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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이릉대전(夷陵大戰, 221년~222년)
삼국지 중후반부의 하이라이트이자 클라이맥스.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삼국지 3대 대전으로 꼽히는 전투이자 제갈량이 말했던 천하삼분지계의 붕괴를 선고한 전투.
이릉지전, 서릉대전(西陵大戰), 서릉지전(西陵之戰)이라고도 일컬는 중국 삼국시대의 주요 전투 중 하나.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했다.
2. 전개
2.1. 개전 준비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가 형주 공방전 중에 오군의 공격에 포로가 되어 참수당하고 형주를 잃게 되자, 분노한 유비는 수년 후에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많은 신하들이 이에 대해 간언했으며, 진밀은 천시로 보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운은 위를 쳐야 한다며 말렸다 호삼성은 이런 조운의 말에 대해 일에 있어서 앞에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안다고 칭찬한다.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조운을 강주로 보내고 진밀은 하옥했다.
또한 초청한 도인 이의기에게 길흉을 묻자 이의기는 답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구하고서 병마, 병기와 의장을 수십 장을 그린 다음 하나하나 손으로 찢고는, 다시 대인(大人) 한 명을 그려, 땅을 파 이를 묻고는, 곧바로 떠나며 불행을 예견한다. 유비 역시 이에 대해서 마뜩치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출전을 강행한다. 어쩌면 그 역시 이 전투가 마지막으로 친정하는 전투가 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걸 알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거기다가 그 와중에 221년 장비가 범강과 장달에 의해 죽고 마는 등 불안한 조짐이 보였으나 유비는 제갈량을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둔 뒤 오로 진군한다. 제갈량이 조운과 달리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유비의 원정을 반대하면 오의 중신으로 있는 제갈근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형 제갈근도 유비에게 사자로 갔을 때 제갈량 때문에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았었다.
사실 이릉대전에서 장비나 황충·마초·법정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마초야 북방에 배치하는 게 가장 적합했고(그리고 대전 중에 죽었으니 건강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조운은 전쟁에 반대했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나름대로 지장인 장비와 선봉대장으로서는 최고급인 황충, 그리고 뛰어난 군사 참모였던 법정이 생존해 이릉대전에 참여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보면 이릉대전에선 한중공방전과는 달리 오나라 무장들을 상대하는 데 있어 유비 혼자 지휘를 다하는 경향을 보이며 결국 한계가 보인다.
어쨌거나 7월, 유비군이 백제에 도착하니 오나라에서는 제갈근이 편지를 보내 같은 원수라면 더 큰 원수인 조비를 치라는 (조운과 같은) 이론을 앞세워 화해를 청한다. 호삼성은 위에서 봤듯 이를 칭찬했으나 배송지는 여기에 주를 달아 '글자가 아깝다'고 평했다.
신 송지가 말하건대 유후(劉后: 유비)가 애쓰느라 촉을 관(關: 함곡관)·하(河: 황하)로 삼고 형(荊)·초(楚)를 줄기로 삼자, 관우는 병사를 면수와 한수 위로 올리니, 그 뜻이 상국(上國)을 능멸하려 했으니, 비록 주인을 바로잡고 패업을 정하고자 하였다 해도 그 공을 기필할 수 없었지만, 그 위세가 멀리까지 떨쳤고 그 경략한 땅을 가졌다. 손권이 앙심을 품고, 위(魏)를 도와 위해(危害)를 제거하니, 이것이 종실 자제의 근왕(勤王)의 군대를 잘라버리게 되었고, 조공의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이행하게 되어서, 한(漢)을 돕는 계책은 여기에서 그치었다. 의기(義旗)가 가리키는 곳에는 의당 손씨가 있었다. 삼가 대의로써 유비를 꾸짖는다면 답할 게 없다는 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또한 관우와 유비는 서로가 마치 손발과 같아, 분노와 통한이 너무 깊으니, 이 오만하고 성긴 편지가 군대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이 편에 실린 것은 실로 글의 낭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글자를 낭비한다'는 표현이 있다! 배송지는 조운의 진언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안 하다가 오나라가 제갈근을 통해 보낸 편지는 이렇게 대차게 디스했는데, 통수를 친 인간들이 할 소린 아니라고 당연히 여겼던 것 같다. 조운이야 피해자 측이니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자는 말을 꺼내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때의 오나라는 위와 연합해서 의형제 관우를 죽인 뒤 익양대치 이후 촉한령으로 인정했던 형주 지역까지 빼앗은 엄연한 가해자이다. 이런 주제에 위를 먼저 치자는 소리를 내세우면 그게 먹힐 리가 없다. 그뿐이면 모르겠는데 4.1 문단에서 서술되듯 오나라는 계속해서 도발로 일관했으니, 이런 화해 요청을 유비가 받아들였다면 그야말로 인의의 군주 정도가 아니라 호구감일 것이다(…).
물론 오나라가 아니라 제갈근 본인으로 한정하면 이는 어쩔 수 없긴 했다. 제갈근은 촉 측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설득이나마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제갈근이 오만하고 멍청해서가 아니라는 뜻.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대항하게 한다.
2.2. 위나라에 칭신하는 손권
2.2.1. 그 동안 위나라에서는
한편, 조비 쪽에서는 그 누구도 유비가 손권을 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대부분 신하들의 의견은 '촉은 관우가 죽었으니 공격할 여력이 없다'였지만 유엽만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예상했는데 첫째는 위신을 세우고 촉이 약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관우와의 개인적인 관계였다.
221년 8월 손권은 스스로 번국을 청해오며 관우를 물리치며 얻은 우금을 돌려보낸다. 조비는 (사마광의 표현대로면) 우금을 임금답지 못한 방식으로 분사케하고 오나라의 칭신을 받아들이는데 주위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지만 이때 유엽은 오를 치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유엽과 조비와의 대화는 자치통감에 길게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선 간단하게 요약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유엽: 이건 유비가 공격을 하려고 하니까 손권이 그동안 우리가 공격할 것이 두려워서 이러는 것이죠. 오를 반으로 나누어 가져도 촉은 망할 수밖에 없는데 하물며 지금처럼 위나라가 안쪽을 차지하고 촉나라가 바깥 쪽 변방을 차지하는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비: 항복한 자를 어찌 치겠는가? 차라리 촉을 치는 게 낫다.
유엽: 촉을 공격한다면 촉은 그냥 군사를 되돌리면 됩니다. 하지만 유비는 지금 화나 있어서 우리가 손을 잡고 공격한다면 기뻐하며 뒷일 생각 안 하고 따를 것입니다.
호주: 손권은 진심으로 항복할 것이고 인질로 아들도 보내올 것입니다. 제 가족 100명을 걸고 자신합니다!
조비: 호주, 뭘 좀 아는군! 좋다, 손권, 너를 오왕으로 임명한다. 구석도 주마. 형정! 이걸 전해라!
유엽: 손권이 겨우 남창후라서 애들이 우리를 무서워하는데요? 장군의 칭호를 올려주거나 10만 호의 후로 책봉하는 건 몰라도 왕은 무립니다. 손권은 분명히 촉을 물리치면 바로 무례한 행동 들어갑니다.
조비 : 시끄럽소. 오나라는 우리 적 아니니까 맘 좀 편히 놓으시오.
한편으로는 조비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정략적으로 머리를 썼다고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유엽의 말대로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형주로 공격해 온 것이긴 하지만 만약 이때 위가 개입한다면 동시에 이전의 익양대치처럼 촉과 오가 일시적으로 전쟁을 중지하고 위나라와 맞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 위나라의 역량이 부족했을 공산도 충분하다. 그 근거로
1. 관우의 북벌을 오나라를 통해서 막은 것.
