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선생님일수도 있고, 사장일수도 있으며, 스님일수도, 학생일수도, 공무원일수도, 혹은 부모이거나 자식일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나’는 상황에 따라, 환경에 따라, 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회사에서는 사장일수도 있고, 말단 사원일수도 있고, 집에 돌아오면 한 집의 가장 일수도, 자식일수도 있고, 또 주말에 있는 모임에 가면 회장일수도, 회원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의 아상, 우리의 에고, 우리의 위상은 달라진다. 상황에 따라 우리가 바로 그 곳에서 해야 할 몫의 연극을 해 내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역할들의 특성은 어떠한가? 어느 한 가지 역할만이 나의 본래적인 자아이거나, 정해진 본연의 역할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역할을 바꿀 뿐이다.
바로 이 역할 놀이, 연극의 배역을 끊임없이 상황 따라 바꾸어가는 바로 이 영화 같은 배역 놀이야말로 우리 삶의 생생한 현실이다.
그 삶의 배역을 온전히 잘 해 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나에게 배역이 주어질 때 바로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배역에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 완전히 하나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가 끝나고 다른 영화, 다른 배역이 주어지면 곧바로 또 다시 새로운 배역에 완전히 용해됨으로써 이전의 역할을 잊고 새롭게 주어진 역할과 새롭게 하나를 이룰 줄 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이 역할놀이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그 역할이 주어질 때 그것에 온전히 깨어있는 의식으로 최선의 연극을 다하되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즉 바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할지언정 그 역할이 나 자신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 잠시 인연 따라 주어진 배역과 나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 배역을 최선의 집중으로 행할지언정 그 역할 자체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그 배역은 실체적인 ‘내 것’이 아니다. 잠시 내가 연극을 한 것일 뿐이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법상 합장>
첫댓글 삼귀의(三歸依)
귀의불 양족존(歸依佛 兩足尊)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양족: 복덕과 지혜
귀의법 이욕존(歸依法 離欲尊)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귀의승 중중존(歸依僧 衆中尊)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닞다()()
감사합니다. 일체중생 다 함께 행복하기를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