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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로부터냐
요 19:8-16
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요 19:8-16 /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어 9) 예수를 관저 안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서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대답을 하시지 않았다. 10) `내게 말하지 않을 작정인가? 내게는 너를 놓아줄 권한도,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하고 빌라도가 말하자 11) 그제서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하나님께 권한을 받지 않았던들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들의 죄가 더 크다.' 12) 빌라도는 가능한 한 예수를 놓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이 큰소리로 말하였다. `만일 총독께서 이 자를 놓아 주신다면 각하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13)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다시 예수를 그들 앞에 데리고 나와 돌을 깔아놓은 광장 위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14) 때는 바로 유월절 전날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하였다. `자. 여기 당신들의 왕이 있소.' 15) 그들이 소리쳤다. `죽이시오.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뭐라고? 당신들의 왕을 나더러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빌라도가 되묻자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 하고 대제사장들이 소리질렀다. 16) 그러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그들에게 내어 주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힘썼지만 유대인들의 소리는 빌라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두려운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내어주어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합니다. 불의한 판결에 의하여 예수께서는 십자가형이 언도되었습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8-11) 빌라도가 예수께 던진 질문인 "너는 어디로부터냐?"(9)는 유대인들의 대답에 의한 질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겼기에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마땅히 죽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네가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면 인간이냐?'라는 질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빌라도에 대한 예수의 책망이기도 합니다. 지금 빌라도는 그런 문제들을 판단하기에 합당하지도 않고 그런 진리를 다룰 능력도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줄 권세도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자, 하늘(위)에서 주지 않으셨다면 해할 권한이 없을 것이라 선언하시며 이 일이 하나님의 계획과 허락하심 가운데 진행되고 있음을 선언합니다. 예수의 수난이 유대인들의 죄악과 빌라도의 정치적 이해타산 가운데 움직여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순(12-16)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의 악함과 모순은 두 가지로 드러납니다. 첫째, 이방인 총독의 관저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종교적으로는 거룩함을 유지하는 외형을 유지하면서(18:28), 예수를 죽이려 불의를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가이사를 왕이라고 선포함으로써(15) 하나님의 유일신 사상을 은연중에 저버리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종교인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속에는 악이 가득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부르십니다. 달콤한 말 뒤에는 죽이는 독이 가득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보인 종교적인 불의함과 모순이 나에게는 없습니까?
적용: 종교적인 외형으로 포장되었지만, 세상 그 어떤 모습보다도 더한 불의함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의 모순된 모습이 있다면 고백하며 회개합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이솝우화 ‘해와 바람’에서처럼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 벗기기 내기에서 강하고 욕심 많고 거만한 바람을 얌전하고 온화한 햇님이 이겼습니다. 올리브 나무가 갈대 앞에서 힘자랑을 했을 때에도 바람이 세게 불자 올리브 나무는 부러졌지만 갈대는 살아남았습니다. 온유한 자는 연약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온유한 자가 이깁니다.
< 설 교 >
보라 너희 왕이로다
신성종 목사
“보라 너희 왕이로다”는 본문의 말씀은 빌라도가 조롱삼아 아무렇게나 유대인들에게 지껄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진리를 말했습니다. 다만 그 자신이 믿지 않았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빌라도라고 하는 정치인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역사의 거울 앞에서 우리의 이지러진 영적 얼굴을 보고 더러운 부분들을 이 시간 깨끗이 씻는 기회가 되고, 정말 원리를 가지고 사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발리도의 착각(10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0절)고 말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빌라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빌라도는 로마의 디베료 황제로부터 유다지역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은 생사 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던 가이사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빌라도는 유대지역과 사마리와 그리고 사해부근까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 사람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인기가 전혀 없었습니다. 정치만을 추구하고 종교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빌라도는 원리가 없는, 줏대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11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 이런 착각을 했을까요? 인간에게는 몇 가지의 착각이 있습니다.
