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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3 비구란 무엇인가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517
<아비담맛타상가하> 7장 범주의 모음(사뭇짜야 상가하 samuccaya-saṅgaha)
연습문제 65번.
65-1 “무엇을 발라(bala)라고 하는가?” 발라는 장군이란 뜻입니다. 장군은 적과 마주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떨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병졸들은 떨고 두려워하고 흔들리는데 장군은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장군이라고 한답니다. 그래서 발라라고 하면 힘센 장사, 장군 이런 뜻입니다. 아주 굳건하고 튼튼한 것을 발라라고 합니다.
발라는 몇 개죠? 삿다(saddhā. 신심), 위리야(vīriya. 노력), 사띠(sati), 사마디(samādhi. 집중), 빤냐(paññā), 히리(hirī. 불선업을 부끄러워하는 것), 옷땁빠(ottappa. 불선업을 두려워하는 것), 아히리까(ahirika), 아놋땁빠(anottappa) 모두 9개입니다. 불선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선업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이것도 발라가 되는군요. 악함도 힘이 세지면 겁날 게 없는 거죠.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것, 솔직히 전쟁터에서 장군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는 것도 아히리까, 아놋땁빠죠. 사실 전쟁을 한다는 게 도마낫사(domanassa. 불쾌함)로 도사(dosa. 성냄)로 비야빠다(byāpāda. 악의)로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게 전쟁인데, 그때의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이것도 발라입니다. 이것도 힘센 발라가 됩니다. 이것도 불선업으로 완전히 무장되면 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힘 세집니다. 악당들이 악마들이 지옥에 갈 존재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게 되죠.
좋은 발라 일곱 개, 안 좋은 발라 두 개입니다. 좋은 것들은 신심, 노력, 사띠, 집중, 지혜, 부끄러움을 아는 것, 두려움을 아는 것, 좋은 힘입니다. 안 좋은 힘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두려워할 줄 모르는 것.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생각을 잘못하면 불선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범부는 아주 무서운 상태입니다. 범부는 미친 것과 같다고 합니다. 범부 어떻게든지 자기 생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왜곡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왜곡할 수 있습니다. 아히리까, 아놋땁빠로 발라가 될 수 있습니다.
65-2 "어떤 마음은 발라가 되지 않는가?"
문단 번호 26번.
26. Pañcaviññāṇesu jhānaṅgāni, avīriyesu balāni, ahetukesu maggaṅgāni na labbhanti.
“아위리예수 발라니(avīriyesu balāni)”, 위리야가 없는 마음 16개는 발라가 될 수 없다. 힘이 세질 수 없다는 거죠. 위리야가 없는 마음이 16개가 뭐죠? 아헤뚜까(ahetuka. 원인 없는 마음) 18개 중에서 아라한의 미소 짓는 마음과 의문전향 마음 두 개를 제외한 나머지 16개 마음에는 위리야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발라가 될 수 없는 마음이
문단 번호 27번
27. Tathā vicikicchācitte ekaggatā maggindriyabalabhāvaṃ na gacchati.
“위찌낏차(vicikicchā. 의심) 마음 안에 있는 에깍가따(ekaggatā)”는 발라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의심은 결정 내리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 안에 “에깍가따(집중)”라는 마음부수가 있는데 이것은 발라가 되지 못합니다. 힘이 없습니다. 집중이 있긴 있는데 떨리지 않는다든지 하는 힘이 없다는 거죠. 있긴 있는데 집중은 하는데 위리야가 없는 마음이므로 힘이 없습니다. 아헤뚜까에서 16개 그리고 의심 안에 있는 집중이라는 마음부수도 힘이 없다. 있긴 있는데 힘이 없다는 거죠.
65-3. 발라의 이름과 본질(빠라맛타)을 쓰세요. 발라 9개 적어야죠. 문단번호 19번을 보면 됩니다.
19. Nava balāni – saddhābalaṃ vīriyabalaṃ satibalaṃ samādhibalaṃ paññābalaṃ hiribalaṃ ottappabalaṃ ahirikabalaṃ anottappabalaṃ.
발라 9개 다 적으시고 그리고 그것의 본질도 사마디를 제외한 나머지 8개는 그대로 적으시면 됩니다. 사마디라는 마음부수는 없으니까 사마디의 본질은 에깍가따라고 적어야 합니다.
