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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4.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년~1762년)
세자는 아버지가 자신을 보러 온다는 말만 들어도 불안하고 무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영조실록에는 이와 같이 신하들조차 영조에게 "전하께서 저하를 지나치게 엄하게 대하시니,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모습이 조선 왕조에서 훈구,사림과 함께 가장 많은 의견 충돌을 한 노론과 소론,이 둘 외에도 당파를 불문하고 정말, 몹시, 자주 나온다. 심지어 위의 기사조차, 신하가 울면서 간하고 있는데도 영조의 반응은 그 신하에게 화를 내며 트집잡으려 하였다.
1759년에는 밝은 혜성이 나타났는데 "이와 같은 천체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세자가 몸을 돌이켜 수성(羞誠)해야 한다"는 취지의 상소가 올라왔다. 이에 세자는 따르겠다고 했으나, 계속되는 돌발 행동으로 영조의 불신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국의 세자가 창문을 넘어 달아나고 자살 소동만 서너 번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세자는 부왕이 잘해주지도 않으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고 질책을 계속하며, 선위 파동이니 뭐니 해서 머리가 피가 나도록 두드려대면서 석고대죄 쇼를 해야 했고, 심적 부담으로 기절까지 하니, 나중에는 제정신이 유지가 안 될 정도였다. 게다가 냉혹한 부왕은 세자의 대접까지 날이 갈수록 박하게 했는데, 1760년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행궁으로 세자가 거동할 때는 호위 병력이 고작 500명에 지나지 않았고 세자의 사부와 빈객들이 하나도 따르지 않아서, 한양의 식자들이 이를 보고는 "일국의 세자의 행차가 고작 이 정도냐?!"라고 한탄했다는 기록을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덕일은 "호위 병력이 500명이나 되었으니 세자가 대접을 잘 받은 것 아니냐"고 주장하지만, 당시의 권세 있는 양반들까지도 "저게 뭐냐"고 한탄하는 꼴을 보면 명백한 푸대접이다. 마찬가지로 1760년 여름에 가뭄이 심했는데, 영조는 이것 역시 모두 다 세자 때문이라며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퍼부으니 세자가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자신의 며느리인 효의왕후가 간택되어 세손빈으로 입궁할 때 조차도 참석하지 못했다. 삼간택 중 두번째 간택 과정에선 효의왕후와 정조가 천연두에 걸려서 온 왕실은 물론이고 사도세자도 이를 걱정하며 밤을 샐 정도였다. 그런데도 영조는 사도세자가 간택에 참석하는 걸 막았다. 마지막 삼간택 때는 차마 막을 수 없어서 사도세자도 참석이 가능했는데, 이 때 사도세자는 아래에 언급할 의대증 때문에 망건에 달 관자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세자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 정3품 관료가 착용하는 통정옥관자를 착용했다. 이를 본 영조는 이를 꼬투리 잡아서 간택 자리에서 쫒아냈다. 이를 보다 못한 혜경궁 홍씨는 정순왕후 김씨, 영빈 이씨, 화완옹주와 의논해서 효의왕후가 간택 후 세손궁으로 가기 전 잠깐이라도 동궁에 들러서 사도세자와 만나게 했다. 영조에게 쫒겨나서 앓아 누워 있던 사도세자는 효의왕후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다.
3.4. 극심한 정신질환과 연이은 살인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而 烙刑等慘忍之狀不可勝言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했다.
대천록(待闡錄)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이 아래 1장은 세초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
승정원일기
임금이 숭문당에 나아가서, 좌의정·우의정이 입시했을 때에 하교하기를 "이제 세자의 하령을 보니, 슬프고 가엾음을 어찌 비유하겠는가? 여섯 사람에게 판(板)을 주고 베를 주어, 해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간검(看檢)하여 매장하게 하며, 그 처자(妻子)는 후하게 돌보아 주어 자신에 한하여 복호해 주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1757년 6월부터 경모궁의 홧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당번 내관 김한채를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들에게 효시하였다. 나는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날 내인을 여럿 죽였다. - 한중록의 기록
1757년 6월 어느 날 하루에 내시와 나인을 6명 살해했다. 세자 주변 내시, 나인, 종 등 사람을 죽이고 낙형으로 고문하기 시작했다.