(1)[시각적 착각]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정확한 것 같아도 때로는 우리를 속입니다. 그것을 이용한 것이 마술입니다. 시각적 착각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터널 비전]입니다. 터널에서 밖을 보면 앞에 있는 조금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닌데 문제는 그것을 전부로 착각합니다.
(2)[사고의 착각]이 있습니다.
김 선운 목사님은 저의 은사로서 우리들에게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지식이 자기의 세계이다”. 그래요, 무식하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무지란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을 가져야 넓게 볼 수 있습니다.
(3)[경험의 착각]이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일부분만 경험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만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편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는 미셀 위를 좋아합니다. 남녀의 성의 구별에 대해서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고정관념을 버리려고 남자만의 대회에 도전하는 그 생각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빌라도 뿐 아니라 우리도 6.25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25는 하나님께서 이 승만 박사를 초대 대통령으로 삼아 통일의 기초인 민족복음화를 이룩하기를 바랐지만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하자 북에 준비한 붉은 몽둥이를 사용해서 친 것이 6.25입니다.
2. 왜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석방시키지 못했는가?
참 이상한 것은 당시 빌라도는 유다지역의 총독으로 사형권도 있고, 정치적으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총독이었으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2절상반절에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여론에 밀려(12절하) 두려워 굴복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빌라도는 원리가 없는 적당주의 자였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에게 인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생각을 접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한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18:38절에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19:4절에서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두 번째 고백했습니다. 또 19:6절에서도 세 번째로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빌라도는 바로 우리의 얼굴입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위기에 따라 하는 원리도 없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러나 사실입이다.
빌라도가 떨었던 이유가 12절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를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의 반역자로 몰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두려워했습니다.
요컨대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시키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6.25도 한국 교회로 하여금 깨달으라는 채찍일 뿐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적화를 막아주셨던 것입니다.
3. 왕 되신 예수님께 대한 자세
(1)빌라도의 자세
14절 상반 절에 보면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은 것은 아닙니다. 일종의 조롱의 뜻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어떤 의미로 말했든 그것은 진리였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믿지 못했고, 주장하지 못했고, 그렇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런 원리 없는 자는 아닙니까?
(2)유대인들의 자세
15절 상반 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고. 이유는 15절 하반 절에 나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로마의 황제와 법을 존중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외식 적으로, 자기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 말을 했던 것뿐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1)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서 자기들의 라이벌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이해관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였던 것입니다.
(2)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로 인해서 데모가 일어나고 군종의 폭동이 일어나면 로마 군대가 개입되고 그러면 지금 유지하고 있는 반만큼의 자유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3)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 성경에 어긋난다고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메시아가 왔을 때는 그를 죽이는 우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들의 예수님께 자세는 어떤 것입니까? 바라기는 역사는 다 하나님의 주권 밑에 있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축원합니다.
4. 빌라도의 씻지 못할 죄
결국 빌라도는 역사 남는 씻지 못할 죄를 범했습니다. 16절에 보면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게 못 박도록 넘겨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1)유대인들의 다수의 반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무서운 심리적 부담입니다. 7-8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죄목을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한데 대해 8절에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라고 했습니다.
혹여나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간 동안 두려워했지 사실은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도 말합니다.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41:10절 상).
(2)원리 없이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리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이 바로 우리의 원리고, 자고 저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표준입니다. 그의 삶이 바로 우리의 원리입니다.
(3)자기의 정치적 입지에 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여론이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우선 도움이 되는 것만 봅니다. 그래서 큰 정치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4)아내의 꿈과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마27:19절에 나옵니다.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물론 아내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아내의 견해를 존중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5. 빌라도의 죄의 결과는?
