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gai님께서 성한왕과 진지망인에 대한 가능성을 주장하기 위해 글을 쓰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문명의 수준에 대한 문제 제기는 분명히 제가 했습니다. 역사는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진지망인 기원설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한국사에 영향을 미쳤을까를 고려하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사실 규명일 뿐, 충분한 역사적 논증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알기로 고금문 계열에서는 왕망의 신(新)제국까지의 중국사를 한중 공동의 역사로 본다(즉 진지망인이 동방으로 이주한 이래로 양국의 역사가 갈리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진(秦)나라는 감숙성, 즉 내륙 지역에서 나타난 나라였고 같은 시대(춘추 시대) 주나라를 명목상 천자국으로 받드는 제후국들에게 서융의 나라로 불렸습니다. 즉 진나라 시조 설화와 은나라 설화의 공통점(난생설화)을 토대로 진나라 왕실의 조상을 동이족으로 추정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들은 감숙성으로 이동한 이래로 서융 계통으로 동화되었고, 그들에게 동이족 의식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것도 기본적으로는 중원의 천하였으니, 진나라 역사를 중국사로 볼 수는 있어도 한국사로 볼 개연성은 없다고 보아야 할겁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저는 진지망인에 대한 님의 주장을 두고 중국 문명과 동방 문명의 격차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면 동시대 동방에는 문명이 없었고, 혹여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역사와 관련이 없었던 것이냐고 말입니다.
님께서는 기록이 빈약하고 내용이 거의 없는 역사인데다 그것이 삼국시대 이래의 우리민족과 얼마나 관련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같은 환경, 터전 속에서 발전한 역사를 두고 관련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이 오히려 납득하기 어렵지만, 일단 먼저 이것부터 반문하겠습니다. 그러면 기록이 빈약한 문명은 역사로 간주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님의 주장인 진지망인->김일제->신라 가야 김씨 설도 하나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그 누구도 치밀하게 논증되지 못한 이 가설을 기정사실화해서 말한다면 주변으로부터 냉대받습니다. 님 스스로도 진나라와 휴도왕의 관련성에 대해 완전하게 사실로 규명하지 못했으며, "수로왕이 신라 김씨와 동성"이라는 표현도 말 그대로 단지 성씨가 같다는 것을 알았을 뿐일 수도 있으며, 신라 김씨와 가락 김씨가 동일한 가문이라고만 해석될 내용도 아닙니다.(물론 김일제 가문이 신라 가야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저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즉 님의 주장은 아직도 치밀한 논증을 필요로 하는 가설입니다. 그러나 님은 이를 밝히기 위해 역사를 더 공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한국사는 옆동네인 중국보다 기록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동방 문명이 중국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결정적으로 중국에게 패배한 사건이 2차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와 고조선의 전쟁에서 한 차례 고조선이 멸망했고, 이후 7세기 고-당 세계대전에서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멸망하였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멸망시 당나라는 고구려의 수많은 문헌들을 불태웠으며, 고구려의 각종 기술자와 유민들을 끌고 옴으로써 고구려 문명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구려라는 분명한 실체가 있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를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김용만 선생님께서 수레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700년 고구려의 역사가 30년 수나라의 역사보다도 기록 분량이 적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내용이 거의 없으므로 고구려는 역사의 영역에서 다룰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많이 잃어버린 그 역사를 되찾고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 할 것입니다. 이는 김선생님의 목표이기도 하며, 고대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많은 분들의 목표일 것입니다. 심지어 고구려, 백제와 달리 자체적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은 흉노, 선비 등의 유목민들조차도 분명히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조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기원전 7세기 문헌인 관자에 고조선이 등장하고 있으며, 제나라와의 교역 사실도 나오고, 이후 연나라와의 대립, 그리고 한나라와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고조선의 실체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열정적 입장에서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인정해야한다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측 기록에 명시되어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단지 춘추전국시대와 진, 한에 비해서 그 역사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해서 고조선을 역사의 영역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책임한 말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나 기록이 부족한 고조선과 한국 상고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참고로 고고학도 역사의 한 범주에 속하는 학문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역사 이전의 고고학은 선사 고고학이라 하여, 초기 인류의 진화와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다루는 분야가 있는 줄로 압니다)