2. 이릉대전 직후가 촉을 공격하기 가장 좋았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점.
3. 조조 사후 위군의 정예 청주병 공중분해, 각 지방의 반란, 장패 등의 반군벌 세력의 불온한 움직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유엽 스스로도 언급한 것이지만, 유비가 일으킨 이 전쟁의 첫째 목적이 형주 회복과 촉이 약하지 않다는 위신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고, 유비가 관우의 복수로 눈에 뵈는 게 없었다고는 하지만 동시에 한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조씨의 위나라를 국적으로 삼아 황제에 즉위했었기 때문에 유엽의 제안대로 오나라의 절반을 준다고 해도 순순히 위나라에 응하지 않을 것은 명약했다. 유비는 실제로 이릉대전 당시 일부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 위나라의 개입을 미리 방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비는 괜시리 이 시점에서 자신이 개입하기 보다 유비와 손권, 둘이 싸워 한쪽이 약해진 틈을 타서 복속시킬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후 오나라의 태도 불손을 이유로 남정을 떠난 것을 봐도 그러하다. 그러나 조비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는데 하나는 괜히 과하게 오왕과 구석의 지위를 내려 손권의 권위를 높혀주면서 오나라의 단결력을 더 강하게 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형편없는 군사적 능력을 과신하여 오나라쯤은 얼마든지 멸할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에 대한 반론이 있다. 애시당초 조비가 이렇게 깊게 생각하고 오의 항복을 받았다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기록은 유엽은 오를 치자했고 조비는 항복해온 자는 칠 수 없으니 차라리 촉을 치는 게 낫다고 말한 것뿐이다. 애초에 둘 중 한쪽이 약해진 틈을 노리려 했다면 패배한 촉을 쳐야지 승리한 오를 쳤다는 것 자체가 조비의 머릿 속엔 이런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 손권에게 오왕의 작위를 주면 오를 정벌하기 힘들어 질 것이 뻔한데도 오왕의 작위를 주었다는 것 자체가 조비는 오를 정벌할 생각이 없었으며 오의 거짓 항복을 진심으로 믿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또 유엽은 유비가 분노에 미쳐서 위나라가 오나라를 쳐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위와 함께 오를 멸망시킬 것이라 전망했다. 촉이 일시적으로 전쟁을 중단 했을 것이라는 전망도 근거가 없다.
또 청주병의 규모가 얼마였는지, 그들이 어디 배치되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들을 정예로 단정지을 근거도 없다. 223년의 공격과 이릉대전 당시 청주병의 해산은 애초에 논의되지 않는 것을 보면 청주병은 조조의 주력과 분리된, 조조의 근거지에 배치된 사설 무력조직 정도로 볼 여지가 더 많다. 그리고 조비는 이릉대전이 끝나고 1년도 안 된 223년만 되도 이미 신나게 손권을 패고 있으며 224,225년에도 계속 손권을 치며 국력을 낭비하고 있기 때문에 위나라가 이릉대전 당시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그러나 어느 쪽이 되었건 이런 정략적인 판단 착오는 결국 삼국시대를 연장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2.2.2. 오나라의 반응
그동안 형정은 오나라에 도착한다. 오나라 사람들은 왕이라는 직책 따위 받지 말고 상장군이나 구주백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지만 손권은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형정의 무례에 장소가 일갈하고 서성은 주위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분해하니 형정은 오나라가 오래 밑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쨌든 손권은 조자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한다. 거기서 조자는 끝내주게 손권을 띄워주는데 말을 너무 잘하니 조비가 조자에게 자신에게 귀순할걸 권하고 조자는 그동안 오를 치켜세운 건 다 어디갔는지 덥썩 수락해 위의 조정에 임관한다. 손권도 조비에게 신하가 되겠다 자청한 마당이라 자기가 조비를 섬긴다고 나쁠 건 없다는 심보였을 듯
그리고 조비는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작두향과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 공작, 비취, 싸움 오리, 장명계 등을 오에 요구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치품의 요구에 다른 신하들은 모두 기겁하며 사치품의 요구양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다며 반발하지만 손권은 이딴거나 요구하는 놈이라니…상대하기도 짜증나니 그냥 바치고 말자 여기서 조비는 근본적으로 예의를 모르는 인간이라 예의를 가지고 드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과 함께 조비가 요구한 모든 것을 갖추어서 보내준다.
그 후 조비는 손권의 아들 손등을 만호후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손권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며 편지를 올려 받지를 않고 단지 심형을 파견해서 감사의 뜻을 밝히며 방물을 바친다. 심형을 만나본 조비는 그가 훌륭하다고 여기고 일단은 이 문제를 덮어둔다.
2.3. 유비의 공격
유비군 본군의 진격 경로, 마량이 가있던 무릉만이나 보즐이 막고 있던 영릉, 계양 쪽 반응은 나타나지 않은 지도이다.
촉한군의 처음 기세는 매서웠다. 육손, 이이, 유아는 무현과 자귀현을 주둔해 있었는데, 촉군의 선봉인 오반과 풍습은 무현에서 이이 등을 격파하고 자귀에 주둔한다. 거기에 마량의 회유로 사마가를 비롯한 무릉의 오계만이까지 촉군에 합세한다. 후일 서진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수군을 통해 이 지역을 밀어버렸지만, 유비같은 경우 확실히 동오를 제압할 전력이 아니기 때문에 수로와 육로 둘 다 썼다. 전선이 밀리거나 후퇴해야 하는 경우를 대비한것으로 보이는데, 수륙병진의 경우 수군이 육군의 속도에 맞춰줘야 하니까 속도의 이점은 없다. 대신에 병력충원이랑 보급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는데 유비는 이것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영릉과 계양마저 습진을 필두로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따로 보즐을 파견한다. 보즐은 습진을 반준과 함께 격파하고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니 결국 영릉과 계양의 군대는 이릉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비군에 호응하지 못하고 전투가 끝난 후에 토벌되고 만다.
이때 황권이 선봉장을 자청하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사를 감독하라고 보내버렸다.
222년이 되자 송겸이 촉의 진채 다섯 곳을 함락시키고 주연이 촉군의 선봉대를 격파하였으나 유비는 다시 공세로 나가 이도에서 혼자 공을 세우겠다고 앞서 나선 손환을 격파해 포위한다. 그러나 육손은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간다. 이에 손책 시절부터 섬겨왔던 노장들과 손권의 친척들도 합세하여 육손에게 싸울 것을 청하나 육손은 칼을 들고 그들을 복종하게 할뿐 나서지 않는다. 또 이릉성에서 포위당한 손환이 도움을 요청하자 육손은 그것을 거부하고 왜 손권의 동족을 구원하지 않는냐는 장수들의 말도 무시하며 수비로 일관한다. 이에 오군은 고릉군에서 패배한 데다 이릉까지 밀리게 된다.
이에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어 육손을 유인하니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모두 공격을 주장했는데, 육손만은 유비가 산골짜기에 복병을 둔 것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버티기만 한 육손에게 반격의 때가 온다.
2.4. 칠백 리를 태운 불꽃
육손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 그의 전략에 의하여 오의 영토내로 5, 6백리를 들어온 유비군은 양자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리나 되는 긴 전선이 형성되게 된다. 이 사실을 들은 조비가 말하길 "유비는 병법을 모르니 손권이 곧 이길거란 소식이 들릴 것이다." 이라고 말할 정도로 병법에서 금기하는 일이었다.