65-4. "무엇을 아디빠띠(adhipati)라고 합니까?"
‘아디빠띠(adhipati)’는 "아디낭(adhīnaṃ)" - “자신과 연관된 담마들의”, “빠띠” -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자신과 함께하는 담마들의 주인, 연관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하나, 만약에 네 가지가 함께 움직인다면 그중에서 하나가 주인이죠. 주인이 여러 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여러 명이 있지 않은 것처럼, 장관과 대통령이 있으면 장관은 아디빠띠가 안 되고 대통령은 아디빠띠가 되는 거죠. 자신과 연관된 담마들의 주인이 아디빠띠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89개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쓰는 마음은 몇 개입니까? 아꾸살라(akusala. 불선한) 마음 12개 아헤뚜까(ahetuka. 원인 없는) 마음에서 미소 마음 1개 제외하면 17개, 그리고 꾸살라(kusala. 선한) 마음 8개, 재생연결할 때의 과보심 1개, 모두 38개가 우리가 쓰는 마음의 전부이죠. 38개 중에서 12개는 불선업의 마음이고 17개는 아무런 힘도 없이 있어도 의지 없이 무의식 상태에서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들이죠.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할 필요도 없고 그냥 자동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마음 17개, 그리고 8개는 욕계 선업의 마음이죠. 8개는 우리가 지을 수 있는 선업의 마음입니다. 과보 마음 1개는 바왕가 마음으로 자고 있을 때, 멍청하게 있을 때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나머지 89개 중에서 38개를 제외한 51개 마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죠. 38개 마음만 잘 쓰고 가면 되지요.
65-8. “네 가지가 동시에 아디빠띠가 될 수 있는가?”
아디빠띠는 찬다(chanda. 서원), 위리야(vīriya. 노력), 찟따(citta. 선업이든 불선업이든 업을 짓는 마음), 위망사(vīmaṃsā. 궁리) 모두 네 개이죠. 찬다는 서원인데, 불선업을 이루고 싶은 마음 10개도 여기에 들어가는 거죠. 불선업 마음 10개도 아디빠띠가 됩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은 탐심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5욕락을 원하는 마음은 탐심(lobha-mūla-citta) 8개에 들어가고 선업을 짓고 싶어 하는 마음, 좋은 일 하고 싶어 하는 마음, 이것은 선업의 마음, 꾸살라 찟따(kusala-citta)에 들어갑니다. 뿐냐끼리야왓투(puñña-kiriya-vatthu), 재가자들의 10가지 선업. 이걸 이루고 싶어 하고, 선정을 얻고 싶어 하고, 수행을 하고 싶어 하고, 내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싶어 하는 마음들은 선업에 들어가죠. '하고 싶은' 것은 똑같은데 5욕락을 채우고 싶어 하는 것과 선업을 짓고 싶어 하는 2가지가 [불선업과 선업으로] 가져오는 결과가 다릅니다.
그런데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 열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위빳사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좀 전에 말한 2가지, 나쁜 업을 짓고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좋은 업을 짓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다른 길입니다. 하나는 아꾸살라 찟따(불선 마음) 12개 중에서 탐심 8개, 5욕락을 채우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5문으로 들어오는 대상을 내가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은 거죠. 남들보다 더 좋은 거 갖고 싶고, 있는 데 이것 말고 더 좋은 것 갖고 싶고, 새로운 데 놀러가고 싶고, 봐서 듣고 냄새 맡아서 기분 좋고 싶은 이런 거는 아꾸살라 찟따입니다. 그렇지 않고 보시를 하고 싶고 계를 더 정확히 지키고 싶고 수행을 하고 싶고 마음을 청정히 하고 싶은 마음들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선업의 마음들이죠.
그것 말고 위빳사나를 해서 열반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 이것은 좋은 결과도 나쁜 결과도 가져오지 않습니다. 둘 다 가져오지 않습니다. 선업과 불선업 모두에서 벗어나게 하는 마음인 거죠. 열반을 성취해서 윤회에서 벗어나면 선업과 불선업 모두에서 벗어납니다.
