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곳에서 호젓한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면 강원도 정선 덕산기계곡으로 떠나자. 번잡한 일상을 잊고 오롯이 자연과 나를 마주하기에 맞춤한 깊은 골짜기가 거기 있다. 걷고 사색하고 소박한 밥상으로 허기를 채우는 동안 짧은 하루가 간다.
인적 드문 곳으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문명과 단절된 곳에서 의도된 고립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정선에 가면 그런 산골짜기가 하나 있다. 강원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덕산기계곡이다. 호젓한 숲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책방이 있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하룻밤 묵을 수 있는 농가도 있다. 번잡한 일상사를 벗어던지고 잠시 멈춰 쉬어가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 찾아간 그 골짜기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말한 행복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 스스로 선택한 불편한 삶
덕산기계곡은 화암면 북동리에서 정선읍 덕우리를 잇는 약 12㎞의 물길이다. 주변으론 ‘뼝대’(벼랑의 사투리)라고 불리는, 웅장하게 솟은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굽이굽이 휘돌아나가는 옥빛 계곡물과 진초록으로 빛나는 곳곳의 소(沼)가 빚어낸 절경이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졌다.
2000년대 들어 몇 차례 방송에 소개되며 캠핑족과 오프로드 차량 출입이 늘었고 계곡의 환경 훼손도 심했다. 2014년부터 자연휴식년제에 들어간 계곡은 요즘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쓰레기를 되가져 가는 조건으로 트레킹과 물놀이 정도만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덕산기계곡은 건천이다. 장마 뒤 큰물이 들었다가도 일주일이면 바닥을 드러내고 물이 마른다. 물이 빠진 계곡은 또 다른 운치가 있다.
덕산기계곡에 사람이 몰리는 건 주로 여름 피서철이다. 보석 같은 물색을 즐기러 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그렇다. 계곡은 건천이라 비가 많이 오는 여름을 제외하면 말라붙은 자갈바닥을 허옇게 드러낸다.
물이 빠진 계곡은 또 다른 운치가 있다. 울창한 낙엽송 지대와 너럭바위 사이를 넘나들며 걷기만 해도 수려한 경관에 가슴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없어서 좋다. 숲 우거진 계곡의 원시적 풍경 속에 파묻혀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숲이 우거진 덕산기계곡은 트레킹 코스로 사철 인기다.
찻길이 없던 계곡에 포장도로가 생기면서 예전의 정취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 상류의 약 3㎞ 구간은 비포장 옛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골짜기를 있는 그대로 지키고 싶은 덕산기마을 주민들이 군청과 지역의 개발 논리와 싸워 이긴 결과다. 옛 모습을 간직한 덕산기마을에선 다섯 가구가 스스로 선택한 ‘불편한 삶’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자연과 옛것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덕산기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 숲속책방의 매력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차를 세우고 울퉁불퉁한 자갈길로 걸어 들어갔다. 휴대전화 안테나가 사라졌다. 계곡에선 딱 한 개 통신사만 전화가 터진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전화기를 가방에 넣고 주변 풍경에 눈을 돌렸다. 막 봉오리를 열기 시작한 물매화가 눈에 띄었다.
비포장도로를 2㎞ 가까이 걸어야 만나는 숲속책방 간판이 반갑다.
1㎞쯤 계곡을 거슬러 오르니 ‘숲속책방’이라고 쓴 나무 간판이 보였다. 책방 개 ‘동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먼저 뛰쳐나와 짖었다. 책방 문 옆에는 덕산기의 사계절을 노래한 시구가 적혀 있었다.
“그대 덕산기에 오시려거든/ 물매화가 꽃대를 밀어올리기 시작할 무렵/ 빈마음으로 오시라/ 혹여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분기해 있다면/ 애기단풍 붉고 쪽동백 노랗게 물드는 시월/ 마음 또한 노랗고 붉어지러 오시라”(강기희, ‘덕산기에 오시려거든’)
숲속책방 마당의 정자 의풍정
가깝고 편한 것만 찾는 시대에 책 한 권 사러 굳이 깊은 숲속 골짜기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불편함과 희소성을 부러 찾는 사람도 있는 법. 서점은 재방문율이 아주 높다고 한다.
둘러보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널따란 책방 마당 한쪽 ‘의풍정(義風亭)’ 현판을 단 정자에 앉아 물 흐르는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책방 옆엔 커피와 차를 파는 찻집도 붙어 있다.
책방 앞에서 커피와 함께 느긋하게 독서를 즐기는 강기희, 유진아 부부
숲속책방은 소설가 강기희(55), 동화작가 유진아(59)씨 부부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덕산기는 강 작가가 10대조부터 뿌리내리고 살던 고향이다. 교사로 정년퇴임한 유 작가와 함께 고향에 내려와 산 지 2년이 됐다. 소장하던 책 1만권을 수납하려고 지은 창고가 그대로 책방이 됐다.
서가엔 두 사람의 작품을 포함한 문학작품부터 인문학 서적까지 빼곡하다. 강 작가는 가끔 손님이 많을 때 자신이 쓴 소설 <연산>을 토대로 1인 가면극을 선보이기도 한다. “첩첩산중에 문화를 더해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위안이 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포부다.