성경에는 빌라도의 죄의 결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사가인 요세퍼스는 빌라도의 최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빌라도가 사마리아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다가 그만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상관인 수리아의 총독, 비테리우스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총독 직에서 쫓겨나 로마의 황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 때 빌라도는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비엔나 시에 망명했다가 결국 자살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빌라도는 인기 따라 가다가 결국 인기와 함께 망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따라갑니까?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6.25 56주년을 마지하면서 역사가 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6.25 56주년을 마지하면서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수의 견해에 흔들리지도 말고, 또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던 유대인들 같은 편견에 넘어가도 안 됩니다.
과연 지금 나를 통치하는 왕이 누구입니까? 나 자신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빌라도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참 왕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또 유대인들처럼 자기들 편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오늘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참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 그의 뜻대로 살아야 승리하고, 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영접하고 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로 6.25를 맞는 우리의 바른 자세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요 19:1-16 / 김준식 목사
우리는 이제까지 공관복음을 중심으로 빌라도의 예수님 심문을 알아 보았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을 중심으로 빌라도에게 받는 2차 심문을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공관복음의 예수님 심문은 사건 중심이지만 요한복음19장에는 빌라도의 심문과정에서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에 오고 간 대화와 예 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심리 상태를 알아 보겠습니다. 그가 요한복음 18, 19장에서 세 번이나 예수 님의 무죄를 선언했는데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내어 주어야만 했 던 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채찍질 형벌(요19:1-4)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명도 찾지 못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월절 특사로 석방시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시도는 무리들이 오히려 바라바의 석방을 원함으로 인해 실패하고 맙니다. 이 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기 위해 2차적으로 시도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능욕 함으로써 유대인들에게 만족감을 주어 그들의 감정을 무마시킨 후 예수님을 놓아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 마저 실패하고 맙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채찍질에 대해 헬라어 용어 프 라게로사스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형벌을 표현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십자 가 형에 대한 공식적인 선고가 있은 후에 있는 채찍질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19: 1에서의 채찍질은 헬라어 에마스키고센을 사용하여 십자가 사형선고 후 공식적인 채찍질 외에 당한 채찍질 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두 번이나 채찍질을 당한 것입니다. 바로 그 채찍질이 이 채찍질 것입니다.
로마의 채찍질 형벌은 죄인을 기둥에 묶어 놓고 납 덩어리나 뾰족한 동물의 뼈가 여러 갈래로 달린 채찍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만 맞아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가끔은 이 형벌의 집 행 중에 죄수가 죽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 번만 당했어야만 한 채찍질을 두번이나 당했으 니 얼마나 곤비했겠습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해서 채찍질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큰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에 쓰러지고 자빠지게 됨으 로 로마군인들은 죄수가 십자가를 메고 가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므로 구레네 시몬을 잡아 십자 가를 대신 지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 채찍질 형벌은 B.C. 7 00년 전 이사야 53:5의 말 씀을 성취한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 고 자색 옷을 입히고’ 했는데 이 가시는 예루살렘 근처의 야생가시인데 잘 휘어져 엮어 머리에 씌 우기 쉬우며 가시는 흉측한 못과 같이 생겼는데 잎사귀는 실제로 왕이나 장군들의 면류관에 사용하 는 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조롱하며 고통을 가하기에 좋았을 것입니다. 한편 아담과 하와의 타 락으로 인해 이 땅에 뒤덮힌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인류에게 내린 모든 저주를 짊어지신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혔습니다. 이 옷은 당시 에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 입혀진 자색옷은 아마도 헤롯이나 빌라도가 입다가 버린 것이었을 것입니다. 잔악한 로마 군인들은 가시로 된 면류관을 씌우고 낡아 빠진 홍포를 입혔으며 갈대로 왕의 홀을 흉내 내어 손에 쥐게 함으로써 예수님을 능멸했습니다.
그리고 앞에 와서 말하기를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많은 병사들이 반복해서 가짜 경례 를 하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마태복음 27:30에 의하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생전에 사람들에게 두번이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한번은 마태복음 2:1에서 동방박사들에 의해 유대인의 왕이라 경배를 받으셨고 두 번째는 지금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갖은 모욕을 당하시며 조롱 섞인 경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진정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할 때가 있을 것이라 예 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64에. ‘예수께서 이르 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 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했습니다.
