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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설교, 하나님의 설교
신자들은 설교를 듣고 난 후 "오늘 은혜 받았다!" 합니다.
자신 스스로 은혜를 받았다고 기뻐합니다.
그 개념은 기분이 좋아졌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집니다.
기분이 좋았고 즐거운 예배시간...너무도 감격스런 설교시간...
은혜받았다고 합니다만 사실은 은혜받았다라기보다 기분이 좋아진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에 감흥을 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설교시간 이었을까요?
아닐 가능성이 십중팔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이 나타날 때에 현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나니..."(히4:12)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여 말하는 설교는 인간의 깊은 속의
자아에 근거를 둔 마음과 생각을 드러내게 해 버립니다. 그 결과 그 성령의 음성인 말씀을 들은 영혼은 어떤 반응이 일어 날까요?
"어찌할꼬?" 입니다. 자신도 모르던 자아의 참상을 영혼의 지각에 느껴지게 되니 곧바로 이 죄와 자아로 충만한 자신의 참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가 이 말(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인간은 자아가 자신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상, 사고방식, 잠재적 의식, 고정관념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참 모습을 자신 스스로도 보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자긍심, 자부심으로 평소 세상을 살아갑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질문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래도
자신은 대채로 괜찮은 사람으로 스스로 평가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예배를 지속하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는 설교를 오랫동안 듣지 못한 영혼일수록 자고합니다.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다 어느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설교를 접하게 되면 꼬끄라집니다. 깊은 정신적 갈등에 빠집니다. 영혼이 쇠망치로 두둘겨 맞은 것처럼 충격적인 자신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설교를 조나단 에드워드...
찰스피니... 요한 웨슬레....존번연....베드로....는 하였던 것입니다... 마음 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하나님 앞에 수술받게 하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도구로 쓰인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거듭남이 없거나 거듭남의 영적 상태가 없는 일반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혼에게 다가 왔을 때의 영향력을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으로 내 영혼에 가까이 오시면 마치 면도"칼로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이는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2:35 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에게 부딪히면 계란이 바위에 부딪히듯 가루가 되리라.... 나의 사고와 하나님의 사고가 부딪히면 너무도 달랐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자아가 깨어지는 충격입니다...그동안 그릇된 사고방식으로 두려우신
하나님을 섬긴 것에 대해 참회의 자백을 쏱아 붓게 되지요....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설교자의 입술을 통해 토해낸 것입니다.
고전14장24-25엔 초기교회의 예배시간에는 그런 설교가 매번 일어났다는 것이 예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예언(하나님의 성령이 입술을 통해 토해내는 말.오늘날의 설교를 뜻함) 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들이 (예배시간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초기교회는 예배시간에 복수의 지체들이 설교하였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설교자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설교자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에 숨은 것이 드러나게 됨으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사도들이 사역하던 시대의 교회예배의 특성이 어떠합니까? 아무도 거만하고 가증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품은 거짓된 상상들.동기들이 그대로 드러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실제적 상황이 드러나는 초대교회 예배시간이었습니다. "그 마음에 숨은 것이 드러남으로...." "책망을 들으며....
"오늘날 성령의 음성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예배와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지 아니하심으로 교인들이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하며 뽐내며...가식으로 하나님을 잘 믿는채 합니다. 초기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겉과 속이 다른 신자들은 발 붙힐 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설교자와 예배시간에 주권을 행사하신다면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참 모습이 발가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됨으로 거만한 태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가식적으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성령께서 활동하시지 못하시므로 교회 안에 저의를 감추고 경건한 체 하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와 자아, 자기 사랑, 자기 이기심,자기목적을 감추길 좋아합니다. 회칠한 무덤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비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령의 눈을 의식하지 못하는 영혼들은 자위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영혼에게 나타나시면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요청에 즉각 갈등하게 되고 고뇌에 빠지게 됩니다.
부자 청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기까지는 제법 잘 믿는 신자인줄 스스로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께서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자 형편없는 자신의 믿음에 대해 고통스러워 하며 자기 길로 갔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즉시 자기 자신을 향해 "화로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 섰도다!" 고백했습니다.
베르도가 처음 예수를 만나던 날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저를 떠나소서.."
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영혼의 지각에 들려오면 자신의 참 모습이 드러남으로 불순한 죄악으로 뒤덮인 자신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설교는 왜 이런 일을 하실까요? 그것은 개선을 하기 위한 첫 작업입니다.
