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마르코 6,1-6
부모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떻게 될까?
‘유퀴즈’에서 이천 시골에 사는 한 어머니(이정숙 씨)의 사연에 진행자들도 눈물을 참지 못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살던 어머니는 시골에 사는 한 남자의 끈질긴 구애 끝에 시골로 시집옵니다.
친정어머니는 딸을 시골로 보낼 수 없다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서울로 올라와 살 것이라는 사위의 말을 듣고 시골로 시집보낸 것입니다.
자신에 셋째가 부모를 모실 필요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자기 형이 다리에 장애가 있고 아이들이 일곱이라 지금 자기가 분가해서 밖으로 나가면 시어머니, 시아버지, 조카들까지 다 업신여김받고 살기 어려울 것이라 하여 조카들 클 때까지만 함께 시골에 살자고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의 효심에 그러자고 하였고 지금까지 평생을 시골에 살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살면서 힘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부패한 백신을 맞아 오히려 결핵에 걸려 아이를 업고 여섯 달 동안 매일 업고 통원 치료를 해야 했습니다.
매일 아이를 업고 걸어야 했던 시간이 무려 네 시간입니다.
친정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다 딸이 고생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도와주겠다고 시골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나 사돈과 같은 동네에 사는 것이 아니라며 8km나 떨어진 곳에 집을 얻으셨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딸의 집에 와서 손주들을 돌봐주시고 일을 도와주셨습니다.
임종 전날 어머니를 방문하셨을 때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얼른 가서 사슴 밥 줘라. 나 때문에 이렇게 시간 뺏기면 어떡하냐!”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모습에서 당신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한 시골 집에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봉헌은 어머니의 피 흘림이었습니다.
따님은 그렇게 한 가정에서 훌륭한 며느리요, 아내요, 어머니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하신 날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인간의 부모가 자신들의 아들을 하느님 집에 봉헌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할까요?
이는 인간이 그 부모의 봉헌을 통해 성장함을 말해 줍니다.
부모가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여 자신이 선택한 사람과 결혼하겠다는데도 반대합니다.
이것은 자녀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내 품 안에 품고 살겠다는 뜻입니다.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 자녀가 성장하지 못하게 봉헌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자녀를 나라와 천주께 봉헌하는 편지는 이렇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조소 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어야 한다.
네가 상소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고 마는 것이 된다.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에 이르렀는즉 죽는 것이 영광이나, 모자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상봉치 못하겠으니 그 심정을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리…. 천주님께 기원할 따름이다.”
조 마리아의 편지가 원본이 없다는 이유로 거짓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안중근의 담당 간수였던 헌병 치바 도시치가 전한 말을 사이토 다이켄이라는 일본 스님이 『내 마음의 안중근』(1994)이라는 책에 기록한 내용과 유사하고, 황성신문 (1909년 12월 28일) 기사에서도 그 내용이 있습니다.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편지 자체가
거짓이라고 말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조 마리아는 아들 안중근을 천주와 나라에 봉헌하였고 그는 그렇게 성장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봉헌하지 않으면 아들은 어머니라는 감옥에 갇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를 어디로 봉헌하는 것일까요? 새로운 정체성으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나의 자녀에서 나라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로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체성은 또한 내가 누구냐는 믿음입니다.
사람은 믿는 대로 성장합니다.
어머니는 내가 가진 아들을 향한 믿음에서 자녀를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보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믿는 만큼 성장합니다.
1990년경 에렌 랭거(Ellen Langer) 박사는 70대의 남성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1959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전반적으로 5년 정도는 젊어진 모습이 되었습니다.
혹은 ‘아이는 부모가 믿는 만큼 자란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컴퓨터 게임 중독자인 아들을 끝까지 믿어주어 연세대 4년 장학생으로 입학시킨 『괜찮아 엄마는 널 믿어』의 저자 김민경씨입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 아버지만이 자녀를 봉헌할 자격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자녀는 부모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봉헌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낳고 자신들이 키웠으니 자녀는 자신들의 것입니다.
자녀들도 부모에게 속해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아무리 봉헌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천민 아이를 사무라이로 만들겠다고 한 어머니는 자신이 성의 기둥으로 들어가 죽었습니다.
다른 어떤 이가 들어가도 자녀는 사무라이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가능합니다.
이 배가 가라앉아야 어쩔 수 없이 다른 배로 옮겨 탈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배에 계속 머무르려 할 것입니다.
새끼 새를 자신이 떨어뜨리면 새가 날갯짓하겠지만, 다른 존재가 떨어뜨리려고 다가오면 몸을 움츠리게 됩니다.
봉헌은 부모만의 특권이기도 하고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내가 자녀를 봉헌하지 않으면 자녀는 어떤 방향으로도 성장할 수 없음을 기억합시다.
자녀의 성장은 부모가 어디로 봉헌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마르코 6,1-6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성모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억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삶 전체를 오롯이 주님께 봉헌하려고 길을 나선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 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 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봉헌의 삶>
2023. 02. 02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봉헌의 삶>
나를 있게 하신
하느님 뜻대로 삶
나에게 오시는
하느님께 가는 삶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나에게 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삶
나의 품에 계신
하느님의 품에 삶
내가 되신
하느님처럼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