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모하고 존경하는 인물들을 보노라면, 종종 그들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이 보인다. 높은 경지에 다다른 위인들을 우러러 보는 즐거움이 있는 반면, 그들이 그 위로 오르는 데 필요했던 사다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겸손하게(작아지게) 한다. 그런 까닭에 위인들의 자서전이나 평전 등은 그들을 흠모하는 사람들에게 무척 반가운 일이다. 그들이 힘겹게 올랐던 사다리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의 ‘고백’이다. 자신들의 실수와 열등감, 좌절과 실패의 이야기는 독자와 따르는 무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준다. 위인인 줄 알았던 그가, 실은 나와 매우 비슷한 내,외적 경험들을 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린다면,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의 크심을 알게 되는 것은 실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체험은 삶을 윤택하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한 성공한 위인의 고백이자, 자신의 실패와 죄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참회의 글이다. 이 고백록은 독자들로 하여금 위로를 얻게 하고, 겸손의 삶을 살게 하며, 하나님만 바라게 하게끔 이끄는 매력이 있다. 그토록 위대하게만 보였던 어거스틴이, 실로 그의 젊은 나날은 도덕적으로 질퍽거리는 삶이였으며, 자신의 지적 재능에 자만하여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을 뿌리치고 하나님의 대적을 자임하는 삶이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인류의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데 동원된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즐겁다. 그것도 그의 입과 고백을 통해 직접 전해 들으니 그 즐거움은 갑절로 주어진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특별한 도구였을 뿐, 범인으로 살아가는 작은 내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것이란 전제는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책을 덮고, 책 집필을 마무리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어거스틴을 상상하며, 나도 그와 같이 무릎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픈 마음이 드는 건, 그의 체험과 나의 체험이 교류했기 때문이리라.
어거스틴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 하에 특별하게, 크게 사용된 하나님의 그릇이다. 모세, 다윗, 세례요한이 그렇게 쓰였듯이, 베드로, 바울이 그렇게 쓰였듯이, 어거스틴 역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곧게 만들고자 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참회록에 드러나듯이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지적 재능을 타고났다. 어려운 아리스토텔레스의 글들을 쉽게 이해하는 능력, 타인을 설득하는 수사학적 능력, 동시대 지성인들의 근본적인 영적 고민들을 간파하는 능력, 마니교를 통한 선악의 기원에 관한 도덕적 능력 등등 어거스틴은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된 탁월한 재능들을 갖춘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자각하지는 못했다. 모든 재능이 단지 자신의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그의 지적 자만은 동시대 인물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의 지적 호기심과 도덕적 민감성, 진리에의 갈구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에 대한 목마름으로 이어졌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과 기도는 결국엔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성경과 성령의 사역에 마음을 열게끔 이끌었다. 그리고 그는 그 유명한 회심사건을 통해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세상과 사물과 사람과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특별한 재능을 갖춘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에는 반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단지 한 시대적 재주꾼에 머물지 않고 인류 역사를 통해 사랑받는 고결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어떤 어거스틴이 ‘그’ 어거스틴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그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거스틴이 그의 인생을 통해 회상하며 사무치게 추억하는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없었다면 어거스틴은 없었을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안토니우스 등 그가 지적 순례를 통해 만났던 인물들, 그리고 그가 심취하기도 하고 회의하기도 했던 마니교와 고대 그리스의 사상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상들, 이 모든 것들이 어거스틴을 밀레니엄을 넘나들며 감화를 주는 영적 거장으로 만드는 데 필수조건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란 것이 단지 한 사람만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공동체로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그것은 단지 위인전을 보며 작은 나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하나님의 역사에 동원되는 작은 일꾼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의 참회록의 글쓰기 방식이 주는 독특함과 유익이 실로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참회록은 하나의 기도문이다. 하나님께 말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듣는다. 그 대화 속에서 그는 그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모든 과정들과 경험들이 실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었음을 재확인한다. 그러면서 참회하고, 그러면서 감사하고, 그러면서 송축하고, 그러면서 독자를 위해 중보한다. 이것은 하나의 기도현상이다. 우리는 깊은 기도로 나아갈 때 이와 같은 경험을 한다. 하나님께 말하면서 숱한 죄악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걸 붙들고 회개한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주변의 인물들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와 그를 위해 중보한다. 그러면서 실패의 책임자인 나는 낮아지고 성공의 인도자인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한다. 그 시간은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평안이 스며드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수학적 시간이 아니요, 하나님과 동시에 함께 누리는 체험의 시간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구조를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 개인의 역사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었음을 고백한다면 그 고백은 필경 기도여야 한다.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높이고, 인간인 나의 나됨을 겸손하게 낮추는 기도여야 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읽은 이로 하여금 기도의 삶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이며, 정도일 수밖에 없다.
어거스틴의 수많은 주옥같은 경구들이 마음의 보석처럼 빛난다. 이 하나만으로도 그의 고백을 듣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의 고백을 들은 한 독자로서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의 고백이 울리는 것을 듣게 된다. 어쩌면 이 고백은 어거스틴이 기대했던 독자의 음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고백을 빌려, 이 소감을 마감하자면 이렇다.
“나의 선한 행위는 당신의 작품이며 당신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나의 악한 행위는 나의 실수이며 당신의 벌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제10장 4절, p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