그리고 고조선과 후대 국가들의 연결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셨지만, 반대로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확증된 바도 없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신화 골격이 거의 같다는 점, 신라 6촌의 토착 세력들이 고조선 유민이라는 점, 가야의 천강 설화가 고조선을 비롯한 북방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점 등등 고조선과 후대 국가들의 연관성은 연구자들에 의해 그 근거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같은 환경, 터전 속에서 성장한 나라인데 연관성이 없다면 오히려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요하 문명은 그 변천 과정을 간단히 말하면 홍산문화(신석기) -> 하가점하층문화(청동기 초기) -> 위영자.릉하문화로 이어지는 문명입니다(하가점상층문화는 논외로 함). 이 가운데 위영자.릉하문화를 고조선으로 보는 것은 이미 익히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공대 우실하 교수는 요하 문명과 동시대 만주와 한반도에 동일한 문화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반면, 중원 문화권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말합니다. 즉 다시 말해 요하 문명은 최소한 우리민족의 문화권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문명이 이후 고구려 등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경주 김씨, 가락 김씨가 한국인 가운데 상당수라고 해서 그 역사가 전부인 것도 결코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고구려는 당나라에 의해서 그 문명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층, 피지배층 가운데 신라로 넘어온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과거 고구려, 백제에서 성씨를 가졌을 지배층이었던 사람들도 신라로 와서는 그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들은 대개 신라의 피지배층으로 편입되었을 겁니다. 그런 반면 신라는 오히려 7세기에 거대 인구를 지닌 경주를 비롯하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고, 그 나라가 처참하게 파괴된 것이 아니라 고스란히 고려에 나라를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왕조가 신라의 계승을 자처할 정도로 신라 역사는 후대인들에게도 충분히 계승되었습니다.
즉 고구려 문명이 파괴되어 그 역사가 온전히 보존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성씨가 현재 한반도에서 부족할 뿐인 것입니다. 오히려 피지배층으로 들어온 고구려, 백제인의 혈통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들은 신라인의 후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삼국 모두의 후손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중국측 기록들에서 보이는 고구려, 백제 성씨만 하더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성씨 문제만을 놓고서 결국 신라, 가야인의 역사가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몇가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예전에 저는 역사에 관심을 가진 첫 무렵 환단고기에 심취했다가 그에서 벗어난 뒤, 고금문 쪽의 주장을 접한 바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쪽 주장들을 받아들였었지만, 역시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주장만 제기하는 것에 문제를 느끼고 스스로 벗어났습니다. 아마 제가 "동아시아역사"라는 아이디로 활동할 무렵에 고금문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글도 썼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그 주장들을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단지 김일제 가문이 신라, 가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이것도 김병모 교수의 주장을 접하지 않았다면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는 신라, 가야가 진지망인이라는 주장이나, 부여가 고양씨의 넷째 아들이라는 주장도 신뢰하지 않습니다.(오잉? 저는 고금문 카페에서 소남자 김재섭씨의 "부여 내지 부루가 진시황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접했지만 이건 금시초문이로군요. 물론 이것도 신뢰 안합니다) 단지 김일제 후손과 신라 가야의 연관성 정도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님께 이렇게 장문의 반박 글을 올리는 것은 저 역시 님과 마찬가지로 한때는 고금문 쪽의 주장을 신뢰했던 사람으로서, 이에 대해 주장하려면 문명사와 같은 장기적인 관점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주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금문 주장을 버린 것도 타당한 근거를 별로 찾지 못한 것이 첫번째 이유라면, 두번째는 그다지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사를 바라보았을 때 그다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님께서 진지망인과 관련하여 주장을 제기하고 싶으시다면 글로 상세하게 직접 올려주십시오. 그렇지 않는한은 저는 물론이고 다른 회원 분들께서도 님의 주장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신농님, Sorgai님 두분의 내공 깊은 토론을 잘 감상하고 있습니다...신농님의 본문에서 "김일제 가문이 신라, 가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이것도 김병모 교수의 주장을 접하지 않았다면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라는 문구가 있군요..김병모 교수분이 어느시기에 신라, 가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1978년 9월 20일자 柏文堂에서 간행된 문정창의 "加耶史"라는 책에 김수로왕이 소호금천씨의 김일제 후손이라는 주장을 하고 펼치고 있습니다...혹시 참고가 될런지요? .....^^*