4-5절 빌라도는 예수님이 가시 관으로 인해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고 자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관정 밖으로 데려 나오면서 다 시 한번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빌라도는 이런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을 통해 무리들의 동정심을 얻어보려 했습니다.
둘째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굴복됨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 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농담 섞인 사면 제안을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예 수님의 피, 그것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게 있었어도 채찍질이나 조롱만으로 만인의 죄를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가장 비참하게 죽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주님은 점점 그런 죽음에 가까워 가고 있습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 대한 빌라도의 세번째 무 죄 선언입니다(4절, 18:38, 19:6).
빌라도는 자신의 명령이 없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부터 정치적인 이유로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재미 있는 것은 유대인들도 자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가이사에게 대한 그의 불충성을 고자질 할까 봐 빌라 도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이 두려움을 교묘히 정치적으로 이용합니다. 본래 십자가 형벌은 유대인에 대한 처형법이 아니었습 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러한 이방적인 처형 방법이 유대 땅에서 시행된다는 점에 대해 불괘 하게 생각했으나 로마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끊임 없이 그렇게 처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로마인인 빌라도가 십자가 형 시행을 꺼리는 반면, 유대인들은 오히려 십자 가 형을 요구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은 이사야 53:6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고, 그는 산자의 땅에서 끊어져 야 했으며(이사야 53:8), 또 그는 구약적 저주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나무에 달려야 했기 때문입니 다(신 21:23, 갈 3:13).
‘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정치적인 죄, 즉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유 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예수님 의 무죄를 선언하는 것을 본 후 이제는 더 이상 정치적 혐의를 씌운다는 것은 소용이 없음을 알고 그를 율법의 죄목을 씌워 정죄하려는 것입니다. 즉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처한 다는 율법의 죄목을 씌워 정죄하려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여러 번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6:64, 요3:16, 5:18, 8:54, 10:30, 33, 36).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고소 를 심문이 시작될 처음부터 빌라도 앞에 제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처음에는 이런 종교적인 문제가 이방인 정치가인 빌라도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사형을 유도하기 힘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정부가 광활한 영토와 여러 민족들을 통치하는 방법은, 종교문제 등 민족 내부의 문제는 되도록 자체 해결하도록 하고, 백성의 폭동이나 반역의 소지가 있는 중대한 국가적 문제에만 엄격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고소를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 안에 들어갑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주장이었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주장이 사형 에 해당된다는 율법의 규정으로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사형에 처하려 했던 유대인들의 예상은 빗나 갔습니다. 관정 안으로 들어간 빌라도가 두려워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는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인들의 보편적 사고였던 신이 인간의 몸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 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가 재판 중에 아내로부터의 전날 밤에 꾼 꿈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예수님에게서 신적 권능을 느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데도 불구하고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한 선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빌라도의 우유부단함 과 소심함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것입니다.
‘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 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에서 군중들에게 굴복한 것이나 마찬 가지인 빌라도는 더 예수님과 대화하기 위해 다시 관정 안으로 들어갑니다. ‘너는 어디로서냐 ’ 하고 묻습 니다. 물론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빌라도가 이렇게 묻는 것은 육신적 출처가 아니 라 영적인 기원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신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빌라도가 하나님과 그 아들에 관한 지식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를 진정으로 받아 들일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 이적을 소문과 보고로 이미 듣고 있었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람이 아니고 신이라면 십자가로도 죽일 수 없을 것이고, 만약 피치 못 해 자신이 십자가 형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에 그 화가 자신에게 돌아 오지나 않을 까봐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질문은 영적인 깨달음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육신 적인 안위를 생각해서였습니다.