한편 육손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처음에는 그가 수륙병진할 걸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보면 그는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유비는 별 거 아닙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폐하께선 마음 편히 주무시면 됩니다." 라고 말한 다음 행동을 취한다.
육손이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니 다른 장수들은 유비를 이기려면 처음부터 싸웠어야 하지 어째서 본토에 5,6 백리나 들어온 지금에서야 들어오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적의 영채 한 곳을 공격하게 하며, 온갖 자뻑을 하며 공격하지만 근데 거기서 패배. 장수들이 헛되이 병사들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으나 육손의 계책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
라고 하고는 곧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촉한군을 화공과 기습으로 공격하니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동시에 함께 공격해 장남, 풍습 및 호왕(胡王) 사마가(沙摩柯) 등의 머리를 베었으며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시켰다. 때는 마침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라 덕분에 화공이 크게 성공하여 촉한군은 마침내 대파되었다. 이릉성을 포위하고 있던 풍습, 장남이 사망하니 이릉성에 갇혀있던 손환의 애움도 알아서 풀려 손환 또한 참전해 유비를 추격했고 무릉만왕 사마가도 죽으니 도망칠 곳이 없는 두로와 유녕은 항복해버린다.
유비는 마안산에 올라 이렇게 다시 대파된 군대를 수습해 포진시켰으나 이미 사실상 승기는 오군에게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다시 한 번 육손이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곳으로 육박해오자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어 오군에 대패하고 자귀에서의 패배로 왕보도 죽는다. 오군은 이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촉한군의 진지들을 격파하며 유비를 추격했고 결국 유비는 손환과 육손에 대한 푸념을 외친 다음에 백제성으로 들어서니 그런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역을 관리하는 자가 스스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후에야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유비를 구하기 위해 후전을 맡은 부융의 군대는 거의 다 죽어버린다. 부융의 기세는 사그러들지 않았으나 오나라 사람이 타이르며 항복하라고 하자 한의 신하는 오나라의 개들에게 항복치 않는다라며 욕하다가 결국 부융도 전사. 종사좨주 정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퇴하는데 여러 가삼들이 뒤에서 추격하는 사람들이 곧 올것이라며 배를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가라고 하자
나는 군대에 있으면서 적 때문에 도망하는 것을 아직 익히지 못했다.
라고 하고는 죽었다.
이걸 보고 호삼성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적에게 다가서는 것은 진실로 죽으려고 가는 것이지 아직은 도망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라는 평을 남겼다.
이렇게 촉군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의 물자는 한 번에 거의 손실됐고, 병사들의 시신은 장강을 떠 다녔다. 이 와중에 상총의 진채만이 온전했다고 한다. 이렇듯 수십 리에 거친 진지가 함락되어 퇴로가 끊긴 황권과 사합(史郃)은 결국 222년 8월, 위나라에 항복한다. 한편, 무릉만에 가있던 마량 또한 오계만에서 사망한다.
한바탕 전투가 끝난후 육손에 의해 목숨이 살아난 손환은 육손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손권은 육손의 부하장수들이 육손의 말을 듣지 않았던것을 알게 되자, 육손에게 왜 그런 사실을 나에게 알리지 않냐고 물어보았고, 육손의 설명을 들은 다음 크게 기뻐하며 육손을 승진시켜준다.
유비는 매우 부끄럽고 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육손에게 좌절과 모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닌가?
패퇴 후 유비가 백제성에 도착하자 서성, 반장, 송겸은 그를 쫓자고 주장하였으나 육손과 주연, 낙통은 조비의 남하가 있을 것이므로 그를 대비하여야 한다고 하니 육손은 손권의 명을 받아 다시 화친을 제의하고,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 유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10월에 화친이 이뤄지고 이릉대전은 끝난다. 한편 당시 조비는 유비와 손권이 싸워서 둘이 힘을 빼게 한 뒤 둘 다 먹을 속셈이었고, 육손의 예상대로 이릉대전 후에 오나라로 밀고 들어온다.
한편 조비가 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유비가 육손에게 한 번 편지를 보내본다.
유비 :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
육손 : 단지 걱정되는 것은, 당신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만 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습니다. 만일 십분 헤아리지 않고 다시 뒤엎어지는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해당년도에 촉오가 이미 화친했으므로 유비가 정말로 재공격하려고 엄포했다기 보다는 그냥 내질러봤다고 보는게 매끄럽고 이에 육손도 잘 받아쳤다고 해석하는편이 매끄럽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를 당하고 나서 또 공격할만 한 암군도 아니고.
3. 결과
실제로는 유비군 본대 4만 가량에 마량이 끌어들인 다수의 무릉만이들과 선봉으로 나선 오반과 진식의 수군, 북쪽에서 위를 견제하며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 할 황권의 부대에 육손이 8만을 죽였다는 유엽전 기록까지 감안하면 대략 8~10만 가량으로 추산할 수 있다. 유비군의 총 전력이 4만 명이었다는 설은 위서에 기록된 유비군 본대에 대한 기록만 참조하면서 생긴 오류인 듯 하다. 하지만 정사에 기록된 병력 숫자 자체도 대군임이 확실한데다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패가 맞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전력상으로 유비는 약 8만 명 정도의 병력에 조운, 위연, 오의, 이엄, 진도 등 1세대 명장들을 제외한 2세대 중진 장군들이 대거 투입 되었다.
보다 상세히 서술하자면, 풍습은 장비 대신 촉한군 대도독을 맡을 정도였다. 장남은 형주 시절부터 종군하였으며 풍습과 함께 손환을 깨트릴 정도의 인물이였다. 정기는 유장 시절 일어난 반란에서 아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고 자신의 직무를 행하던 사람이었다. 부융은 한(漢)나라 장군으로 항복하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외치며 싸우다 전사한 맹장이었다. 두로와 유녕은 자세한 내용이 없다.
여기서 1세대 명장들이 투입되지 못한 것을 보고 2선급 전력으로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데, 사실은 이와 달라서 하필 전쟁 직전에 관우와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명장 장비까지 갑자기 죽어버린 이유로 나가고 싶어도 못나간 것이다. 장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도독 자리가 장비에서 풍습으로 교체되는데 아무래도 능력의 차이가(…). 차라리 조운을 데려가는 게 더 나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관우와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촉 본진에서 제갈량을 보좌할 경험 많은 장군 역할을 할 사람은 실력으로나 위상으로나 조운이 적임이었고 또 이릉대전을 반대한 인물이라 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시킬 명분도 없었기에 강주에서 후방지원용으로 놓아둔다. 또 조운의 포지션 자체가 일군을 이끄는 장군, 도독보단 내부 군정에 더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기에 만약 이릉에서 잘못되었을 경우 후방을 책임질 사람으로 놓아두는 것도 필요했다. 실제로 이릉에서의 패배 이후 조운은 백제성으로 신속히 군을 이동시켜 후퇴하는 유비를 맞이한다.
물론 촉한이 대오전에 동원한 병력 자체가 완전히 전멸했다고 볼 순 없다. 오 역시 1년 동안 싸움으로 이도까지 밀렸다가 촉한군에 무릉만이들이 대거 가세하여 군율과 전선이 흐트러지고 늘어난 것을 이용해서 화공 및 유비본대의 연쇄적인 격파로 기세를 몰아나가 이긴 싸움이었기에 쉽게 이기지만은 못한 싸움이었고 유비가 영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손권이 유비와의 교류를 복원시키는 등, 그 이후 촉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록 조비와의 항쟁이 있다 하더라도, 촉한이 하다못해 위와 오 사이의 허라도 찌를 정도의 힘이 없을정도였다면 손권이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형주를 침공하면서 불어난 현지의 힘은 전멸되었다고 봐도 되겠지만, 적어도 이 당시 촉한은 내부반란을 수습하고 기회를 엿볼만한 힘은 남아 있었다, 다만 인적자원면에서 손실이 컸다는 것.
