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창밖으로
윤향기
덩커덩덜커덩 짐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신다
초르텐이 지나가신다
어린 라마가 야크 똥을 굴리며 지나가신다
풀 뜯는 검은 야크의 방울 소리가 지나가신다
손바닥이 다 헤지도록 배밀이를 하는
오체투지의 간절함이 지나가신다
양 떼를 몰며 달라이라마가 지나가신다
진흙으로 만든 전신 주위로 낮달이 지나가신다
전신주에 세든 새들의 발자국이 지나가신다
내 젖꼭지를 만지며 잠들던 사내의
동안거 같은 초막이 지나가신다
털북숭이 유목 사내의 팔에 안기어 주렁주렁
아이 낳고 살았던 전생이 지나가신다
사랑했던 날들이 흐드러지게 지나가신다
사랑했던 날들을 잊고 살았던 날들이 망설임 없이
지· 나· 가· 신· 다
모래바람 속의 세세생생을 이고 지고
붓다가 지~나~가~신~다
타블라라사*에 족적을 남긴 흉노,
코로나19에게 곤장 일 겁 대!
가문도 없는 천한 것이 어찌 감히 동거를 꿈꾸었다더냐
* Tabla rasa: 글자가 적혀 있지 않은 서판
오늘! 내가 사랑한 선물
꼬끼오~~~! 무안에서 맞는 알람. 풋풋한 아침이 정겹게 청량하다. 멍멍~~~멍이와 남이가 기지개를 켜고 노랭이가 야옹 하는 소리는 비발디의 사계보다 다채롭다.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간다. 야옹이와 멍멍이가 줄레줄레 따라온다. 늘 열려 있는 대문을 지나면 바다정원이다. 갈 곳 잃은 안개의 띠가 수평선을 타고 천천히 오르내린다. 안개 속에서 살며시 얼굴을 내미는 해. 두 팔 벌려 온몸에 황홀한 햇살 샤워를 받는다. 시원하게 마시는 한 호흡이 달디달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하지 않고 나를 위해 피아노 반주를 멈추지 않는 파도. 뚝 길을 걷다가 모래사장으로 내려서서 파도의 맨 가장자리의 도·레·미를 지그시 누른다. 때마침 시린 마음을 내다 말리던 갈매기 떼들이 피아노 소리에 놀라 후드득 날아간다. 미안하구먼.
*
반짝거리는 물비늘 사이로 고기잡이배들이 그림처럼 움직인다. 바닷길에서 작은 송림을 지나자 길가에 수국과 패랭이꽃과 풀꽃들이 눈을 맞춘다. 걷다 보면 보인다. 말로는 다 못 하는 그 어떤 깨달음들. 꽃들은 저마다 제 색깔로 미소 지어서 곱고 한가지 꽃보다 서로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니 더욱 아름답다. 저 아름다움을 핥는 바람도 희망이 필요하듯이 우린 누구나 아름다움이 필요하다. 왜일까? 그건 아마도 누구나 아름다움으로부터 왔기 때문일 터. 그렇다면 아름다움 건너편이 허상일까? 아름다움 이쪽이 허상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
두런두런 여름이 논두렁길로 들어선다. 토끼풀 냄새가 훅 풍겨온다. 그중에 제일 튼실한 꽃대 두 개를 꺾어 꽃반지를 만든다. 포릉포릉 포르릉~ 참새들의 웃음소리에 잠시 오수에 빠져있던 벼들이 허리를 곧추세운다. 논바닥을 찰랑찰랑 가득 채우고 있던 허공을 들어 올려 층층 하늘에 쌓아놓고 그 자리에 촘촘하게 대가족을 거느린 벼가 늠름하기만 하다. 밤새 목을 놓고 울어대던 뻐꾸기와 개구리, 맹꽁이는 다 어디로 숨은 걸까? 열여섯 살 소녀의 어린 꿈길에 푸릇푸릇 스며든 걸까? 검정 고무신에 도랑물을 한 움큼 넣고 그 위에, 하늘을 가르며 젖은 몸을 말리는 하얀 꽃구름을 퍼 담는다. 그러고는 후후 불어 키가 커진 구름 꽃을 땅에 심어놓고 그 나무에 기대어 물어본다. 아름다운 나라로 계속 가려는데 검정 고무신으로 달려가도 될까?
*
이 땅에 사계절이 존재하는 건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우뚱 기울어진 까닭이란다. 내가 시의 사계절을 사는 것 역시 나의 자전축이 시로 23.5도 기우뚱 기울어진 것임이 틀림없다. 생각해보니 시와의 만남도 어린 시절 영혼을 살찌웠던 다랑이 물길만큼이나 세월이 웅숭깊다. 이래저래 찌푸린 얼굴 펴고 까닭 없이 실실 웃다가 벌컥벌컥 찬물 한잔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것 또한 시의 덕행이려니….
이젠 좀 천천히 지친 걸음 쉬어가라고 해넘이가 막 시작되고 있다. 저녁 바람이 나뭇잎을 흔든다. 바람에 부딪혀 내는 나뭇잎 소리 같은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 그런 시를 사랑한 만큼 글쎄 나, 자연이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