이런 빌라도이기에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빌 라도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을 받을 자격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빌라도가 조금만 주의 깊은 사람이었다면 이미 지금까지 나누었던 예수님과의 대화로도 충분히 복음의 본질을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두 번이나 요한복음에서의 빌라도의 일차심문과 이차 심문에 포커스를 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빌라도와의 대화를 상세히 다룬 것은 빌라도에게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건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이 무 죄하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했건만 예수님을 죽이도록 선고한 것은 그가 주님과의 대면에서 복음 을 영접하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는 즉석에서 구원받고 낙 원에 갔는가 하면 마태복음 27:54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일어나는 몇 가지 자연 현 상을 보고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음 고백하는 백부장과 그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침묵은 복음서 기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도 침묵하셨고 헤롯 앞에서도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고 마가복음 15:4에 의하면 일차 빌라도 심문 때도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그 많은 고소에 대해서도 전혀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가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하나 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했을 지라도 그 당시 로마인들이 만신전에서의 경배를 권유하던 분위기에서 이 로마 고관에게 영적 각성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 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 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본문에 나타난 말 가운데서도 다시 한 번 빌라도의 예수 석방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먼저 석방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빌라도의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음 을 보여 줍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당시 대제사장이나 군중들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시행 되어 졌으나 궁극적으로는 빌라도가 예수를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을 쥐고 있었음에도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고 그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에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가야바나 산헤드린 공회 를 두고 한 말입니다. 유대인 혹은 가야바가 행한 예수님에 대한 죄는 빌라도의 죄보다 더 큽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참 메시야라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더욱 좋은 환경에 있었고 모든 지식에도 밝 았는데, 악독한 결심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하고 넘겨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비해 예 수님의 무죄성을 인정하며 판결을 주저하고 마지 못해 십자가 형을 허용하는 빌리도의 죄는 더 작 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야바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범죄의 동기 제공자이고 빌라도가 수행자라면 빌라도의 죄 역시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에 대한 빌라도의 사형선고
‘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 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했 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처형을 소리높혀 외쳤을 것이고 빌라도는 지금까지 보다 더 큰 노력으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군병들에게 군중들이 볼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 덜 고통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란 이 말은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빌라도의 결정적 인 태도에 당황한 유대인들은 평소 로마에 대해 가졌던 증오심을 숨기고 로마 황제에게 가장 충성 스러운 백성들임을 가장하고 있습니다. 이제 군중들은 빌라도를 직접 협박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이사에게 대한 반역자로 규정하고 이런 반역자를 석방하면 빌라도 자신도 반역에 가담하는 것이 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지방행정관에게 있어서 모반의 혐의는 극약과도 같이 위험한 것이 었습니다. 따라서 의지가 약한 빌라도에게 있어서 이러한 백성들의 외침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본래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충성스러운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빌라도였지만 자신에 게 덮어 씌워질 반역의 혐의와 더불어 계속될 유대인들의 폭동과 같은 비협조로 인해 몰락할 자신 의 입지를 생각해 보면 아찔했을 것입니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 니이다.’ 라는 이 말은 빌라도의 의지를 꺾는 결정적인 말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했는 데 이 말은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협박을 이해하고 수납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빌라도의 마음이 이 렇게 변한 것은 디베료 황제에 대한 공포가 예수님에 대한 경외심보다 더 큰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에서 이제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최종 사형 판결을 하기 위해 관정 안에 있었던 예 수님을 관정 밖으로 데리고 나와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 예비일이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공식 선언되는 이 때의 중요성 때문에 날짜와 시간을 정확 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날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로서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과 무교절을 준비하는 유월절 예비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자마자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 을 하고 새벽 이른 시간에 빌라도에게 넘긴 것은 사형이 집행되기에 적절치 못한 유월절 절기가 이르기 전에 예수님을 빨리 처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때는 제 육시라 했습니다. 이 시간은 한 밤중으로부터 정오까지를 측정하는 로마식 시간법으로 오 전 6시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전 6시에 빌라도에게 판결을 받으시고 골고다까지 끌려 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셨으므로 오전 9시가 되어서야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예수님은 채찍질로 인 해 지칠 대로 지쳐 십자가를 지기도 힘들었습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에 대한 조롱보다는 유대인들에 대한 빌라도의 멸시가 드러난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도 예수님을 석방하려는 시도가 수포로 돌아 간데 대한 빌라도의 분노가 포함된 말입니다. ‘이렇게 피투성이의 인간이 바로 너희가 고발하는 가이사의 대적자 유대인의 왕이라니 우습구나’ 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의 조롱에 마음이 상한 유대인들이 말 그대로 폭도가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이루기 위해 이성을 상실한 채 큰 소리를 외치고 있음을 보여 줍 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에서 빌라도는 이제 예수님을 풀어 주려 는 마지막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즉 악을 행하여 처형당할 사람이 왕이라고 불린다면 유대인들 자 신에게 말 할 수 없는 굴욕과 모멸감을 줄 것이라는 점을 착안하여 이제 그런 유대인의 수치감에 호소합니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에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과 유대인의 군신 관계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있어 상식이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백성도 아닌 대제사 장들의 입에서 로마 황제 외에는 왕권을 가진 자가 없다는 이 같은 말이 나온 것은 충격적입니다. 