제갈량의 불참도 유비의 패배 중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본디 유비 생전에 제갈량은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지휘한 적이 없었고, 1인자와 2인자가 모두 자리를 비우면 국정을 돌보고 병참을 지원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유비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갈량은 이를 제압해야 했다. 얼핏 보면 한순간에 이루어진 전투로 보이나, 거의 반 년에 걸친 대결전이었다.
촉한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마량, 황권 등의 핵심 참모들이 죽거나 투항하고 풍습, 장남, 정기, 부융, 두로, 유녕 등 군부를 이끌어가야 할 2세대 장수진들이 거의 붕괴되었다. 황권과 함께 위에 항복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이 무려 318명인데 그 중에 열후로 봉해진 사람만 해도 42명이고 장군 낭장으로 봉해진 것이 100명이니 말 그대로 촉한의 당시 인재가 통째로 날아간 형태였다. 제갈량: 폐하! 촉한의 인재풀을 돌려주십쇼! 이릉대전에 참여한 촉나라 장수들의 면모
이때 조운은 황실복원이라는 절대적 명분으로 주적인 위를 정벌해야한다고 했고 위가 망하면 자연스럽게 오나라도 망하게할수 있다며 말렸지만 유비는 조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비가 죽고 4년이 지난 시점인 제갈량의 1차 북벌때도 천수, 남안, 안정 3군이 일시에 위를 배반하고 촉에 붙었는데 유비가 직접 북벌을 지휘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이다. 하다못해 전쟁이 교착상태가 되었을때 전쟁을 멈추고 군대를 돌렸으면 물자 소모는 막대했을지언정 인력의 손실은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재부족은 후에 제갈량의 1차 북벌때 경험많은 장수들이 부족해 군경력이 일천한 마속과 인격 문제로 좌천되어 있었던 양의를 기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양의는 애초부터 유파와 갈등을 빚는 등 철저하게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위인이였기 때문에 유비가 실각시킨 인물이였으나 이러한 인재 부족 때문에 제갈량이 눈물을 씹으며 어쩔 수 없이 기용했고 그 결과 양의는 제갈량 사후 반목하던 위연과 그의 일족을 제멋대로 죽인 뒤 자기가 승상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위씨를 따랐어야 했다."는 망언을 내뱉었다가 숙청당했다.
또 제갈량은 북벌을 하면서도 오나라를 경계해 의식하여 영안의 방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제갈량 사후 그래도 동맹인데 영안에 병력을 너무 많이 배치한다고 오나라가 궁시렁 거린적도 있을 정도. 어쨌든 촉한이 북벌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만든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촉한을 도와 참전했던 무릉만이 역시 사마가가 죽은 것을 비롯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무릉만이의 반오감정은 사그라들기는 커녕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부은 듯 이후로 몇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고 오나라가 5만 명이나 동원한 대규모 정벌에도 불구하고 복속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후에 촉한이 위나라에게 멸망하자 바로 위나라 편을 들었다.
오의 경우도 사실상 국가의 존망을 두고서 전력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전 초기 손권은 유비에게 화친을 청하고 위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여 협공을 피하는 한편, 위의 도움요청은 거절해서 유리한 위치를 확실하게 잡은 뒤에야 상대하는 등, 이때 보인 외교적 균형은 손권의 전성기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
오나라는 촉한에게서 뺏었던 형주 땅을 지킬 수 있었으나, 이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 기껏 뺏은 양양도 위략의 표문의 말마따나 포기하듯 다시 위로 넘기고 위에 임시 항복을 해야했으며, 수많은 사신들을 위와의 관계를 위해 갈아넣고, 전쟁에서 이긴 직후에도 유비를 견제, 이민족의 토벌과 동시에 조비의 3로 군대를 막아야하는 위급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더구나 오나라 또한 인적손실이 컸고 전쟁도 오나라 국토안에서 벌어진 만큼 막대한 피해를 보는 등 상처투성인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촉한과 오가 같이 힘을 합쳐도 위에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잘 소화시키지도 못할 형주를 먹었고 형주를 그렇다고 잘 활용한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전선은 넓어졌고, 무릉만이는 계속해서 속썩이고. 익양대치부터 형주공방전, 이릉대전까지 이어지면서 유표시대의 풍요로운 형주는 쑥대밭이 되서 형주의 생산력은 말 그대로 박살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형주가 손오의 땅이라는 대외적인 명분이 유비를 앞선것도 아니다. 이렇게 형주를 먹었지만 정작 서주나 합비 회남 지역에는 여전히 손도 못댔다는 점에서 그다지 좋을 것도 없었다.
불가피했던 점도 상당부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둘 다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지만 막상 지나고보니 둘 모두가 손해를 본 형세만이 남게 된 것이다. 강력한 위를 두고 동맹국끼리 서로 싸우는 바람에 1강 2약의 구도를 만들어 버렸고 이는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결국 촉한이나 오나 큰 상흔을 입고 양국의 최대의 적인 위만 이득을 얻은 전쟁이었다.
위나라는 이릉대전의 최고 수혜자였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후계를 잇고 황제에 오르면서 생긴 불만과 반란, 손권의 공격을 유비 덕택에 정리할 수 있었고, 오히려 상용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으며 양국의 국력 약화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비도 유엽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기껏 얻은 찬스를 낭비했다. 유엽이 조언한대로 촉을 도와 오를 무찌르고 촉을 먹었다면 정말 통일을 순식간에 이뤄서 난세를 끝냈을 것을…괜히 뒤늦게 혼자 오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오히려 관광당했다. 정리하자면 이릉대전 덕분에 촉한과 오는 모두 건국 초기로 상황으로 돌아가고 기껏 기회를 얻은 조비마저 오를 공략하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릉대전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이를 위, 촉한, 오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4. 평가
4.1. 이릉대전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었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오로지 복수심에 불타서 앞뒤 안가리고 일으킨 전쟁인 것처럼 묘사된다. 유비가 가장 총애하고 가깝게 대하는 측근인 조운과 제갈량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끝까지 강행하면서 유비의 분노가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음을 묘사하고 있다. 정사에서도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고, 무엇보다 결과가 대패로 끝난 전쟁이다 보니 라이트한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는 이릉대전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으로 평가된다. 정사에 기반한 연구를 하는 역사가들 역시 유비의 감정적인 대처가 패인 중 하나였다고 지적하는 사례가 많은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릉대전이 정말 시작하면 안 됐을 전쟁이라는 주장은 결과에 끼워맞춘 억지다.
일단 이릉대전의 격발 원인부터가 단순히 관우의 전사와 형주를 빼앗긴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나라는 단순히 동맹관계를 깨고 형주를 취한 뒤 관우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권은 익주의 후방을 흔들기 위해서 교주의 사섭을 통해 옹개를 친오파로 포섭하고 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하는 한편, 형주를 장악한 이후 공안에 머물던 유장과 그 일가가 오에 항복하자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아 남군 자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유장이 죽자 아들인 유천을 익주자사로 삼아서 교주와 남중의 경계에 머물게 했다. 촉의 민심을 뒤흔들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유수독으로 있던 주태를 한중 태수 분위장군으로 임명하고 능양후로 봉했다. 익주와 한중은 촉한의 영역이었다. 유비가 형주로 나오는 것을 막기위한 방책으로 이렇게 나왔다고 하나 촉한입장에선 후방이 간지러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옹개등 남중 세력의 반란은 오의 장난질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어찌되었던 명백한 도발이었던것도 사실이다.