승정원일기의 내용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현재 남아있는 기록은 대부분 한중록에 적힌 것이다.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강박장애인 의대증을 가지고 있었다. 옷 1벌을 입자면 10벌에서 20~30벌을 지어 올려야 했다. 세자는 옷을 입기 전에 옷이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 두거나 불사르기도 하는 등, 1벌을 순(純)하게 갈아입는 적이 없었다. 온갖 난리를 치며 가까스로 옷 1벌을 입으면 옷이 해지도록 그것만 입고, 본인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세자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을 폭행하거나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렇다 보니 나인들과 내관들이 무서워서 세자의 옷 입기 시중을 기피하게 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세자빈인 혜경궁 홍씨가 세자에게 의복을 갈아입히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그런 혜경궁조차 영조에게 제대로 얘기를 못했다며 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눈알이 빠질 뻔 했다! 이 사건으로 홍씨는 며칠 동안 앞도 못 보고 바깥 출입을 못할 정도로 흉하게 부은 눈으로 있어야 했다. 결국 세자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 박빙애(경빈 박씨)가 세자의 옷 시중을 들었는데, 1761년 1월 옷 입기 시중을 들던 중 세자가 빙애를 때려 죽였다. 세자는 빙애가 낳은 아들 은전군을 들어다 연못에 던진 적이 있다. 야사에 갓 돌 지난 아기였던 은전군은 그대로 죽을 뻔했지만, 의붓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 측근의 호위병들이 뛰쳐나가 꺼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경언이라는 사람이 세자 주변 사람들이 숨기려던 세자가 빙애를 죽인 일과 여러 일을 영조에게 고했다. 영조는 무엄하다며 나경언을 다음날 사형시켰다.
영조는 다음과 같이 세자를 혼냈다.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2번째 기사.
세자는 나인을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로 곁에 두었다.
'의관(衣冠)을 갖추면 아버지를 찾아 뵈러가야 한다'는 사고가 강박증으로 발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영조에게 심한 질책과 핍박을 받은 나머지 정신이 크게 피폐해진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큰아버지인 경종은 그나마 나아서 생모(희빈 장씨)가 사사되기 전까진 숙종의 총애를 받았고 사사 이후 아버지가 싸늘하게 변하여 행동도 조심해야 했지만, 숙종도 영조처럼 노골적으로 경종을 학대하진 않았다. 질책이 일시적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변하고 어릴 때부터 받아온 학대의 규모를 보면 세자의 강도가 더 심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이러한 사도세자의 황폐해진 정신상태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鬱火)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
나는 한 가지 병(病)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6년 2월 29일 21세 때 사도세자의 편지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虛荒)되고 미친 듯합니다.
웃대궐을 수구(水口)로 가옵신다 하야, 가시다가 못 가옵시고 돌아오시니 이는 윤 5월 11일 ~ 12일 간이라. 그러할 즈음에 황망한 소문이 보태어서 아니 나리오. 낭자자(狼藉藉)하니 앞뒤로 일이 다 본심으로 하옵신 일이 아니건마는 인사나 정신을 놓으셨을 때는 화를 내시며 하시는 말씀이 "병화(兵火)로 어떻게 할까보다", 검을 끼고 가 어떻게 하고 싶다 하오시니 한푼이라도 상정(想情)이 있으시면 어찌 이러시리오.
『한중록』
그 외에 영조실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외모나 생각, 됨됨이가 고조부인 효종과 매우 닮았다고 한다. 일단 덩치가 어지간한 장수들보다 훨씬 큰 것부터, 문(文)보다 무(武)를 더 좋아했다고도 하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났다. 이보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인 고종실록에서는 그를 일컬어 "얼굴에 표정이 없고 엄숙(嚴肅)하여 신하들이 영조보다도 더 두려워했으며, 백성에게는 자애(慈愛)로웠다"고 한다. 실제로 세자가 평양부로 갔을 당시 백성에게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국방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언급되어 있다.
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볼 때,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은 크다. 외방에 나가면 스트레스의 원인인 영조에게서 멀어졌다는 해방감에 정신 이상 증세는 완화될 수 있고, 지방에 사는 관리들과 백성들이야 세자에게 강박관념이나 위협을 주는 대상이 아닌 만큼 너그럽게 대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2014년에는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이 한중록을 분석한 결과, "한중록의 내용을 볼 때 사도세자는 양극성장애(조울증)의 증상에 해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는 현대의 정신건강의학 지식이 없이 허구로 지어냈다고 보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한중록에 나오는 사도세자의 묘사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연구 결과다. (본문에서 인용한 글의 Lee DI은 물론 '이덕일'을 의미한다.) 양극성장애라면 기분 삽화 사이 사이에 정상적인 정신건강상태를 회복하는 기간도 있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광증을 보이면서도 때때로 정상적인 판단을 했다는 기록과도 모순되지가 않는다.