책방 곁에는 부부의 살림집이 있고 그 끝에 작은 찻집이 딸려 있다.
찻집 창문으로 펼쳐지는 숲 풍경이 싱그럽다.
숲속책방 맞은편에는 ‘트래블러 하우스 너와집’ 간판이 붙어 있다. 그 아래 ‘그리움과 혼숙하는 밤’이라는 문구도 눈길을 끈다. 집주인 전한식씨(55)는 서울의 한 대기업에 27년간 다니다 정리하고 지난해에 덕산기계곡으로 거처를 옮겼다. 은퇴하면 시골에서 사는 게 꿈이라 주말마다 등산을 다니면서 살 곳을 찾았는데, 처음 덕산기계곡에 발을 들인 순간 ‘바로 여기다’ 싶더란다.
은퇴하고 귀촌한 전한식씨는 너와집에서 강아지 ‘덕산이’와 함께 산다.
그의 시골살이는 단순하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귀리와 우유로 아침을 해결하고 취미생활 하듯 고추, 팥, 열무, 복숭아 등을 심은 텃밭을 가꾼다. 작업복은 회사 다닐 때 입던 와이셔츠 그대로다. 밀짚모자와 긴 장화가 그나마 농사꾼 티를 낸다. 종일 휴대전화 들여다볼 일은 거의 없다. 가끔 가족단위로 받는 민박 손님을 제외하면 그의 일상은 고요 그 자체다. 혼자 사는 게 무섭지 않냐는 우문에 현답이 바로 나온다. “제일 무서운 게 사람인데, 그렇게 치면 도시가 훨씬 무섭죠.”
■ 계곡에서 보낸 밤
너와집에서 상류로 200m쯤 더 올라가자 언덕배기에 게스트하우스 ‘덕산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덕산터는 덕산기의 옛이름이다. 이름답게 강원도의 전통 농가 주택을 원형 그대로 살려 숙박을 제공한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데우는 온돌방은 작고 아늑하다. 어느 절집의 해우소를 본떠 만들었다는 통나무 화장실에서는 일을 본 뒤 재를 뿌려 덮는다.
집 옆의 텃밭엔 수박이며 배추가 자라고 있고 한쪽엔 계곡을 내려다보는 근사한 정자와 작은 폭포도 있다. 마당에 걸린 빨랫줄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거미가 매달려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었다. 뒷산에서 따왔다는 산머루를 씹으며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는데 질리지가 않았다.
계곡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게스트하우스 덕산터. 덕산터는 덕산기의 옛이름이다.
덕산터는 연극배우 최일순씨(52)의 집이다. 2000년 계곡에 들어와 집을 꾸미고 가끔 지인들을 초대하며 별장처럼 머물렀다. 지난해부터 에어비앤비에 숙소를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손님을 받고 있다.
최씨는 20대 때부터 100개국 가까이 돌아다닌 오지 전문 여행가다. 게스트하우스 간판과 마당에 걸린 오방색 깃발은 그가 가장 많이 드나들었던 티베트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히말라야 롯지(오두막 형태의 숙소)처럼 꾸민 티베트방은 나무침대 서너 개와 함께 그가 여행지에서 가져온 조각과 그림 같은 기념품과 직접 찍은 사진들이 빼곡히 장식돼 있어 이국적인 느낌이 났다.
히말라야 롯지처럼 꾸민 티베트방
강원도 농가주택을 그대로 살린 게스트하우스 덕산터의 온돌방
20여년 전 덕산기계곡에 처음 왔을 때 최씨는 인도의 계획도시 찬디가르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곳에서 본 자연을 활용한 천연 요새 같은 극장처럼 덕산기계곡 곳곳을 무대 삼아 밤에는 횃불공연을 하고 작은 음악제·연극제를 수시로 열고 싶었단다. 그 계획은 아직도 추진 중이다.
덕산터에선 주인장이 에티오피아에서 구해온 원두를 현지식으로 볶아 내려주는 커피를 판다. 서너 명 이상 모여야 되고 한 잔 마시는 데 족히 두 시간은 걸리지만 해 볼 만한 경험이다. 그때그때 준비되는 간단한 산촌 안주에 막걸리도 판다. 숙박 손님은 저녁과 아침 식사도 청할 수 있다.
덕산터에서 차린 저녁식사 자리에 마을 식구들이 모였다.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 나누는 동안 계곡에 밤이 찾아왔다.
떡국과 간단한 반찬을 곁들인 덕산터의 아침상
두부찌개에 멸치볶음, 감자조림 등 소박한 밥상으로 저녁을 먹고 혼자서 골짜기를 걸었다. 불빛 하나 없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보름에 가깝게 차오른 달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손전등 없이도 길이 훤했다. 삐죽삐죽 솟지 않고 평평해서 꼭 기와집 지붕 같은 산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귀뚜라미, 쓰르라미 우는 소리만 계곡에 요란했다. 자연에 폭 안긴 밤이 그렇게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