유비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정사나 연의에서나 관우의 복수지만 정사의 경우 유엽의 말에서 보듯 가장 큰 목적인 관우의 복수 뿐만이 아니라 아직 오에 복속된 지 얼마 안 된 형주의 재탈환과 촉의 국력 과시 등의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형주는 일찍이 촉한의 국가전략이기도 했던 제갈량의 융중대에서 형주는 익주와 함께 동시 북벌로 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으로 내정되어있던 핵심 요충지였다.
게다가 촉한 장수들의 기둥들이라 할 수 있는 관우, 장비, 황충 등은 물론 동화, 법정, 미축, 이적, 유파 등의 문신들까지 여러 공신들이 불길하게도 해마다 연이어 죽어가니 위축된 군사들의 사기고양을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릉대전의 발발 이유중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북벌의 문제다. 연의와 달리 유비는 분명히 군재(軍才)가 뛰어난 군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형주 없이, 파촉지역에서 관중평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그 험난한 진령산맥을 넘어야한다는 점이다. 잔도를 통하여, 관중평야를 점령할만큼 막대한 량의 군사, 식량, 냉병기등을 수송을 해야하는데 따른 제약이 매우 크다. 만약 한중과 관중평야 일대에 진령산맥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한중공방전에서 조조는 사활을 걸었어야 했었다. 제갈량의 1차 북벌때처럼 별동대로 위군을 기만하고, 본군을 량주로 군을 돌리는 것을 얘기하지만, 설령 여기서 성공을 한들, 거기서 관중평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소관을 넘거나 진령산맥의 우측을 타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 조조는 한중을 버리고 물러나면서, 한중에서 관중으로 가는 요새마다 수비도 견고하게 태세는 갖춰놓았다. 그렇기에 북벌을 하기 위해서는 형주에서 군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주와 예주를 지척에 두고 위의 주력군을 묶어두면서, 관중평야로 진격을 해야만 했었다. 이미 하북과 중원을 통합한 조조를 두고, 손오와 결전을 치루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유비정도의 백전노장이 이릉으로 나갈수 밖에 없는 이유다.
즉 유비 입장에서는 위와의 전면전을 위해서는 형주는 필수 불가결 요소였고, 손권이 형주를 취한 이상, 이릉대전은 일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전쟁이 아니라,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였다는 점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이 되는 것은, 이릉대전으로 1세대 이후 군대의 주축이 되었어야 할 2세대 인물들이 궤멸상태로 망가지면서 유비 사후, 촉이 멸망할때까지 인재 시스템은 이때의 타격으로 회복 불능의 수준으로 전락 해버렸기 때문이다.
4.2. 이릉대전의 전과에 대해
애시당초 유비 자신이 이끄는 본영 40영의 병사들은 4만 명인데 부자의 기록에는 8만 명이나 되는 촉한군이 전사했다고 하지만 촉한이 동원할 수 있는 전체 병력을 감안하면 이 정도 패배를 당했으면 촉한 자체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다. 물론 촉한군이 대패를 당한건 사실이긴 한데 여기에는 유비가 현지에서 호응한 병력, 무릉만이를 회유해 불어난 병력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고 본영 40영의 병사들이 격파될때 이들의 비중이 만만치 않았을것이라는 것이다. 유비는 본군이 격파되고 이를 수습하여 백제성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며 오군을 계속 견제하고 있었고 육손 역시 위나라의 침공을 우려해 더 이상 쳐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후 오나라 측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먼저 저자세로 유비에게 화친을 청하는데 만약 유비의 주력이 전멸했다면 유비에게 이 정도로 저자세로 나올 이유는 없었다는 것. 물론 이후 촉한이 전력 재건을 위해 쩔쩔 맨 것은 사실이기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특히 인적손실은 매우 커서 오나라쪽 상장은 패배나 위태로운 상황을 당했을지언정 이릉전 당시 한 명도 죽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촉한의 중요 장수와 참모들은 풍비박산난 결과가 그걸 증명하며 삼국시대에 단일 전투로 이렇게 양측의 손실이 차이나는 전투는 드물다. 적벽에서도 패배측이 한번에 이렇게 많은 중책이 죽거나 잡히진 않았다.
유비는 오에 비해 빈약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릉은 장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유비는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이 수군을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유비군이 강가에 배치되어있는 정황은 육손이 공격할 때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을 놓았다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조비는 이릉전 당시 유비의 패배가 칠백리에 걸친 긴 전선진지 구축 때문이라고 평가했고 본 문서에서도 유비의 이런 배치는 1차대전 이전에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조비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런데 이와 대치되는 주장도 있다. 이 게시글을 본다면 유비군에겐 어복과 자귀에 이르는 보급로가 구축되어 있는데 이 보급로는 육손이 산길을 타고 급습하거나 장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등의 기습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때문에 유비가 길게 병력을 포진시켜 보급로를 수비하는 것은 조비의 말과는 달리 지극히 상식적인 배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넓게 퍼져 배치한 것이 패배의 요인이 아니고 다만 유비가 본영이 화공에 쉽게 노출되는 장소에 주둔한 것이 문제라는 설명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복에서 자귀까지 나가는 길은 외길이며, 장강의 흐름 때문에 형성된 골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경사가 있는 길이며 대군이 움직이는데 있어서, 좁은 오르막길을 장시간 행군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오군이 자귀 북쪽이나 장강 남변으로 돌아서 어복에서 자귀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끊기라도 하는 날엔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귀찮은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일단 보급선에 병력을 뿌려서 보급로 차단을 방지하고 뿌려둔 병력을 압도할 만한 병력이 돌아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병사를 갈랐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릉만이들을 이도 쪽으로 동원하여 장강 남변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도록하고, 본군은 지강쪽으로 놓고, 황권의 분대는 위나라와 맞닿는 임저쪽으로 놓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 세 갈래가 충실히 연계하고, 뿌려둔 병력들이 자기 위치만 지키면 보급선을 지키면서 공안까지 무리 없이 진격할 수 있는 구도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이 길을 이용한게 수번이나 되어 촉으로 들어가면서 한 번, 익양대치 때 공안으로 나오면서 한 번, 다시 들어가면서 한 번, 이릉전 하러 나오면서 한 번이다. 총 네번에 걸쳤기에 조비는 물론 육손이나 다른 오나라 장수들보다는 이 길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수백 리 대영이라고는 하지만 영의 중심은 유비의 본영과 황권이 이끄는 분영, 두 개에 집중되어 있지, 뒤에 긴 꼬리는 그저 보급선을 지키기 위한 소규모 분대들이었을 거라는 것이며 전과를 보건데 불에 타고 격파된 것은 유비의 본영 뿐이었을 거라는 점 등을 보면, 유비의 실책은 본영을 잘못 잡았다는 것일테고, 길게 진영을 잡은 건 별로 영향을 못 줬을것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이 있는데 바로 위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으로 사실 유비가 지형의 한계로 700리를 이어서 병력을 분산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전선을 늘인것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유비의 본대와 장수들이 선봉에서 이끈 병력도 만만치 않았으며 분산된 병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리라는 견해가 있다. 오히려 이 덕분에 유비는 오나라 땅에 장기간 주둔하고도 보급에 문제가 없었고 육손과 오나라 장수들은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고 유비군이 강릉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방치해야만 하였다. 즉 유비는 공격해 들어오면서 수세에 몰렸을때를 대비해 각 진영을 험지에 둠으로서 육손이 틈을 찾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고 이것이 이릉전 초기에 육손이 기습하면서 오히려 불리했던 이유이라는 것이다.(육손전에 초반에 공격했으나 불리하였다는 기록이 분명 존재한다.) 즉 유비가 패한것은 육손이 예상치 못한 화공을 동원함으로서 완벽히 허를 찔러 촉군이 와해되게 만든거 자체가 문제였지 전선을 늘인것은 오히려 유비가 어떻게든 간신히 후퇴하고 후방의 남은 각지의 소수 병력을 추스릴 수 있도록 도와준 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유비의 역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임기응변으로 유비의 후퇴를 도운 기록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주장을 토대로하고 정사 삼국지를 살피면서 이릉대전을 찬찬히 재구성해보자. 당장 이릉대전 승리의 주역인 육손의 열전을 보자. 총사 육손 휘하 오나라 대부분의 장수들은 조비가 언급한 식으로 그렇게 오나라 영토로 분명 수백리나 유비의 진영이 들어왔음에도 유비가 많은 요충지를 모두 점거해 굳게 지키고 있어 공략하면 이쪽이 불리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유비가 세운 진영은 요충지에 굳게 지키고 있어서 수백리에 늘어져 있음에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모두 육손이 처음 공격을 시작할때 오히려 무의미한 병력 소모일뿐이라고 핀잔을 주기까지 한다.
