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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노태우의 ‘6‧29선언’ 25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 등을 골자로 한 노태우의 ‘6‧29선언’은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이다. 군대를 사병(私兵)처럼 동원하여 광주시민들을 대거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의 7년 독재 끝자락에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노태우가 필생 전략으로 빼어든 카드가 바로 ‘6‧29선언’이었다.
노태우의 6‧29선언을 생각하면 나는 자연발생적으로 같은 해 11월 28일 밤에 발생한 ‘KAL858기 폭파사건’이 떠오른다. 노태우의 6‧29선언과 KAL858기 폭파사건은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6‧29선언 이후 노태우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지 않았다면 대선 직전의 KAL858기 폭파사건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KAL858기 폭파사건은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를 직선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대중‧김영삼의 분열로 민주회복을 열망하는 국민의 표가 분산되는 상황에서도 11월 말까지 노태우는 김영삼보다 열세였다. 그러다가 KAL858기 사건이 터지면서 노태우는 KAL858기 사건을 적극 활용하여 200만 표 이상의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1987년 12월 16일자 1면 지면이다
ⓒ 사람일보 - 수구 족벌언론
만일 양김의 분열 상황 속에서도 노태우의 당선이 비관적이지 않고, 선거 초반부터 양김의 분열 덕을 톡톡히 보아 노태우 당선이 낙관적이었다면 과연 KAL858기 폭파사건이 일어났을까? 노태우의 낙승이 처음부터 가시화되었다면 KAL858기 폭파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KAL858기 폭파사건이 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한 당시 안기부의 공작이고 만행이었음을 확신한다. 처음에는 노태우의 6‧29선언 당시부터 안기부의 공작이 개시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예상과 달리 열세를 면치 못하는 선거 상황을 일거에 뒤집기 위해 급하게 공작을 실행했기 때문에 결국 수많은 ‘공작 증거’들을 남기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1987년 11월 KAL858기 폭파사건이 일어난 직후부터 그것이 노태우를 당선시키기 위한 ‘공작’임을 직감했다. 내 직감을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발설하기도 했다. 당연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안기부가 그런 엄청난 만행을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다간 유언비어 날조 유포 죄로 크게 욕을 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충고를 하는 이도 있었고, 혹시 빨갱이 사상을 가진 사람 아니냐고 눈을 흘기는 이도 있었다. 지금은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지만, 언젠가는 안기부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많은 국민이 진실을 알게 될 날이 오리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며 반드시 그런 날이 오기를 하느님께 기도하기도 했다. 내 말에 반신반의하는 성당의 대자 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전두환과 노태우, 또 그들의 추종자들은 ‘광주학살’이라는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며 정권을 탈취한 피도 눈물도 양심도 없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한 죄를 안고서도 버젓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기에 두려울 것이 없다. 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못할 짓이 없다. 비행기 하나 폭파시키고 백십오명 정도 죽이는 것은 그들의 속성상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만 묵인해주고 거들어주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광주학살을 묵인해준 미국은 이번에도 전두환과 노태우를 도와 줄 것이다.”
▲ 유족들의 기자회견 / KAL 858기 가족회가 지난 2006년 1월 17일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집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해명해야 할 사람들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신성국 신부.
ⓒ 사람일보 - 칼858기 가족회
하지만 당시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광주학살’이라는 천인공노할 만행조차도 국민 대부분이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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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구석의 삼류문사로 살다보니 KAL858기 폭파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의로운 이들의 투쟁에 동참하지도 못했고 또 유족들의 슬픔과 통한을 위로하는 일에도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115명 원혼들을 위로하는 기도를 하며 살았다. 어느 핸가(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이었지 아마…) 천주교의 각 성당으로 KAL858기 폭파사건의 진상규명을 청원하기 위한 유족들의 서명요청서와 서명지가 배포되었을 때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많은 교우들이 서명을 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2000년에 세 권으로 나누어 출간한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라는 장편소설에 KAL858기 폭파사건을 부분적으로 다루기도 했는데, 언젠가는 KAL858기 폭파사건의 전모를 다루는 본격적인 작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도 덧없이 세월을 잃고 나이만 먹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최근 캐나다에 계시는 청주교구 소속 신성국 신부님에게서 전화와 메일, 그리고 <김현희 신상 털기>라는 이름의 큰 글 꾸러미를 메일로 받게 되었다. 신 신부님의 꾸러미 글은 원고지로 500매 분량이 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글을 꼼꼼히 정독을 했다.
신성국 신부님의 <김현희 신상 털기>는 33개의 중간 제목들을 가지고 있다. 김현희는 ‘가짜’이며, 안기부의 수사 발표들은 명백한 거짓임을 조목조목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그저 ‘의혹’을 말하는 게 아니다. 김현희가 왜 가짜이고, 안기부의 수사 발표들이 어째서 거짓인지를 구체적으로 적시해내고 있다. 그리하여 115명의 목숨을 앗아간 KAL858기 폭파사건은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안기부의 공작이요 범죄임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신성국 신부 / KAL858기 진상규명을 위해 한국과 미국에서 일해온 신성국 신부는 청주교구 소속으로 현재 캐나다에서 사목생활을 하고 있다.