이렇게 저들은 자신들의 교권주의적 독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왕되심 마저 부인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처형하기를 원하는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심에 대한 이 해도 전혀 없는 비열한 인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왕이신 하 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반역을 저질렀다면 빌라도는 이제 자신의 공직에 대한 반역을 범한 것입 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로마 사람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본절 은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에게 넘겨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사도요한은 유대인들을 예수님을 십자 가에 못박은 주체로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 과정에서 로마 군병들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은 후 옷들을 나누어 가지던 자들이 군병들이었음을 말하고, 십자가형의 집 행 과정에서도 충분한 수효의 군병들이 존재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유대인 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듯이 묘사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시대에 행해졌던 설교 때문이었습니 다.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날 모인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사도행전 2:23에서, ‘그 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했으며, 사도행전 3:14, 15에서는,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 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 님이 왜 죽어야 했으며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유 대인들이 예수님을 못박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신문이 있어 지구 상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뉴 스를 통해서 상세히 알 수 있지만 1세기 때에는 이런 미디어가 전혀 없었으므로 그 당시 예루살렘 에 있었던 사람들도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고 왜 예수님이 24시간도 아닌 시간 안에 갑자기 십자가에 메 달려야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목요일 밤에 체포 되어 안나스에게 그리고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고 빌라도에게로 끌려가 아침 6시경에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시간이 금요일 아침 9시경이었습니다. 이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까지 시간을 따지면 15시간쯤 됩니다.
예수님은 주일날에 나귀새끼를 타고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 하셔서 월요일과 화요일까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때는 유월절이라 예루살렘에 수 백만의 사람 들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금요일 아침 6시에 갑자기 사람들 앞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른 법이 어디 있습니까? 사형선고를 하고 즉시로 사형집행을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 광경을 본 예 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직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화요일에 성전에서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생생한데……….
예수님의 십자가
요 19:1-16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기독교 자체가 잘못될 수밖에 없고 신앙 역시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종교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가 십자가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말하는 대다수의 신자들은 십자가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유는 자신은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에 대해서는 금방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얘기를 또 언급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이 소위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에 두고 있다고 자부하는 신자들에게서 흔히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이상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로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음을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 대한 말씀이 전해지면 쉽게 식상함을 느끼고 관심이 멀어지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의 입술로 고백을 하면서 사랑하는 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사랑하는 분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관심이 멀어져 있다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연 그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사실 현대 교회는 예수 얘기보다는 자신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이는 것 같습니다. 가령 믿음으로 자신이 잘된다는 얘기에 더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십자가 얘기 보다는 교회 얘기에 더 관심을 두는 모습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하나의 간판이나 장식에 불과할 뿐,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 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신 현장임을 인정하고 믿는다고 해서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진심으로 알게 된 신자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을 유일하신 참된 신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것이야 말로 십자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여러분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간증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은 안계십니다. 다만 십일조나 주일 성수와 같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복을 주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만나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호하게 그런 하나님은 가짜일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19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내용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말씀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으로 출발하여 그동안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과 행하신 행적으로 더듬어 오면서 예수님이 증거하시고자 했던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내용까지 온 것입니다.