<상윳따 니까야>에 ‘걸식자 경(S7:20. Bhikkhaka-sutta)’이 있습니다. ‘Bhikkhaka’는 ‘밥을 구걸하는 사람’입니다. Bhikkhu는 ‘번뇌를 파괴하는 자, 윤회의 위험을 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빅카까(Bhikkhaka)라는 제사장 신분의 한 사람이 어느 날 붓다께 다가갔습니다. 붓다께 다가가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인사를 나누고 나서 제사장 신분으로 탁발해서 살아가는 '빅카까'라는 사람이 부처님께 묻습니다.
“고따마여, 나도 구걸해서 얻어먹는 사람이고, 그대도 구걸해서 얻어먹는 사람인데, 같은 우리 서로 같은 비구 아닙니까?”
부처님이 게송으로 대답하셨습니다.
“Na tena bhikkhako hoti,
yāvatā bhikkhate pare;
Vissaṃ dhammaṃ samādāya,
bhikkhu hoti na tāvatā.
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itvā brahmacariyaṃ;
Saṅkhāya loke carati,
sa ve bhikkhūti vuccatī”ti.
출처 : https://m.cafe.daum.net/mobuddhism/SF2R/214?listURI=%2Fmobuddhism%2FSF2R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걸해서 먹는다고 다 비구라고 부를 수 없다.
불선업을 행하고, 독이 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 한은 그를 비구라고 할 수 없다.
선업도 불선업도 다 제거하고 팔정도를 닦는 존재,
8정도를 닦는 것, 위빳사나 지혜로 세상에서 사는 자, 그를 진정한 비구라고 부른다."
여기서 '8정도를 닦음'은 원문이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ā'입니다. 보통 청정범행이라고 번역하는데, 브라흐마짜리야는 쉽게 말해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 팔정도를 닦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걸해서 먹는다고 다 비구가 아니고 선업도 짓지 않고 불선업도 짓지 않고 8정도 즉 위빳사나를 수행하고 있는, 그래서 위빳사나 지혜로 세상을 사는 존재 그가 진정 비구입니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에 [윤회를 지속시키는] 선업도 짓지 않고 불선업도 짓지 않고(puññañca pāpañca bāhitvā) 위빳사나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위빳사나, 사띠빳타나 수행의 사띠를 하면 선업도 불선업도 짓지 않게 됩니다.* 사띠도 선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띠가 선과 불선으로 굳이 나누자면 선이겠으나, 여기 분명히 '선업도 짓지 않고 불선업도 짓지 않고 청정범행 즉 팔정도로 위빳사나를 하는 존재. 그리고 위빳사나 지혜로 세상을 보는 존재가 진정한 비구이다.'라고 나옵니다. 윤회를 끊어 내려면 불선업은 당연하고 [윤회를 지속시키는] 선업도 짓지 않아야 늙음과 죽음이라는 시체에 화장을 하며 아름답다고 속는 것과 같은 행복에서 빠져나와 고성제를 철저히 앎과 동시에 진정한 행복, 열반을 맛봅니다.
이렇게 대답하시자 이 빅카까가 부처님께 “정말 놀랍습니다. 이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제자로 삼아주십시오.” 이렇게 하고 그날부터 제자가 됐답니다.
찬다(서원)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은 선업에서조차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선업도 짓지 않고 불선업도 짓지 않는 마음입니다. 선업도 짓고 싶지 않고 불선업은 당연히 두려워합니다. 불선업은 당연히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니까 짓고 싶지 않고, 선업을 지어도 선업의 결과로 좋은 것만 오는 게 아니라 안 좋은 것도 같이 오죠. 안 좋은 것도 같이 온다는 걸 압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좋은 조건일지라도 각자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 조건에서 오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구나. 여기서도 벗어나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찬다입니다.
선업도 불선업도 짓지 않고, 제3의 전혀 다른 최상의 무언가를 치열히 하는 것.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죠. 붓다가 출현했을 때만 고귀한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방법도 분명히 있고, 방법을 알 수 있고, 붓다가 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없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마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편집자 주]
* <깨달음의 구성요소 경>(A4:236)에는 칠각지가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즉, 출세간 도의 지혜와 번뇌가 함께하지 않는 위빳사나 지혜가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에 해당한다.
편집: 담마삐야
* 2023-07-03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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