재야사학에서 여러 재밌는 이설들이 등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정창 선생께서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있었죠. 다만 그분은 왕망의 성씨를 김씨로 착각하여 김왕망이라 잘못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병모 교수님은 좀 색다른 차원, 즉 문화적 측면에서 주장을 펼쳤는데,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이라는 책에서 그는 가야의 쌍어(雙魚) 문양의 기원을 찾다가 인도의 아요디아, 그리고 중국의 보주 지역을 유력한 경로로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주 지역의 허씨 가문이 동시대 김일제 가문과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허왕후의 도래와 마찬가지로 김씨 세력도 같이 도래하여 가야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김병모 선생님의 설은 별 설득력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천성 보주 지역 출신의 허씨 가문이 해양세력이라는 부분을 선생님은 별로 지적을 안 하고 계신데(맞물리는 문헌기록과 보주라는 지명뿐) 삼국유사에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허황옥은 '돈을 받고'(이게 중요!) 물건과 사람을 옮겨주는 해양세력(상인이나 기타 등등)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오히려 김성호 선생님의 견해가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장강 하류 주산군도의 보타도주와 연관시키는 설 말이죠. 갠적으로 선생님 썰 중에 허황옥을 인도 야유디아국이나 사천성 보주 일대와 연결시킨 것은 크나큰 오류라고 봅니다.
그래서 문정창 선생은 "加耶史"의 page 149 에서 "김일제 전은,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生母인 南의 아들이라 했는데, 孝元皇后전의 고증은, 효원황후를 金當의 딸이라고 했으니 이 면으로 보면 왕망은 효원황후의 아우가 된다. 班固는, 효원황후와 왕망이 匈奴의 후예임을 감추기 위하여 兩人의 출자와 그 계보를 횡설수설로 꾸며 내 놓았다. 왕망은, 김당의 아들이니 왕망의 姓은 金씨 인 것이다." 라고 확신있기 주장하고 있군요.
그리고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를 자신들의 선대 역사로서 기록했다는 점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신라와 가야의 김씨가 김일제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김일제 가문은 흉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라와 가야에서 북방계 유물이 출토되는 것도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 예컨대 김일제 집안의 도래로 한국사가 시작되었다거나 고조선의 역사가 부정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여러 문화의 교류에 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요.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가 언급되어 있나요??..다만 비문의 "투후 제천지윤(秺侯祭天之胤)"에서 당시 투후 벼슬한 사람은 金日磾와 그후손에서 비롯되었기에 김일제를 지목한 것으로 보입니다..김일제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유입되어 그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면 기존 토착세력이 가진 문화와 이들이 가져온 문화가 서로 융화되어 그 세력권내에서 상당히 발전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소호금천님/가급적이면 새로운 내용은 글로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꼬리말이 너무 겹겹이 있어서 보기가 어렵습니다. 왕망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본 바 없어서 "~했다고 합니다" 류로 썼는데, 제가 알기로 한서 왕망전에 그의 아버지로 왕씨 성을 가진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밖에 확인을 못했기 때문에 제가 잘못 안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을 하고 싶으시다면 글로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김일제가 기록되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투후가 기록되어있는데 김일제와 그 후손을 지목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김일제 가문의 도래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 것은, 고금문을 주장하는 계열에서 김일제 가문의 도래로 한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일제 가문의 도래 가능성 여부는 위의 "가야 건국 세력"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여휘님/그런 설도 있었군요. 음..허황옥 세력이 본래 해양 세력이었다고 본다면 분명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김병모 교수님의 주장에 인상을 받았던 것은, 쌍어 문양의 이동 루트를 상세하게 파고들었다는 점입니다. "제4의 제국" 프로에서는 파형동기가 오키나와 -> 일본 열도 -> 가야로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남방계 루트의 문제도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김병모 교수의 쌍어문은 삽질이라고 봅니다. 이유는 쌍어문은 굳이 인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중국의 유물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고, 우리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니까요. 더구나 허왕후보다 훨씬 이전에 등장하니까 쌍어문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다보니 나타난 무리수지요. (혹시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사진을 올릴 방법을 알려주시는대로 쌍어문 유물을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쌍어문은 허황후 사당에 있는게 아니었고 본래부터 쌍어문이 있었다는 어떤 근거도 없지요.