육손 수하의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유비를 공격한다면 응당 그가 처음 병사를 내었을 때 했어야만 했습니다. 현재는 그로 하여금 오나라로 5, 6백 리를 들어오도록 하여 서로 대치한 지 7, 8개월이나 되었으며, 많은 요충지는 모두 그가 굳게 지키고 있으므로 그를 공격하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육손이 말했다.
"유비는 교활한 적이며, 매우 많은 일을 겪었고, 그의 군대가 처음 집결했을 때, 그의 생각은 조밀하고 전일하였으므로 침범할 수 없었다. 현재는 매우 오랫동안 출병하여 병사들은 피곤하고 사기는 떨어졌으며 다른 계획은 없다. 앞과 뒤에서 협공하여 적을 잡을 때는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나서 육손은 먼저 유비의 한 진영을 공격했지만, 불리했다.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헛되이 병력을 소모시킬 뿐입니다."
-육손전
오나라 장수들이 육손에게 이런 반응을 보인것도 이유가 있었다, 육손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여러 장수들은 유비가 처음에 들어올때 맞받아 칠 것을 바랬지만, 육손이 이를 제지한다.
“유비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와서 날카로운 기세가 비로소 성대하며, 또 높은 곳을 타고 험준한 곳을 지키니 섣불리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것이오. 그것을 공격하여 쫓아내는 것은 다 이기기 어려운 것과 같고, 만약 불리한 일이 있으면 우리의 대세(大勢)에 손해가 생겨 작은 소치가 아닐 것이오. 지금은 단지 장수와 병사들을 장려하고 넓게 방략(方略)을 펼쳐 그 변화를 관찰해야 하오. 이렇게 이 평원과 광야에서, 서로 맞부딪히는 우려로 (우리가) 무너질 일이 있을까를 마땅히 걱정해야지, 지금 산기슭으로 행군하면 세력을 펼치지 못해 저절로 나무와 돌 사이에서 끝장나게 될 것이니, 서서히 그들이 피폐해진 것을 제압해야 할 뿐이오.”
여러 장수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육손이 두려워한다고 여겨 각자 분한 마음을 품었다.
-육손전 주석 오서
즉, 이를 종합하면 오나라 장수들은 처음부터 유비가 오나라로 요충지를 점거하며 들어오기전에 요격하여 물리쳐야 한다고 봤는데 이 당시엔 이미 유비가 깊숙히 들어와 요충지를 다 점령하고 굳게 지키고 있으니 이길수 없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유비는 오나라에 반항적인 형주의 주요 이민족들까지 금은보화와 비단을 풀어 포섭하면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육손 휘하에 있던 장수들이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선우단, 손환 등 나름대로 식견있는 오나라의 명장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육손은 총사라는 명분하에 혼자서 거의 아슬아슬하게 이들의 불만을 틀어막고 있는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결국엔 이 시점에선 그들의 걱정대로 된 것이다. 반면 육손의 경우엔 당장 싸우면 오히려 기세등등한 유비에게 패배하여 대세를 그르칠 것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기에 싸우기를 주저하고 그 기세가 꺾이길 기도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쟁 초기, 무현, 자귀현에 주둔하던 육손 본인도 같이 주둔하던 이이가 격파되는 와중에 물러서야만 했다.
어쨌거나 육손은 이릉에서의 첫 싸움에서 오히려 불리하고 휘하 제장들의 시큰둥한 반응 와중에도 유비를 반드시 격파할 기책이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육손이 말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시길 방법을 알고 있다."
곧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화공(火攻)으로 격파시키도록 명령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동시에 함꼐 공격해 장남, 풍습 및 호왕(胡王) 사마가(沙摩柯) 등의 머리를 베었으며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시켰다.
-육손전
풍습은 적을 경시하여 시기를 잃고 위험을 초래했다. 문진(장남)은 분투하였지만, 똑같이 이 패배로 목숨을 잃었다. 재난은 한 사람으로부터 생겨 확대된다.
풍휴원(馮休元)의 이름은 풍습(馮習)이고 남군(南郡) 사람이다. 선주(先主)를 수행하여 촉(蜀)으로 들어갔다. 선주가 동쪽의 오(吳)를 정벌하러 갔을 때, 풍습(習)은 영군(領軍)으로 임명되어 여러 군대를 통솔했는데, 효정(猇亭)에서 크게 패배했다.
-계한보신찬
이때 육손 본인조차도 유비의 군세가 굳건하여 도저히 상대할수 없었지만 길어진 지구전 상황을 통해 유비의 병사들이 지친것을 언급하면서 이런 상황이니 내가 생각한대로 화공을 지시하면 이길 수 있다고 언급한다. 거기다 분명 초반에 유비의 진영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불리했고 결정적인 승리 요인은 육손의 기책인 화공으로 인한것이라는게 육손전에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즉, 유비군 자체는 그 늘어진 전선에도 불구하고 지구전에 병사들이 지친것 외에는 요충지를 굳게 점령하고 진영을 세워 군대가 모두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상대편인 육손 및 오나라 장수들 본인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전쟁 당사자들이 아닌 제3자 위치인 조비의 언급만으로 유비의 군 배치와 전술이 잘못되어서 패했다고 단언하긴 힘들다. 또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이릉전 당시 유비의 선봉인 풍습이 적을 가벼이 여겨 시기를 잃고 위험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한 사람으로부터 재난이 시작되어 확대 되었다고 했다. 즉, 근본적인 배치와 전술적인 문제라기보다 육손의 화공을 풍습이 제대로 막지 못해 유비군이 효정에서 연달아 격파되기 시작한 것이 이릉대전에서 유비군이 무너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유비가 전선을 늘여서 퇴각에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는게 억지이며 전혀 도움이 안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조비의 의견에 동조하는 쪽인데 이를 반박하는 측에선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고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주석이 권중달 번역 삼화 자치통감에 주석으로 엄연히 달려있고 육손전에도 이런기록이 어느정도 교차 검증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확실히 이렇게 각 지점마다 분산배치된 역마점을 통해서 시간을 끌어 퇴각할 수 있었다는 기록 자체를 무조건 무시하긴 어렵다.
