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아버지 올리바 디온도 그리 경제력이 있거나 좋은 아빠는 아니었습니다. 다섯 쌍둥이 아네트, 세실, 에밀리, 마리, 이본이 태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시카고에서 열리는 ‘Century of Progress’라는 전시 박람회에 자신의 딸들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 엘지레 디온은 남편의 비상식적인 행동에 반발했죠. 부모의 서명이 필요한 계약서에 서명을 거부해 결국 계약은 파기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섣부른 행동은 딸들과 가족이 영영 헤어지는 빌미가 됩니다. 캐나다 정부가 부모의 착취를 막고 쌍둥이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부모에게 양육권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18세가 될 때까지 적십자사가 양육하고 모든 의료비를 부담하라는 후견인 제도를 내세웠습니다.
부모와 떨어져 고립된 생활을 시작하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부는 다섯 쌍둥이의 인기가 심상치 않자 딴생각을 품기 시작합니다. 관광 산업에 쌍둥이를 이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죠. 정부는 다섯 쌍둥이가 사는 거처를 퀸틀랜드(Quintland)라고 이름 짓습니다. 아이들은 과학자와 간호사들에 둘러싸여 생활하게 됩니다. 관람객들은 하루에 3타임씩 그들의 밥 먹는 모습,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 등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 반경에 울타리를 치고 마치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쌍둥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람하게 한 것입니다.
그냥 조용히 그들을 관찰하고 떠나는 방문객은 드물었습니다. 아이들을 보고 흥분하거나 혹은 짜증을 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관람 규정이 생겼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죠. 얼마나 스트레스였을까요? 주말에는 수천 명의 관람객과 수백 대의 자동차가 쌍둥이들을 보러 몰려들었고 쌍둥이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소녀들은 가족도 만날 수 없었고 학교 대신 홈스쿨링을 하느라 여느 또래 친구와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된 채 성장하게 됩니다.
전문가가 쌍둥이들을 연구한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동물원에 불과했던 퀸틀랜드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1930년대 다섯 쌍둥이의 집을 방문한 누적 관광객 3백만 명을 기록하며 퀸틀랜드는 나이아가라 폭포보다 더 많은 관광 수입을 올립니다.
또한 캐나다 정부는 쌍둥이의 굿즈를 판매에 큰돈을 벌었습니다. 쌍둥이들에게 돌아오는 수익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추정치에 따르면 정부가 쌍둥이들을 이용해 벌어들인 수익이 약 5억 달러였다고 합니다. 이 돈으로 온타리오 주는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쌍둥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돈방석에 앉았습니다. 쌍둥이들을 적극적으로 정부에 넘긴 대포(Dafoe) 박사는 쌍둥이 출산에 관한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며 명예와 부를 얻었고 쌍둥이의 아버지 올리바 디온은 다산의 아이콘으로 인지도를 얻으며 자녀가 없는 여성들을 만나 기를 전달해준다는 명목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쌍둥이들의 출산을 도운 조산사마저 쌍둥이의 사인과 액자 사진, 숟가락, 컵, 접시, 명판, 막대사탕, 책, 엽서, 인형을 파는 상점을 운영했습니다.
어른들이 눈먼 돈을 버는 동안 쌍둥이들은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았습니다. 비싼 장난감, 풍부한 먹거리 그리고 유행하는 예쁜 옷으로 포장된 채 의사, 간호사, 경찰관, 가정부, 선생님으로부터 최고의 보살핌과 의료 혜택을 받았습니다. 생일 때마다 열리는 성대한 생일 축하 파티는 언론을 통해 전국에 공개됐죠. 그러나 정작 가족과는 만날 수 없습니다. 쌍둥이들의 원래 가족은 프랑스어를 썼지만 소녀들은 영어를 쓰며 살아야 했습니다.
‘국민 아기’가 된 쌍둥이들은 비누, 치약, 시리얼, 우유 등 다양한 제품의 광고 모델이 되기도 했고 TIME지와 LIFE지의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또 <컨트리 닥터> 등 세 편의 장편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나마 ‘정상적’이었던 쌍둥이의 엄마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9년간 몸부림쳤습니다. 그 고통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가족과 쌍둥이에 대한 동정 여론과 함께 정부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캐나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9세가 된 다섯 쌍둥이를 원래 가족에게 보냈죠. 그러나 가족들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버린 걸까요? 기본적인 언어조차 통하지 않으니 쌍둥이들이 부모 형제와 정상적인 가족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쌍둥이들은 비록 가족의 정은 없었지만 서로 똘똘 뭉쳐 살았습니다. 다만 물질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다가 가난한 집안에서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라는 작자는 여전히 딸들의 인기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수작을 포기하지 않았죠. 심지어 딸들에게 성적 학대까지 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합니다.
쌍둥이들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가족이 있는 집을 ‘우리가 아는 가장 슬픈 집’이라고 묘사했습니다.
18세 생일이 되자 소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떠나 가족과의 모든 연락을 끊어버립니다. 그 와중에 뇌전증에 걸린 넷째 에밀리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스무 살에 사망하고 맙니다.
대중의 관심과 동떨어진 삶을 살던 이들은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 다시 언론에 등장합니다. 온타리오 주 정부의 잘못된 자금 관리에 대한 공개 조사 요구가 대두되면서 쌍둥이들에 대한 심각한 인권 침해 사례가 알려지기 시작한 거죠.
비영리단체 멀티플 벌스 캐나다의 의장 해더 맥컬리는 “그들의 삶은 동물원 속 동물과 다름 없었다”며 “주 정부와 의사는 쌍둥이들의 귀여운 이미지를 이용해 장사를 했다”라고 논평합니다. 결국 다섯 쌍둥이 중 생존해 있는 둘째 아네트와 셋째 세실은 주 정부로부터 배상금을 받습니다만 두 사람은 “우리의 망가진 삶을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지난 2017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인생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그들이 살았던 생가를 많은 사람이 방문할 수 있는 박물관 공간을 꾸미겠다는 계획을 알렸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말이죠.
(펌글)
첫댓글 요즘 세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사연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