거기다가 님들이 인용하는 문정창 선생은 "한국고대사연구평/209p"에서 "이병도가 한무제때 귀화인 흉노태자 김일제의 후예인 것 같이 말한 것은 모두 유래를 중국에 구하려는 모화사상에 불과한 것"에 대해 '신라왕실에 대한 하나의 모독이 된다'고 단언하고 대당전쟁으로 당을 물리친 것 등을 들어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는 이병도를 기피하면서도 필요하면 이병도의 주장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
첫댓글 잘봤스므니다!ㅋㅋ
신농님, Sorgai님 두분의 내공 깊은 토론을 잘 감상하고 있습니다...신농님의 본문에서 "김일제 가문이 신라, 가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이것도 김병모 교수의 주장을 접하지 않았다면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라는 문구가 있군요..김병모 교수분이 어느시기에 신라, 가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1978년 9월 20일자 柏文堂에서 간행된 문정창의 "加耶史"라는 책에 김수로왕이 소호금천씨의 김일제 후손이라는 주장을 하고 펼치고 있습니다...혹시 참고가 될런지요? .....^^*
재야사학에서 여러 재밌는 이설들이 등장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문정창 선생께서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있었죠. 다만 그분은 왕망의 성씨를 김씨로 착각하여 김왕망이라 잘못 주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병모 교수님은 좀 색다른 차원, 즉 문화적 측면에서 주장을 펼쳤는데,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이라는 책에서 그는 가야의 쌍어(雙魚) 문양의 기원을 찾다가 인도의 아요디아, 그리고 중국의 보주 지역을 유력한 경로로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주 지역의 허씨 가문이 동시대 김일제 가문과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허왕후의 도래와 마찬가지로 김씨 세력도 같이 도래하여 가야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김병모 선생님의 설은 별 설득력이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천성 보주 지역 출신의 허씨 가문이 해양세력이라는 부분을 선생님은 별로 지적을 안 하고 계신데(맞물리는 문헌기록과 보주라는 지명뿐) 삼국유사에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허황옥은 '돈을 받고'(이게 중요!) 물건과 사람을 옮겨주는 해양세력(상인이나 기타 등등)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오히려 김성호 선생님의 견해가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장강 하류 주산군도의 보타도주와 연관시키는 설 말이죠. 갠적으로 선생님 썰 중에 허황옥을 인도 야유디아국이나 사천성 보주 일대와 연결시킨 것은 크나큰 오류라고 봅니다.
신농님 문정창 선생이 왕망의 성씨를 김씨로 착각하여 김왕망이라고 잘못 주장하기도 했다라고 말씀하시는데..문정창 선생은 나름대로 근거를 들어 김왕망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當母南 卽莽母 功顯君 國産弟也 <前漢書 券68 金日磾> 투후 김당의 어머니인 南은 곧 왕망의 생모인데 그렇다면 투후 김당과 왕망은 형제가 됩니다.따라서 김당과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이 됩니다.
그래서 문정창 선생은 "加耶史"의 page 149 에서 "김일제 전은, 왕망과 김당이 다같이 그들의 生母인 南의 아들이라 했는데, 孝元皇后전의 고증은, 효원황후를 金當의 딸이라고 했으니 이 면으로 보면 왕망은 효원황후의 아우가 된다. 班固는, 효원황후와 왕망이 匈奴의 후예임을 감추기 위하여 兩人의 출자와 그 계보를 횡설수설로 꾸며 내 놓았다. 왕망은, 김당의 아들이니 왕망의 姓은 金씨 인 것이다." 라고 확신있기 주장하고 있군요.