그리고 애시당초 정말로 적의 전략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진형을 잘 짜고 있어도 순식간에 궤멸당하는건 고대로부터 예사로 있어 왔다. 풍습이 육손을 경시해 그의 화공에 제대로 대처 못했다면 갑작스러운 전세 전환에 병력붕괴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 와중에 유비가 긴급하게 수습하긴 했지만 기세를 타고 공격한 육손군에 패해서 수만의 병력을 잃고 그나마 미리 요충지마다 뿌려놓은 역참을 통해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남은 병력과 백제성으로 귀환해서 강주에서 올라오던 조운의 병력과 합쳐 오나라가 계속 유비를 신경쓰게 만든것이 이릉대전의 전말이자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보급이 원활해져 군대의 규모가 수백만 명으로 늘어나고, 기관총과 야포의 발전으로 인해 전선 교착이 일반화된 1차대전 시기까지 가지 않는 다음에야, 세계 전쟁사에서 군대의 주둔 진지를 이렇게 길게 배치한건 전무후무한 수준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거야 산업혁명까지 갈거 없이 조비부터가 비웃은 사항이지만...반면 오히려 정말로 군세를 수백 리에 걸쳐서 1차대전 수준으로 긴 전선에 군사를 골고루 분산해 뒀다면, 육손이 전방에서 불놀이를 해봐야 피해가 더 적었을 것이고 유비가 정말 그런식으로 병력을 배치했고 육손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유비 몰래 기군들을 동원해서 수백리에 걸친 병력이 고루 분산된 영을 전부 다 태워서 그만한 전과를 얻었다면 그 전무후무하다는 산업혁명 이후 1차대전 시기 기동력 수준의 미친 기동력을 선보이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며 육손이 그렇게 수백 리를 모두 일시에 기습하려면 장강 삼협을 엄청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건 육손 입장에서도 힘든 일인건 매한가지라는 반박도 있다.
일단 정사 육손전에서 육손이 화공으로 격파했다고 언급한 영채의 수는 40여 개에 불과하고 유비가 한번 이릉 근처 마안산에서 병력을 수습했다 격파된 것이 수만명인것으로 보아 유비의 병력자체가 7백 리 전체에 골고루 배치된 게 아니라 오히려 유비군과 육손군 주력 전열에 양측 병력이 집중되어 그곳에서 승패가 판가름 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비군 본대가 연의처럼 수십만 대군이 아니라 수만명 수준이라는건 다들 인정하는 사실이니만큼 늘어뜨려진 여러 진영을 동시에 털었다기 보단 지연전을 펼치던 육손이 한타싸움에서 화공을 이용한 절묘한 계책을 통해 대승리를 얻었고 한타싸움에서 대패한 유비의 진영이 견디지 못하고 모두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리하면 유비의 본군이 주력을 모은 상태에서 선봉부터 화공으로 격파되어 큰 피해를 입은 것이지 유비가 수만병력을 일일히 세세하게 분산배치해서 망한 것이 아니며 수백리에 걸친 전 영역을 육손이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는 가정은 하기 힘들고, 또 기지가 늘어지면서 진영의 방어력이 허술해졌기에 승리했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오히려 분산배치 된 역으로 인해 피해를 간신히 수습해 도망갔다는 기록도 분명히 존재한다. 거기다 육손의 공격전에 유비의 진영은 요충지고 굳세게 지키고 있어 공격하면 불리하다고 오나라 장수들이 모두 공격을 반대하고 있으니 굳이 더 유비의 진영이 무조건 잘못된 진영이 아니라는 반박이 필요하진 않을것이다. 주연이나 한당을 비롯한 나머지 오나라 장수들 역시 뛰어난 장수들이다. 그저 그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육손이 군재가 더 뛰어났을 따름이다.
5.1. IF: 촉한이 이릉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촉한은 형주를 회복하고 인적 자원과 국력을 유지했을 것이나 촉오동맹은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유비가 털렸던 이릉, 자귀 여기는 촉한 동쪽 국경인 파동이나 영안 앞임과 동시에 강릉의 앞마당이다. 아마 육군은 그 근처에 있었고 황권이 이끌던 수군은 상용이나 신성쪽에서 강릉으로 들어갈려고 했던듯 하다. 물론 북쪽 위나라 견제의 목적이 최우선 과제였겠지만.
만약에 유비가 이릉에서 오나라의 본군을 격파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일단 거길 넘어서면 지형상 촉한군을 막을 곳이 없다. 게다가 황권이 남하해서 함께 형주로 들어가버리면 그야말로 형주는 그냥 접수하는 것이다. 삼국지 게임으로 따지면 강릉쪽인 남군(강릉은 현이지 군이 아님)과 무릉쪽인 공안을 먹어버리면 오나라도 할 일이 없어진다. 형주 방어의 중심은 이릉(=서릉), 강릉을 포함한 남군이고 공안도 강동으로 오고가는 요충지이니까. 실제 나중에 오나라도 그렇게 방어선을 구축했다.
또 이릉에서 유비가 살았다면 마량을 포함해서 부동, 정기, 장남, 풍습 등 전투 중 사망을 감안해도 비록 상장은 없지만 훗날 촉한의 북벌의 대장들이 될만한 자원들이 상당수 그대로 살게되고 무엇보다 황권도 촉에 있다는 의미가 크다. 적어도 황권과 마량이라면 훗날 제갈량이 이엄이나 마속의 삽질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특히 황권은 제갈량 사후에도 꽤 더 살다갔는데 만약 촉한에 있었다면 제갈량에 이어 촉한사영의 버금가는 촉한의 최중요 중신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형주 수복은 둘째치고 양주까지 들어가 오를 멸망시키는건 사실 유비 본인도 무리임을 알고 고려치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전선이 길어지면 어딘가에 문제가 생기는 건 뻔한 이치.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결국 탈이 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장 유비가 보급로 차단을 방지하기 위해 역참을 세우고 소수 병력을 뿌린것이라며 유비의 진영배치가 불가피한 일이라는 얘기도 나오는판인데 이런 상태에서 손권의 본진인 양주까지 진군한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유비 입장에선 방어하는 오군의 숫자도 만만치 않고 이민족들을 동원해도 압도적인 병력이 아닌만큼 이들을 뚫고 형주를 수복하는 것만해도 벅찰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결국 이릉에서 대차게 박살나 거의 모든걸 잃고 목숨만 건져 도망간 최악의 패배가 나왔는데 형주 수복 이상으로 욕심을 부려 양주로 진격했다간 이릉보다 더 최악의 결과로 유비 자신이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 양주는 손오의 본진이자 호족들의 세력이 매우 강한 곳이라 설령 얻어봤자 현지의 호응을 받지 못하면 다스리기도 어려운 곳이다.
거기다 위나라의 공격도 무시할 수 없다. 유비가 굳이 황권을 북쪽으로 보내 위를 대비케한 것도 필시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면 조비가 내려올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즉 원래 이릉대전 이후 육손과 손권이 영안의 유비를 경계해 먼저 화친을 제의했던 것처럼 유비도 형주를 수복해 관우의 원한을 갚고 오나라를 징벌한 원래의 목적을 이루고서는 오나라랑 제휴하여 위나라의 침공을 막고 더 나아가 위나라를 도모하고 한실을 중흥시킬려는 원대한 목표를 실행키 위해 더 이상의 침공은 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애당초 형주 수복의 목적 자체가 관우의 복수도 복수지만 융중대의 회복인 측면도 크니까. 융중대에선 어찌되었던 오나라는 중원 접수할 때까지 적대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맹의 대상이면 몰라도. 물론 처음에 손오가 화친 사신을 보냈을때는 유비가 방방 날뛰었다만 그건 형주를 아직 되찾지 못했으니까 나온 반응일 뿐이다. 당장 이릉대패 이후 형주수복의 가능성이 사라지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상호간 화친하자는 손권측의 제안을 받은 것이었지 않은가.