"한중록은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친정 홍씨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기록한 것이므로, 내용이 왜곡되었을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Lee DI. The world dreamed by Prince Sado. Goyang: Wisdomhouse;2011. p.53-54.) 하지만 한중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신병적 증상에 들어맞는 내용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정신 증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술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접근 가능한 역사적 자료의 양이 부족하여 자료 수집에 제약이 많았고, 이로 인해 근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연구의 가장 큰 제한점이다. 또한 연구자가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중록을 살펴보면 증상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상세하고 구체적이어서, 현대의 정신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허구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해당 논문 9페이지
의대 교수들이 보아도 한중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정신질환 증상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최소한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을 당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였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를 놓고 보았을 때,기분이 양극성장애 I형과 양극성장애 II형의 구분이 어려울지 언정 조증과 우울증을 왔다갔다 했거나 혼재성 삽화일 때 궁비와 환시를 죽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증은 병식을 인식하기 매우 어렵다.
또한 관서행과 임오화변 당시 나경언의 고변 내용을 보면, 세자는 유람과 사치에 열중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자는 연회와 아랫사람들에게 주는 하사품 구입 등에 많은 돈을 썼고, 이 때문에 세자궁(동궁)의 예산이 텅텅 비어서 시전 상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야 했다. 나중에 이를 안 영조는 세자한테 크게 화를 내며 질책하고, 국고로 상인들에게 돈을 갚았다.
임오화변
1762년, 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정말로 최극단에 달하여, 나중에는 그의 비행들을 알고 광분한 영조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때 세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꿇어앉아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 영조를 '아버님'이라고 강조해 "글도 잘 읽고 다 시키는 대로 잘 할 테니 이러지 마시라"는 아들의 절규와 신하들의 만류, 세손의 간청들에도 영조는 끝까지 아들을 용서하지 않고 자결을 명했다. 영조는 세자가 자결하려는 것도 신하들의 제지로 소용이 없자 격분해, 신하들과 세손을 강제로 끌어내고, 세자를 폐서인하며 쌀 담는 뒤주 속에 가두어 버렸고, 세자에게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했다. 뒤주 속에 가둬진 세자는 결국 8일 만에 갈증과 굶주림 속에 생을 마감했다(갈사). 특히 영조는 아들만 죽인게 아니라 아들의 측근들마저 처형해 버렸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항목 참고.
3.6. 장례
처음엔 묘가 양주 배봉에 있었으며, 세자의 예에 따르지도 않고 잡초가 무성히 많았던 초라한 무덤이었다. 초라하기만 한 게 아니고, 돌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버려진 무덤 꼴이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흉지(凶地)로 손꼽히던 곳이라,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에 만드는 것에 신하들이 반대한 것을 영조가 강행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묫자리는 자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던 걸 생각하면, 영조가 사도세자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68년 배봉산의 옛 사도세자 무덤 자리에서 처음 이곳에 사도세자를 매장할 때 함께 묻은 세자의 청화백자 묘지석이 발굴되었는데,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화산(華山)으로 옮길 때 같이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묘지석 자체는 1991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공개되었으며, 묘지문의 제목은 '어제지문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御製誌文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라 해서 영조 자신이 지은 것이다. 세자가 처음 태어났을 때 세자가 읽을 책을 국왕 자신이 몸소 필사(筆寫)했었다는 점과 함께 놓고 보면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御製誌文
어제지문
有明朝鮮國思悼世子墓誌
유명 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思悼世子諱愃字允寬 臨御十一年歲乙卯正月二十一日誕生 卽暎嬪所誕也
生而穎悟 及其長也 文理亦通 其有朝鮮庶幾之望 嗚呼 不學聖人 反學太甲慾敗縱敗之事 嗚呼 訓諭自省編心鑑便作言敎狎昵群小將至國亡
사도세자의 휘는 훤(愃)이요, 자는 윤관이라. 임어 11년 세차 을묘 정월 스무이튿날 탄생하니 곧 영빈(暎嬪)이 낳은 바이라.
나면서 영오(穎悟)하고 급기 자라니 문리(文理) 또한 꿰뚫어 그는 거의 조선의 바람이러니라. 아아, 성인(聖人)을 배우지 아니하고 도리어 태갑(太甲)의 욕패함과 종패한 일을 배우도다. 아아, 자성편(自省編)과 심감(心鑑)을 훈유(訓兪)하나 제멋대로 언교(言敎)를 짓고 군소(群小)와 압닐(狎昵)하니 장차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니라.