어쩌면 19장부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분이 잘 아는 내용들이어서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넘어가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십자가를 아는 자는 십자가에서 필히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십자가에서 어떤 하나님을 만났으며, 또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를 통해서 십자가를 알고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먼저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과 빌라도에 의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게 하실 계획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겉도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과 빌라도가 십자가의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대인과 빌라도의 횡포에 대해 침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침묵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어 했습니다. 4절에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박아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빌라도를 몰아 붙였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빌라도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놓아준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나 같으면 놓아 줬겠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강압에 결국 예수님을 못박는 것은 유대인의 총독이라는 자신의 위치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못박지 않으면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킬 것이고, 결국 로마 황제로부터 유대인을 잘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추궁을 염려하여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빌라도와 같지 않다면 그 모습은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예수님만을 따르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빌라도의 행위에 대해 침묵하시는 것은, 그것으로 세상의 악이 드러나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이 말한 예수님의 죄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늘로서 왔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능력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그동안 그들이 품고 살아온 소망을 포기해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다릅니다. 빌라도에게는 유대인과 같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가 예수님을 못박은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현재의 자신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유는 혹 예수라는 자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자신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신의 아들을 심문하고 사형을 시킨다면 신의 모든 저주를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너는 어디로서냐’라고 물으면서 예수가 진짜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에 대해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에게 복종하고 경외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대한 유대인과 빌라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볼 때 아들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아들에 대해 복종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의 저주로부터 피하자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미칠 화를 고려해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유대인과 빌라도의 모습이 현대 교인들에게서 보인다는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에 대해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자신을 위해 복종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복종하지 않았을 때는 자신에게 미칠 화를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유대인과 빌라도를 통해서 드러난 죄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가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날 위해 살아가는 자신의 악을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소망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만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진심으로 하나님께만 복종하는 신앙이라면 하나님만을 위해 살아가셨던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유대인의 모습은 지금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만 섬길 것을 말하면 내심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예수를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소망과 나의 꿈을 버리고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흘리신 피는 내가 흘려야 할 피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피로써 죄 용서함과 함께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의 은혜를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상에 욕심을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피로 얻고, 거기에 세상의 복을 보너스로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의 반발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말하고 피의 은혜를 말하고 구원을 말할 때는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다가도, 세상의 복과 상관없이 오신 예수님을 말하면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좋지만 내 육신에 도움을 주지 않는 예수는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유대인이며 빌라도의 속성입니다.