따라서 이릉전투의 경우 촉한이 형주를 수복했어도 이후 촉오동맹은 성립될 가능성이 높다. 이건 이릉대전 이후의 위의 동향과 촉오의 재동맹 설립만 봐도 알 수 있는 문제인데 이릉대전에서 유비의 대 참패 이후 조비는 죽기전까지 매년 남벌을 시도했다. 횟수로만 따저도 3회이고 시도하려다 조비가 죽어 취소된것까지 합치면 4년간 4회의 남정을 시도한건데 촉의 국경돌파 자체의 어려움, 형주를 취한 이후의 오에 대한 위험 인식 등을 따져보더라도 지나친 부분이 있다. 이는 익숙치 않은 수전이라도 오를 도모하는것이 전쟁패배 후 만신창이가 되고 유비가 사망해 걱정이 없어진 촉한보다 진공이 수월할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이릉전투로 유비가 형주를 다시 수복했다면 오나 촉한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조비가 집중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고 동맹이 다시 체결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형주 공방전 부터 조비 사망까지 손권의 외교적 행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익양대치 후 상호간 국경이 정리 되고 동맹이 유지됨.
• 이후 관우에 대한 혼인 제안
• 형주 공방전
• 조비가 즉위하자 촉에 대비하기 위해 위에 칭신하고 공물바침, 볼모도 보낼것을 약속함
• 유비가 이릉으로 진공하자 위를 공격하라는 서신을 보냄
• 이릉전투에서 승리하자 조비로부터 볼모를 보내라는 명을 무시. 이후 조비에게 3년동안 매년 공격받음
• 조비가 죽어 결과적으로 위의 침공을 막아냄
최초의 손유동맹과 이후 촉오동맹을 제외하면 손권 생전에 거의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진행된 외교적 성과로 조조가 요구했던 칭신과 볼모는 개무시하며 적벽에서 유비를 동맹으로 삼아 조조를 이긴것처럼 유비가 공격하기전 조비에게 칭신후 볼모까지 보낸다는 외교적 선택으로 온전히 유비와의 전투를 진행할 수 있게 한 부분이다. 어느부분을 봐도 미래를 본 외교적 협상은 손권에게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때에만 유기적인 외교를 보일수 있었다는것은 바꿔말하면 유비로 인한 위기가 왔을때 조비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유비와 재동맹을 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말이 된다.
다른것을 다 떠나서 위에 볼모를 보낸다고 약속했지만 조비가 필요했을 당시에 볼모의 요청에 대한것을 잘 피해갔던 반면 유비를 이겨서 조비가 필요없다고 생각하자마자 배신에 가까운 형태로 조비를 버리게 되는데 이는 조비가 필요없다고 판단한것과는 별개로 죽어도 볼모를 보내지 않겠다는 손권의 판단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이릉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더라도 조비는 볼모를 요청하고 손권이 이를 무시하면 바로 촉한이 아닌 오를 공격했을것이며 위의 공격을 한번이라도 막지 못했다면 오는 그대로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릉전투를 전후해서 조비는 손권의 칭신을 크게 신뢰한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유엽은 촉한을 도와서 오를 정벌하자는 계책을 내놓았었는데 이는 이릉전투 당시에 명분과 실리가 최소한 손권에게 있지 않았으며 조비가 오를 공격하는 것도 조비가 정무적으로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판단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조비는 손권을 신뢰하고 오의 정벌론을 잠재우지만 이후 손권에게 배신당한다.(...) 반대로 촉한이 이릉전투에서 이겨서 형주를 탈환한다면 위축된 손권이 조비의 통수를 때리지 못해서 오위의 유착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릉대전의 승패가 어찌되었더라도 촉과 오 양측은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릉에서 지고 촉이 오와 동맹을 맺은것처럼 오가 지더라도 촉과 오는 동맹을 맺었을것이다. 이릉전투 종료까지 명분은 분명하게 유비에게 있었음에도 이후 오와 동맹이 성사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반면 유비가 승리했다면 원 역사와 반대로 이릉전 이후의 조위와 손오의 싸움이 조위와 촉한의 2차전으로 바뀌고 피해를 입은 손오가 간을 보는 형태였을 가능성도 높은데, 조비가 손오 상대로 보여준 패착을 생각하면 만전을 갖춘 유비, 그리고 형주까지 있는 촉한을 상대로 얼마나 선전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5.2. IF: 위나라가 오나라에 공격을 퍼부었다면?
유비가 최소 형주 전체 복속을 목표로 진군중이므로 위는 항상 치던 유수구 라인을 택할 것이고, 오 입장에서는 양면전선을 강요 받게 된다, 다만 위나라가 번성공방전이나 유수구 전투를 살펴 봤을때 수군관련 전적이 특히 좋지 않고, 그동안에도 유수구 방어라인을 뚫지는 못했으므로 이 정도로 전선이 나뉘었을때도 장강 방어선이 뚫릴지는 미지수이다. 특히 당대 오나라는 10만의 군사를 동원할수 있었는데, 이릉전선에 5~6만을 투입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에 하나 위나라가 오나라의 뒷통수를 칠때를 대비해 유수구 라인에 예비대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고 그 수는 4~5만 가량 되었을것이다, 수전에서 그닥 성과가 없었었던 위나라가 섣불리 공격할시 일단 막아낼 병력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조비의 군사적 능력을 생각해 봤을때 원정의 승리 가능성이 높다고도 할 수 없다. 물론 양면전선의 특성상 오나라가 쉽게 무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만약 유수구 방어라인이 뚫려 위가 오의 핵심을 장악하게 된다면 결국 형주와 익주를 쥔 촉한과 나머지를 다 쥔 위가 싸우는 구도가 나오는데 이러면 촉한이 불리한 구도가 된다. 위군이 장강 도하에 성공해 오의 본거를 장악할 경우, 장강 방어선의 동쪽이 무력화되어 힘겹게 형주를 쥔 메리트가 사라져버리므로 유비는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동진해 위군과 싸워야 한다. 여기서 촉의 수군이 장강에 도하한 위군의 배후를 기적적으로 차단하는 그림이 나와줘야 승산이 있다. 이러면 주유가 바라던 천하이분이 촉 입장에서 실현되는건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유엽이 예측한대로 촉한이 불리한 구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오나라의 유수구 전선이 유지될 경우, 오나라가 유비상대로 화친을 제의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여기서 유비가 그 제의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으나 설령 오+촉이 연합해 위와 대항하더라도 오,촉 양측모두 구밀복검 상태란걸 알고 서로 불신할텐데, 이럴경우 연합하지 않는것보다 못한 연합이 될 가능성이 높다.그렇기에 더 진격하면 영토가 더 늘어날텐데 유비가 화친을 안받아주면 위만 막을순 없으므로 위가 통수쳤다면 충분히 이득봤을 가능성이 있다. 유비 입장에선 오나라 그대로 조져 들어가 형주 다 먹기 더 쉬워질것이며 그 여세로 위랑 그대로 다이다이 까지 갈 생각이던 형주 수복 후 촉 본국이랑 전력 정비해서 위랑 전면전 붙을 대비를 하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