噫 自古無道之君 何限 而於世子時若此者 予所未聞 其本生於豐豫 不能攝心 流於狂也 夙夜所望若太甲之悔悟 終至於萬古所無之事 使白首之父 作萬古所無之事乎 嗚呼 所惜者其姿 所歎者述編 嗚呼 是誰之愆 卽予不能敎導之致 於爾何有 嗚呼十三日之事 豈予樂爲 豈予樂爲 爾若早歸 豈有此諡
아, 예로부터 무도(無道)한 임금이 얼마리오, 그러나 세자 때에 이와 같다는 이는 내 아직 미문(未聞)인 바이라, 그는 본디 넉넉하고 편안히 태어나나 능히 섭심(攝心)하지 못하니 미치광이(狂人)로 흐르더니라. 숙야로 태갑(太甲)의 후오(悔悟)를 바라는 바이나, 마침내 만고에 없은 바의 일에 이르러, 백수(白首)의 아비로 하여금 만고의 없은 바의 일을 일으키게 하느뇨? 아아, 애석한 바는 그 자태요 한탄하는 바는 술편(述編)이라. 아아, 이는 뉘 허물인고 하니 곧 내 능히 교도(敎導)하지 못한 소치일지니 네게 무엇이 있으리오? 아아, 열사흗날의 일 어찌 내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 즐기어 하였으랴. 네 만약 일찍 돌아왔으면 어찌 이 시호가 있었으랴.
講書院多日相守者 何爲宗社也 爲斯民也 思之及此 良欲無聞 逮至九日聞不諱之報 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 至此不忍呼寫 歲玄黓敦牂月夏五閏而卽二十一日也 乃復舊號特賜諡曰 思悼 嗚呼 近三十年爲父之恩義伸于此矣 此豈爲爾 嗚呼 辛丑血脈之敎 今只有世孫 寔爲宗國之意也 七月二十三日葬于楊州中浪浦酉向原 嗚呼 無他施惠賜嬪號曰 惠嬪於斯盡矣 此非詞臣代撰者 故臥而呼寫 表予三十年之義 嗚呼 思悼將此文而無憾于予矣
강서원(康庶院)에서 여러 날 서로 지킴은 어찌 종사(宗社)를 위함이요, 이 백성을 위함이리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들음이 없고자 하였거늘, 아흐렛날에 이르러 꺼리지 못할 보고를 들었노라. 네 무슨 마음으로 일흔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만나게 하느뇨. 이에 이르니 참지 못하여 불러 베끼노라. 해는 현익돈장(玄黓敦牂)[임오(壬午)]이요 여름 윤5월하고 곧 스무하룻날이라. 이에 다시 옛 호(號)를 회복시키고 시호를 특사(特賜)하며 가로되 사도(思悼)라 하노라. 아아, 서른 해에 가까운 아비의 은의(恩義)가 이에 펴짐이니 이 어찌 너를 위함이리오? 아아, 신축(辛丑)의 혈맥을 가르침이 지금은 다만 세손이 있으니 참으로 종국(宗國)을 위한 뜻이니라. 7월 스무사흗날 양주 중랑포 유향(酉向)[서쪽] 벌에 매장하노라. 아아, 다른 시혜(施惠) 없이 빈에게 호를 내리며 가로되 혜빈(惠嬪)이라 하며 이에 다하노라. 이는 신하가 갈음(喝吟)하여 지음(至吟)이 아니요 누워서 불러 베끼게 하여 내 서른 해의 의리를 나타내노라, 아아, 사도(思悼)는 장차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섭섭해 하지 말지어다.
壬戌入學 癸亥行冠禮 甲子行嘉禮 娶豐山洪氏 卽領議政鳳漢之女 永安尉柱元五代孫 嬪誕二男二女 一懿昭世孫 一則世孫 嘉禮于淸風金氏 卽參判時默女 府院君五代孫也 長女淸衍郡主 次女淸璿郡主 側室亦有三男一女矣 崇禎紀元後百三十五年壬午七月日
임술(1742)에 입학하고 계해(1743)에 관례를 행하고 갑자(1744)에 가례를 행하여 풍산 홍씨를 아내로 하니 곧 영의정 봉한의 딸이요. 영안위 주원의 5대손이라. 빈(嬪)은 2남 2녀를 낳으니 하나는 의소세손이요 하나는 곧 세손이라. 가례는 청풍 김씨 즉 참판 시묵의 딸과 하니, 부원군의 5대손이라. 장녀는 청연군주고 차녀는 청선군주라. 측실 또한 3남 1녀라. 숭정기원후 135년(1762) 임오 칠월 일
이뿐만 아니라 영조는 사도세자의 발인(發湮)에 손자인 정조가 참석하는 것을 허락해주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신하들이 상소를 올렸지만 영조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결국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만봐야 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마지막 배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날을 사관은 이렇게 비판한다.
"장례의 절차는 예법의 가장 큰 것이니, 제왕가(帝王家)의 예가 필부(匹夫)나 서인(庶人)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 폐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세손이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효성(孝誠)은 마땅히 어른과 차이가 없으니, 황인검의 상소는 가히 예의 바른 도리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성상(聖上)께서 한 번 곡(哭)하고 영결(英結)하는 것도 허락지 않아 지극한 정리(情裏)를 조금도 펴지 못하게 했으니, 그 흠결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영조 100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7월 13일(계유) 1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