠뇌하는 거다.
결국 보석여인과 잘 알던 어느 경찰관의 추리에 의해 들통나는데
여기서 심리조작을 한다는 <가스라이팅>이란 용어가 나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의도 없이 선의로 조회장을 도왔다.
그런 전차로 조회장은 나를 신뢰하게 되었고
자식보다 나를 더 믿어 모든 재산의 처분권을 나에게 맡겼다.
재산을 자식들에게 나눠줘야 싸움만 한다는 거였다.
결국 유서는 본인이 인장을 찍지 않아 법적 효력이 없었지만
만약 그게 유서로서 완성되었다면 나는 악마가 되었을까?
사람의 마음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니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임인년 세밑에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적지만
임이시여!
나에게 시험할 기회를 주지 않아 감사합니다.
2022. 12. 29.
첫댓글 억억.......... 그거 사회에 환원하기전에
제가 좀 만져보고 주면 안되겠는지요
나는 언제나 그런 큰 돈을 유언으로 남길꼬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밥먹기도
힘든데. 저는 어느가수의 말처럼 그냥
<떠날 때는 말없이> 그렇게 가렵니다.
그거 만져봐서 뭣하게요?
그분이나 저나 주머니엔 카드 한 장뿐이었던 걸요..ㅎ
돈이 넘 많아도 문제입니다
그저 적당한게 좋지요
경기 북부 변방의 아파트에서 사는 제겐 먼 나라 이야기 같습니다. ^^
저희 내외야 그저 일궈놓은 재산 없이 연금에 의지하여 사는 노후에 큰 불만 없는데
딸들에게 딱히 물려줄 것이 별로 없으니 그건 아쉽기도 합니다.
난석 선배님의 삶의 경륜은 다방면으로 존경스럽고요.
다녀가신 분들 고맙습니다.
자기 의지를 미리미리 챙기면서 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햐 ᆢ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 ᆢ
조회장님의 신뢰가 깊은 난석님을
다시 한번 존경 합니다
마음 먹은 것 미리미리 실천에 옮기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이 글을 올려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