눅 23:34절에 보면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라고 말씀합니다. 날마다 예수를 죽이고 나 살기 위해 말씀을 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를 보시면서 ‘저들을 사하소서’라고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에서 이러한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곧 예수님을 죽인 악한 자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잊어버립니다. 1절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5절에는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고 나오십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는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자색 옷을 입으심으로 우리가 의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결과로 주어진 은총이며 복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자기 백성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며 장차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사모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의함을 발견하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그 날을 사모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이 신자된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
요한복음 19:1-16 / 손재호 목사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8:28-19:16절까지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바 되는 사건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8:28-40절 말씀을 통해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면서 ‘내가 왕이니라’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 되심은 이 세상의 왕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 되십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영적인 왕이 되십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신바 되시는 사건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18:39). 그러자 빌라도의 기대와는 달리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백성들의 민란이 두려워 타협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진리 가운데 서지 못하고 악에 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빌라도는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을 하였습니다. 아마 빌라도가 이렇게 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만족을 주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2-3절에 보면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며 조롱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27-31절에도 보면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웠습니다.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하며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쳤습니다. 희롱을 다한 후에는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오셨지만 인생들로부터 이런 수치와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볼 때에 감상적이 되기 쉽습니다. 잔잔한 음악을 깔고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하면서 감상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상적이지 말아야 합니다. 곧 주님의 십자가를 감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감상적으로 생각할 때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건을 지금 누가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누가 진행시키고 있습니까? 물론 겉으로 볼 때 유대인들과 로마의 군병들이 합동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진행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진행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로마 군병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채찍질을 하고 침 뱉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하나님을 위해, 로마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구속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려 함이로다’고 하면서 가시 면류관과 홍포를 입힌 채로 예수님을 끌고나와 ‘보라. 이 사람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6절에 보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하며 소리쳤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화가 나서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7절에 보면 그들은 우리에게는 법이 있는데 우리 법대로 하면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8-9절에 보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말로 인해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서 물었습니다. “네가 어디로서냐?” 이 말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곧 ‘누가 너에게 왕권을 주었다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이미 다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10절에 보면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을 놓아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왕으로서 이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빌라도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1절에 보면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네가 나를 이렇게 심문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것은 다 위에서 허락하셨기에 되는 것이지 네가 권세가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빌라도의 권세에 의해 자신이 잡히시고 조롱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뜻 가운데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힘썼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빌라도를 협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에게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2b). 13-14절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이라는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이날이 유월절 예비일이요, 그 때의 시간이 제육시(오전 6-12시)쯤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 왕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15절에 보면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도리어 자기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들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의 관계란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통신앙인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죄 곧 대제사장들의 죄가 고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님을 18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잡히심은 결국 누가 이 일을 진행시키고 계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나는 무서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그저 예수님이 고통과 수치를 생각하면서 감상적이 되어 눈물 몇 방울 짜내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 박도록 누가 끌어가고 계시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역사를 위해서 친히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도록 넘겨준 자들의 죄는 더 크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려고 하셨다면 거기에 동원된 가룟 유다나 로마 군병이나 지도자들의 죄란 자기들의 책임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인간들의 악도 십자가에서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0:9-18절에 보면 악한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주인이 종들을 보낼 때에 두 번이나 때리고 죽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들을 보내실 때 아버지께서 아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모르시고 보내셨겠습니까? 결코 아니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알면서도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인간들의 죄악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아들의 죽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너희가 핍박하고 죽이지 않은 자가 어디에 있는가 하시면서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상속자가 없어지니 자신들이 영원히 주와 왕으로 살 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도 결국 인간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왕됨을 위하여 결국 하늘의 왕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8:4-9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왕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믿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다른 나라들을 보니 왕의 말 한마디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들도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사무엘에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 말을 하나님께 아뢰었을 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목사를 왕처럼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그런 교회들이 많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가 왕보다 더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이러한 목사를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이 왕 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하면서 영원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소리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왕이 없는 시대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 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가이사라는 왕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나이다고 하는 것도 주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왕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생사여부를 쥐고 있는 왕이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면서 버린 모퉁이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왕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권세를 쥐고 있는 가이사 같은 자가 우리의 왕이 되어 있습니까?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넘겨주지 않도록 애를 쓰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의 소리가 이겼습니다. 16절에 보면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저희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8-22절에 보면 빌라도는 그 죄목을 쓰는데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씁니다. 그러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하면서 유일하신 왕을 배척한 것입니다. 유일한 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 일의 진행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되는 것입니까?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시면서까지 인간들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께서 진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심판임과 동시에 자기의 택하신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사야 52:13-53:1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길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 징벌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빌립보서 2:5-11절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심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로 영접하고 그 분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가 되심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