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세르히오(호아킨 푸리엘)는 잘나가던 시절 든 생명보험 보험금을 노리고 자살할까 고민한다. 공장 운영이 어려워져 끌어다 쓴 돈을 갚지 못해 사채업자 브레네르(가브리엘 고이티)로부터 일주일 안에 갚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겠다는 최후 통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세르히오는 친구에게 넘긴 별장의 매각 대금을 들고 사채업자를 찾아가다 폭탄 테러에 휘말려 몸이 붕 날아간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다 문득 이대로 사라지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대로 자신만 '죽어주면' 일곱 살 아들 마티와 어려운 형편에도 떠들썩하게 성인식 파티를 치러준 열세 살 딸 플로르, 치과의사 아내 에스텔라(그리셀다 시칠리아니) 등은 보험금을 얻어 공장 직원들의 밀린 임금도 지급하고 빚도 해결할 수 있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르틴 바인트루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아르헨티나 영화 '고이 잠드소서'(Descansar en paz, 영어 제목 Rest in Peace)는 지난 3월 넷플릭스에 올라왔는데 상당한 흡인력을 지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지금, 자영업을 기신기신 꾸려오다 생활고에 내몰린 이들이 극단을 선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세르히오의 곤궁한 처지와 그의 선택, 그로 인한 후과 등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관람하게 됐다.
세바스티안 보렌스테인이 연출했는데 아주 극적인 전개는 없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면서도 드라마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로튼 토마토의 신선도는 지난 3월 현재 무려 100%였다. IMDB는 평점 5.9을 매기고 있었다..
세르히오는 파라과이로 떠나 전자제품 가게에서 허드렛일을 도우며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간다. 가게 주인이 성탄 파티 도중 너무 웃다가 죽는 바람에 가게 운영을 떠맡게 된다. 거리에서 견공을 데려와 함께 지내는데 '먹고 싸며 아픈 게 모두'인 견공을 살뜰히 보살핀다. 가게 주인의 아내와 정분을 나누긴 하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5년이 흘렀을 때, 시장에서 예전 집안 일을 봐주던 가정부를 맞닥뜨린다. 세르히오는 절대 가족에게 알리면 안 된다고 윽박지르고, 가정부는 "입도 벙긋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정작 세르히오는 가족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어쩔 줄 몰라한다. 페이스북이란 것이 나와 사랑하는 이들이 어디에서 무얼하고 지내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딸이 곧 결혼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아들이 어떤 아이와 함께 포즈를 취한 사진도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끙끙 앓던 세르히오는 돌아가기로 한다. 자신이 죽은 줄로만 알고 새로운 삶을 꾸려가던 가족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각본이 상당히 훌륭하다. 영화 초반 심어놓은 밑밥들이나 장치들이 나중에 상당한 역할을 한다. 그 장치들이 상당히 세밀하고 자연스럽다. 러닝타임 107분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군더더기가 없다.
아내가 알아챌 때까지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가장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대목, 사랑하는 가족 앞에 15년 만에 느닷없이 나타나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이유를 설명해아 하는지 막막해 하는 것은 상당히 한국 남정네와 닮은 면모로도 비친다.
세르히오가 사라질 결심을 하게 만든 폭탄 테러가 유대인 커뮤니티를 겨냥한 것이었던 점도 흥미로웠다. 1994년 7월 18일 아르헨티나 유대인친선협회(AMIA) 건물에 폭탄 테러가 발생, 86명이 한꺼번에 희생됐다. 나중에 플로르의 결혼식 장면에 세르히오가 유대인 모자인 키파(또는 야물커)를 쓰고 있는 것으로 봐 유대인임이 분명하다. 사채업이 유대인의 직업으로 알려진 만큼 브레네르 역시 유대인이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원작 작가가 단지 많은 인명이 한꺼번에 희생됐다는 점에 착안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유대인이었는지 확인하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결국 그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몹쓸 짓을 했던 것을 자책하며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매듭짓는다. 이런 결말 역시 치밀하게 암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뻔히 알 수 있는 결말인데도 상투적이라기보다 안타까움에 눈물 짓게 만든다. 대단한 연출력이란 생각이 든다. 아르헨티나 영화를 보며 오늘 어려운 선택 앞에 놓인 대한민국의 적지 않은 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