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식민지 역사소설에는 역사가 없다 -윤백남의 '홍도의 반생'
2014.05.17 : 07 :00 :54

◀ 윤백남이라는 작가가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의 원고료를 받는 작가 중 하나였으며, 한 번에 수백 명의 청중을 동원할 정도로 이름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연극, 영화, 라디오 드라마 등 조선의 모든 대중매체에는 윤백남이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한마디로 윤백남은 식민지 조선 최고의 대중작가였다. 윤백남이 이처럼 대중에 매달렸던 것이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생 내내 그의 삶을 지배해온 아버지 윤시병의 그늘이었다.
윤백남의 아버지 윤시병은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는 구한말 친일단체 ‘일진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여기까지 보자면 윤시병은 분명히 민족의 반역자이며 친일파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역사라는 것은, 또한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처럼 단순하게 전개되지는 않는다. 윤시병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고종황제의 신하였다. 또한 윤시병은 독립협회 회원으로서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며 고종황제에 맞선 인물이었으며 일만여 명의 민중을 이끌고, 평등한 조선, 자주적인 조선을 이루려 한 급진적 혁명가이기도 했다.
황제의 신하에서 반정부인사로, 여기서 다시 급진적 혁명가로 변모하였다가 마침내 친일파가 된 윤시병의 삶의 여정. 여기에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구한말 조선의 현실이 있었다. 그래서 윤백남의 삶은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일본에 대항하기에는 친일파 아버지가 목덜미를 잡고 있었고, 친일로 나가기에는 조선의 독립과 자주를 꿈꾸었던 또 다른 아버지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딜레마 속에서 윤백남은 ‘흥미위주’의 대중소설로 향한다.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 발언하기보다는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 것이다. 대중역사소설 ‘홍도의 반생’(1935)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정유재란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연약한 조선 여인 홍도는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정조를 유린당한다. 홍도의 가혹한 운명을 통해서 소설은 자연스럽게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구도로 전개된다. 정유재란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었고 이 전쟁으로 인해서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홍도의 반생’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해 군사를 파병한 명나라가 오히려 조선의 적으로 설정되고 있다.

☜ 윤백남 선집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2013년 04월 01일 출간 )
‘홍도의 반생’이 발표된 시기는 일본이 아시아의 새로운 제국을 꿈꾸며 중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이처럼 긴박한 식민지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막강한 대중동원력을 지닌 대중소설의 역할과 운명이란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윤백남만 그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물론 윤백남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식민지 대중소설의 운명만이 아니었다. 진흙탕 속에서는 모두가 진흙을 몸에 묻힐 수밖에 없듯,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는 어떠한 ‘침묵’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평범한 사실 역시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근대적 조선을 이루기 위해 구한말의 혼탁한 정치적 현실에 부딪히고 부딪히다가 친일로 도달했던 아버지 윤시병과 달리 윤백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친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에 대해 침묵을 선택한 식민지 지식인 윤백남이 처한 비극적 운명이었으며, 불합리한 현실에 입을 다무는 모든 지식인들이 마침내 직면하게 될 운명이기도 하다.
정혜영 대구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사
출처 / 매일신문[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