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 왕을 참하라 (13)
4. 최고의 명군 세종 (世宗)
세종(世宗)의 애민정신
세종(世宗)만큼 백성을 사랑한 왕도 없었다.
세종 7년 가뭄이 들자 왕은 궁 밖으로 나가 근교를 돌아보며 농부들에게 작황을 물었다.
농사를 망쳤다는 대답을 들은 세종(世宗)은 점심도 먹지 않고 궁으로 돌아왔다.
조선 백성들은 개국에서 멸망할 동안인 무려 500여년 동안 단 한 세대도 태평성대가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다.당시 먹고 사는 일은 농사에 달려 있었는데, 대부분의 논이 천수답이었고
농업기술까지 낙후되어 있어 농업생산성까지 형편없었다.
조선 최고의 명군인 세종대에도 10여 년간 단 한해도 가뭄이 들지 않는 해가 없어서 백성들
중에도 흙을 파 먹는 사람도 생겨났다.세종(世宗)은 백성들의 삶이 기근으로 피폐해지자
거처하던 강녕전을 버리고 경회루 한쪽에 초가집을 짓고 무려 2년을 살 만큼 백성들과
아픔을 함께 한 군주였다.당시 기록에 의하면 세종(世宗)이 즉위한 1418년부터 세상을 떠난
1450년까지 태양의 흑점 기록이 하나도 없다.
그뿐 아니라 그때를 전후해서 약 150년간 흑점기록이 등장하지 않았다.그 시기가 소빙하기와
일치하는 때로 태양활동이 매우 적고 일조량이 적어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던 세종(世宗)은 농업생산력을 높이려고 시도했고,
그 결과가 농사직설 편찬과 측우기, 자격루, 칠정산의 제작을 가져와 눈부신 과학발전으로
이어졌다.
(칠정산)
음부(淫婦) 유감동(兪甘同) 사건
세종 9년인 1427년, 성종때의 어을우동에 비견되는 희대의 음부 '유감동(兪甘同)' 이 스스로
창기를 자처하며 38명에 이르는 고위 관리들과 섹스를 가진 스캔들이 터져나와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다.관련자 명단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까지 거명되자 수사 중단의 명령이 떨어졌다.
영의정 정탁 부터 정탁의 조카인 이조판서 정효문, 그리고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까지 스캔들의
대상이 되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수사할 수도 없었고, 더 나아가서는 누구 이름이 튀어 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유감동(兪甘同) '은 창기가 아니라 검한성 유귀수의 딸로 평강 현감 최중기와
혼인했다가 간통 사실이 발각되어 남편으로 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 길로 경외의 관리들과 섹스 행각을 벌이다가 들통이 나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녀가 색녀라면 욕정을 채우는데만 급급했어야 하는데, 그녀는 동침한 사내의
이름과 관직 등 인적사항을 모두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을 알아본 결과 그녀는 무안군수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갔다가 병으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순찰을 핑계삼은 김여달이란 무뢰배에게 걸려 집단으로 윤간을 당했던 것이었다.
그후 그녀는 연약한 여자 하나 지켜주지 못하는 조정에 앙심을 품고 고위 관리들을 유혹하여
섹스 스캔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유감동(兪甘同)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간했으나 세종(世宗)은 <대명률> 에 따라 장형을 내리고 관비로 내쫓게 했다.
변비 효자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으며, 충(忠)과 효(孝)를 중요시했다.
전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죽이는 큰 사건이 일어나자 세종은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등 효자와 효녀의 모델을 수록한 서책(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들을 고려한
그림책)을 발간, 전국에 배포했다.
(삼강행실도)
효자가 되려면 3대 효행을 해야하는데,그 첫번째가 단지(斷指 - 절대 단무지의 약자가 아님! 손가락 절단)
두번째가 할고(割股 - 가난한 집안의 효자가 넓적다리 살을 베어 부모님께 대접하기) 세번째가 상분이었다.
상분(嘗糞)이 뭐냐고요?중병에 걸린 부모의 똥을 찍어서 먹어보고 병세를 파악하는 방법!
어쨌든 이들 모두가 목숨을 내 놓거나 잘못하면 병신이 되기 십상인 어려운 방법들인데 위 방법보다
훨씬 능률적으로 효자가 되는 기막힌 방법이 하나 있었다.바로 변비 치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변비는 가볍지 않은 병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柳成龍)은 변비가 심해 사직을 할 정도였다.
자! 지금부터 조선시대에 효자가 되는 방법을 머리로 그려봅시다~
부모가 변비가 심해 고생할때 아들이 입에 기름을 잔뜩 머금고 빨대를 문다.
그 다음 빨대를 변비 환자의 항문에 꽂고 기름이 들어가도록 힘껏 분다.
이때 조심해야 할것은 순간 숨을 들이 마시게 되면 막혔던 변이 나오는 수가 있었다.
조선시대 효자중에 상당수가 부모의 변비를 고쳐주고 효자상을 받았다고 하니 의학이 발달한
세상에 태어난게 천만 다행이지 싶다.
다음은 (14편)요절한 문종과 계유정난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