ⓒ 사람일보 - 신성국 신부
나는 신성국 신부님의 <김현희 신상 털기>를 읽으면서 천주교 신자로서 사제에 대한 기본적인 존경심 외로 무한한 감사와 외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신 신부님이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면서 사명감을 안고 자료색출과 조사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자료 분석을 하는 모습들을 그의 글을 통해 훤히 볼 수 있었다.
신성국 신부님이 KAL858기 폭파사건 규명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때는 2003년이다. 그 후 국정원으로부터 직접적인 협박도 받았고, 교회 내부의 압력도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활동을 계속할 때 예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교회에서 돌연 그를 해외(미국)로 발령을 낸 것이다. 이 사실에서 나는 ‘빛과 소금’인 교회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갖는다.
그는 미국을 거쳐 현재 캐나다에 3년째 체류하고 있는데, 외국에 나가 있으면서도 KAL858기 폭파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외국에 나가 있는 덕분에 새로운 차원의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인터넷 매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건 진상규명 활동에 결정적인 큰 소득과 반전의 계기를 꼽는다면, 2007년 10월 법원의 정보공개 청구에서 승소하여 ‘KAL858기 사건’ 관련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 김현희 진술서 등을 확보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사건 발생 20년간 수사기관이 공개하지 않은 수사 관련 자료들을 입수한 후 사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분석 작업을 거치면서 안기부와 검찰의 숱한 거짓들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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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국 신부님은 내게 <김현희 신상 털기>라는 큰 글 꾸러미를 보내면서 올해가 KAL858기 폭파사건 25주년임을 말하고,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일조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신 신부님과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던 차에 문제의 가짜 인물 김현희가 지난 18일 밤 ‘TV조선’의 토크쇼 ‘시사토크 판’에 출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접한 신 신부님은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도 KAL858기의 ‘진실’을 찾아 사투하며 살아온 천주교 신부의 운명과 진실 뒤에 숨어버린 의혹의 여인 김현희와의 숨바꼭질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스스로 확인했다.
▲ 김현희 / 18일 밤 TV조선의 토크쇼 '시사토크 판'에 출연해 북한에서 공작원으로 선발된 과정 등을 설명하는 김현희씨
ⓒ TV조선 화면캡쳐 김현희
그는 김현희 방송 출연이 한편으로는 씁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김현희의 ‘TV조선’ 출연 동기와 내용들이 대선 정국과 맞물려 공안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겼지만 무엇보다도 ‘KAL858기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사회적 관심의 기회로 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그는 지난 21일부터 천주교의 대안 언론매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1987년의 KAL858기 폭파사건의 진상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글을 연재 형식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우선은 자신의 심경을 밝히는 ‘서론’격의 글을 올리면서 김현희에 대해 유족과의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이번처럼 특정 방송사 ‘시사토크’ 프로에 김현희씨 혼자 출연하여 일방적으로 ‘KAL858기 사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국민들이 기대하는 진실의 목마름과 욕구를 채워줄 수 없다. 오히려 불신과 의혹만 증폭시키는 역효과만 가져올 뿐이다. 25주기의 특별한 의미를 살리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공개석상에서 먼저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만나서 진심으로 대화하고 진실의 실체를 찾아 궁극적으로 화해하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김현희씨가 약속한대로 KAL858기 가족들을 돕는 사랑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현희가 유족들과 신성국 신부의 공개토론 제의를 수용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자신이 ‘가짜’임을 증명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현희가 끝내 유족들의 공개토론 제의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TV조선’만이라도 유족들과 신성국 신부를 출연시키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 김현희에게 할애한 시간만큼 유족들에게도 반론의 기회를 주어야 형평이 맞는 일이다. 하지만 '조선‘의 속성상 그것은 가능치가 않아 보인다.
▲ KAL858기 가족회 회장 차옥정씨 / KAL858기 가족회 회장 차옥정씨는 최근 'TV조선'에 출연한 김현희에 대해 유족들과의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 사람일보 - KAL858기 가족회
김현희의 느닷없는 ‘TV조선’ 출연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구심의 눈길을 보낸다. 요즘 한창 수구 족벌언론과 수구세력이 불을 지피고 있는 ‘종북 논란’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 정국을 앞두고 그들이 종북 논란에 불을 지피는 것은 나름대로의 계산이 깔린 일이다. 종북 논란에다가 1987년의 KAL858기 사건을 얹으면 어떤 큰 효과가 있으리라는 계산일 터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25년 전으로 되돌아가려는 퇴행적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 25년 전인 걸로 착각하는 것 같다. KAL858기 사건을 만들어 일시에 선거 판세를 역전시키고 200만 표 차이로 압승을 거둔 그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때로부터 25년, 사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일정 부분 그 계산이 통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 대중이 민중으로 승화되지 못한 구석이 엄존하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KAL858기 폭파 사건의 성격은 단순하지 않다.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의 대결선이 분명해지는 것만큼 국민들에게 ‘자각의 길’은 더욱 크게 확대될 것이다.
그것이 KAL858기 폭파사건의 유족들과 신성국 신부를 비롯하여 진실과 정의의 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바람일 것이다.
<가톨릭 굿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