중국사서가 이처럼 漢族에 불리한 계보에서는 횡설수설하는 내용과 삼국사기의 신라 선덕왕 김양상의 계보가 횡설수설 오리무중된 내용과 너무 흡사하여 삼국사기 역시 중국사서의 그릇된 불리한 계보 조작기법을 그대로 수입하여 왜곡시킨면에서는 서로 가 닮은 점이 많아 보입니다.
그리고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를 자신들의 선대 역사로서 기록했다는 점 등의 정황으로 볼 때, 신라와 가야의 김씨가 김일제 가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김일제 가문은 흉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라와 가야에서 북방계 유물이 출토되는 것도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 예컨대 김일제 집안의 도래로 한국사가 시작되었다거나 고조선의 역사가 부정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여러 문화의 교류에 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지요.
문무왕비문에 투후 김일제가 언급되어 있나요??..다만 비문의 "투후 제천지윤(秺侯祭天之胤)"에서 당시 투후 벼슬한 사람은 金日磾와 그후손에서 비롯되었기에 김일제를 지목한 것으로 보입니다..김일제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유입되어 그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면 기존 토착세력이 가진 문화와 이들이 가져온 문화가 서로 융화되어 그 세력권내에서 상당히 발전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신농님 수고하셨습니다.^^
결정적으로 고조선이 하루아침에 뚝딱생겨서 뚝딱 그넓은 영토를 차지할 수는 없죠. 분명 그이전 역사는 존재하죠.
소호금천님/가급적이면 새로운 내용은 글로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꼬리말이 너무 겹겹이 있어서 보기가 어렵습니다. 왕망의 가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아본 바 없어서 "~했다고 합니다" 류로 썼는데, 제가 알기로 한서 왕망전에 그의 아버지로 왕씨 성을 가진 인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조금밖에 확인을 못했기 때문에 제가 잘못 안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을 하고 싶으시다면 글로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김일제가 기록되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투후가 기록되어있는데 김일제와 그 후손을 지목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굳이 이런 것까지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요..;; 김일제 가문의 도래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를 강조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한 것은, 고금문을 주장하는 계열에서 김일제 가문의 도래로 한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일제 가문의 도래 가능성 여부는 위의 "가야 건국 세력"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아~ .저 부분에 대해 저도 어떠한 확신을 가질만한 지식을 가지지 못해서 신농님의 댓글을 반론한 것이 아니라 내용상 조금 애매한 부분에서 보다 정리하는 차원으로 덧붙인 댓글에 불과 합니다.
여휘님/그런 설도 있었군요. 음..허황옥 세력이 본래 해양 세력이었다고 본다면 분명 이야기가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김병모 교수님의 주장에 인상을 받았던 것은, 쌍어 문양의 이동 루트를 상세하게 파고들었다는 점입니다. "제4의 제국" 프로에서는 파형동기가 오키나와 -> 일본 열도 -> 가야로 전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남방계 루트의 문제도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김병모 교수의 쌍어문은 삽질이라고 봅니다. 이유는 쌍어문은 굳이 인도까지 가지 않더라도 중국의 유물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고, 우리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니까요. 더구나 허왕후보다 훨씬 이전에 등장하니까 쌍어문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다보니 나타난 무리수지요. (혹시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사진을 올릴 방법을 알려주시는대로 쌍어문 유물을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쌍어문은 허황후 사당에 있는게 아니었고 본래부터 쌍어문이 있었다는 어떤 근거도 없지요.
거기다가 님들이 인용하는 문정창 선생은 "한국고대사연구평/209p"에서 "이병도가 한무제때 귀화인 흉노태자 김일제의 후예인 것 같이 말한 것은 모두 유래를 중국에 구하려는 모화사상에 불과한 것"에 대해 '신라왕실에 대한 하나의 모독이 된다'고 단언하고 대당전쟁으로 당을 물리친 것 등을 들어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는 이병도를 기피하면서도 필요하면 이병도의 주장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