변화를 위해선 기존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새 집을 짓기 위해서 기존 집을 허물고 파괴시켜서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이것이 상한 마음.. 부서진 마음입니다. 이런 상한 심령에 주의 성령이 오셔서 새 심령을 세우십니다.
옛사람을 무너뜨리고 새사람을 세우십니다.
이런 역사를 하실 때에 가장 먼저 성령이 하시는 일은 나의 옛 자아의
존재를 박살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려면 거친 맘,,장애물로 작용하는 옛사람을 박살내십니다.
옛 자아를 깨드리십니다. 깊은 고뇌에 빠지게 하십니다.
이런 상한 심령을 만드신 후에 씨를 심습니다
생명의 씨... 자랄 수 있는 씨앗을 심으시고 자라게 하십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십시오. 자라고 있습니까? 성장했습니까? 과거 20년전 10년전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까?
자주 주님의 영생의 말씀이 나타납니까?
더 거룩한 형상을 지녔습니까?
자라지 못했다면 생명이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과거 어느 시점에 죄사람이 깨어지고 부서지고
새 사람이 탄생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설교를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으로 직접적으로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케 된 시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옛자아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설교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 셈입니다. 또 자주 매 예배시간마다 그런
설교를 듣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눈은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시는 분이시나 그 분의 두려움에 무감각해지고 거스럼을 피우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설교와 생명력없는 말씀에 대해서 비교하여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나타내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계시)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계시)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이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 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치리라" (렘23:25- 31)
밀은 아무리 작아도 그 속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물에 담가 놓거나 땅에 파 묻으면 싹이 트고 자랍니다. 겨는 몇 십년을 묻어
놓아도 자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어 버립니다.
영혼의 심령을 박살내어 부서트리고 싹이 트게 하는 작용을 하는 설교가 하나님의 음성인 설교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을 형통하느니라"(사55:8-11)
사도들은 자주
"천하에서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1:6)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2:9)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벧전2:2)
"자라가라 "(벧후3:18)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엡4:15) 라는 표현으로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영혼 안에 들려온 사람은 생명이 탄생되어 자라게 됩니다.
생명력이 없는 사탄의 말과 같은 설교는 영혼으로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과 사탄의 말의 차이는 "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을 형통하느니라 "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나의 영혼을 살펴보아 과연 하나님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찰스피니는 "깨어진 심령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접해 본 적이 없는 신자다" 라고 하였습니다.
존 번연은 "하나님의 성령이 가까이 오시면 상한 심령을 가지게 된다"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생각과 내 생각은 다르며..
내 길은 너가 상상하는 그런 길과 다르다..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맘에 품고 상상하던 하나님,, 그런 하나님과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사람입니다. 마음에 품는 것이나 계획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신관, 구원관,
교회관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뇌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음 눈을 밝히심으로 자신의 참 모습이 드러나 어쩔줄 몰라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까? 초기교회처럼 매번의
예배시간은 아니더라도 한달에 한번 정도씩이라도 성령의 책망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인간은 껍질은 육으로 되어 있으며 더 깊은 속에는 정신세계가 있습니다...더 깊이 들어가면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육체는 오감으로 활동합니다. 육체는 죄덩어리라고 성경은 계시합니다.
자연인은 슬픈 영화를 보면 같이 슬퍼 하기도 하고 감흥이 오는 음악을 들으면 감동하기도 합니다. 락음악회 같은 곳에서는 거의 실신하는 감흥에 빠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웃기도 합니다. 오늘날 설교를 듣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성령의 음성을 들어서 반응하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한 것입니다.
은혜받았다고 하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속 시원해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성령의 사역하심은 진보적입니다. 변화에 변화로 이르게 합니다.. 개선됩니다.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니 이는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이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매....하였습니다.
은혜받았다던 그 설교들을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 받은 결과가 자랐습니까?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었습니까?
그런 설교를 10년, 20년 들은 자신의 참모습을 살펴 보십시오. 과연 겨와 밀이 다르며...라는 여호와의 말씀하심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설교를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사탄적인 속이는 생명없는 설교를 멀리 하십시오.
나의 영혼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오기를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내는 설교를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심판날이 오기 전에 자신을 개선하십시오.
예수님이 영혼의 속에 가까이 오시면 이런 역사가 일어 납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눅2:35)
출처 : 예수님의 친구들 - 신앙회복운동에서
첫댓글 아 ~ 멘 *^^*
감사합니다!
아멘
주님 저에게 주일마다 하나님의 설교를 듣게 해주심이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