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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하수도학회 창립40주년 기념식 열린다
환경부도 버린 상하수 명칭 유일하게 살린 학회
상수도관련 법,제도,산업발전과정의 박중현교수
대한상하수도학회(회장 김두일) 창립 40주년 행사가 6월10일 개최된다.
학술상과 기술상 부분 공로상이 수여되며 학회 연혁과 회고사, 미래비전이 제시된다,
대한상하수도학회는 박중현교수가 창립했다. 국내 여타의 학회들은 관련 학자층이 결집하여 학회를 태동시키고 연령순으로 회장을 역임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례다. 그러나 대한상하수도학회는 박중현교수(1대-6대,1987-1999)가 한국폐기물자원순환학회는 이승무교수(초대-3대, 1983-1991년)가 주도적으로 학회를 설립하고 회장연임을 통해 학회를 육성 발전시켰다. 왜 학회장을 후배나 제자들에게 넘기지 않았냐는 질문에는 아직 제자들이 어려서라는 답변이다.
학회가 창립되기 전 박중현교수의 영역은 대한민국 상하수도 학문의 최고지 에서 정책, 제도, 설계, 학문등에서 열정적인 활동을 했다. 언제 학교 수업을 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환경경영신문은 역사성이나 시대적 발전에서 중요 역할을 한 인물들에 대해 집중 조명을 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든 쉽게 간과해버리는 인물이든 어느 한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하여 후대에게 좋은 길목을 터준 인물 중심으로 조명하고 있다.
박중현교수는 길샘 김동환이 만난 인물 시리즈로 조명했다.(2025년 9월)
이번에는 상하수도 발전 120년의 역사적 물줄기를 더듬어 보고 학문적 관계와 학자들 중심으로 박중현교수를 조명한다.
우리나라의 수도역사는 통상적으로 1908년 서울 뚝섬 정수장에 완속여과지를 설치하고 통수한 것이 공학적 기준이다.
그러나 경영측면에서는 이보다 5년 전인 1903년 미국인 콜르란과 브스트윅이 대한제국으로부터 상수도시설 경영 특허를 취득한 것으로 시작된다. 1905년에는 대한수도회사가 설립되고 1906년 뚝도에 정수장 시설공사를 시작한다,
제도와 조직에서는 을사조약 이후 칙령 제 21호 수도국 관제가 실시되고 도지부에 수도국을 신설하고 수도설치와 급수 및 요금징수 조항을 제정한다.(1906년) 1910년 조선총독부령 제 61호가 발동되고 수도상수보호규칙이 마련되었으며 1911년 조선총독부령 제 18호 ‘관영수도급수규칙’이 공포된다.
정리하면 수도산업은 수도경영을 시작(1903년)으로 수도사업자 설립(1905년),수도사업관련 법(칙령,1906년), 수도시설통수(1908년), 국가법 수립(1910)으로 이어진다.
이후 인천 노량진수원지 정수 및 송수(1910), 관영수도급수규칙(1911), 경남 진주 급수, 전남 목포 수원지 개발급수(1911), 전남 목포 수원지개발(1911), 전북 군산 정수장 신설, 조선총독부령 제 108호 관영수도급수규칙개정(급수를 급수전용, 사설공용, 관설공용, 선박용, 소화용 5종으로 분류, 1915), 부산 수도급수조례 제정(1917), 대구 가창 정수장준공(1918), 수도관 강관사용(1920), 경남 통영 급수(1924), 수도미터기 청염제작소 생산(1935), 경성부 수도관련 부서 개선(총무, 재무, 공영부 3부로 개편하고 상수도 업무는 공영부 수도과에서 관할(1938년)하게 된다, 학술적으로는 <경성부 상수도개요>가 1938년 발행되었다. 수도에 관한 업무는 도지부의 관할이였지만, 1924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내무부 토목과 소관으로 정착되었다.
1945년 8월 한국정부수립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수도업무는 방위부에서 공영부로 전환하고 공영부장 아래 수도과장을 두고 산하에 공무계, 사무계, 요금계 3계를 편제 시켰다. 1947년에는 서울시 훈령 제 29호에 의해 서울시 공익사업국에 수도관계과가 조직되었다. 한국전쟁 후 부산시대에는 산업건설국 산하에 상공과, 농림과, 토목과, 수도과가 운영되었다.
1953년에는 김일열 창업주가 부산에 ‘한국기계주물제작소’를 설립하여 국내최초의 회주철관 시대를 열었다. 1955년 3국 구조에서 통계국이 신설되어 4국 체계로 전환되면서 건설국은 토목국으로 개칭되었다.
1954년에는 수도계가 수도과로 승격되었으며 관리계, 요금계 수도 1,2계로 신설되었다. 1956년 삼천리 자전차 공업사에서 가스용접 강관이 생산되었다.1957년 수도과는 도시계획과, 상수과등이 건설국 산하로 편제되었다. 1958년 부산파이프가 서독에서 조관기를 수입 강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0년 5월 16일 군사혁명 이후 지방자치법 개정으로 수도과가 수도국으로 승격되었다. 같은 해 이천전기에서 펌프모터를 국산화하였다.
1961년 12월 31일 조선총독부령 61호와 50호는 폐지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법 법률 제 939호가 제정되었다., 1962년 3월 10일에는 수도법 시행령을 제정하여 각령 제514호로 공포했다. 1964년에는 수도전 청동밸브 범용밸브가 생산되었다.
상하수도 관련산업의 출발시기
| 연도 | 생산제품명 | 비고 |
| 1908년 이전 | 토관, 납관,기와상수도관 | 백제시대에 기와상수관 |
| 1908년 | 주철관 (Hitachi/Kawasaki)매설 | 일본제품 공급 |
| 1920년 | 수도용강관사용(일본제철,가와사키중공업,히타치제작소 | 일본제품공급 |
| 1935년 | 수도미터기 청엽제작소 생산 | 1954년 금호전기가 인수 |
| 1953년 | 한국주철(한국기계주물제작소 설립)-김일열 | |
| 1956년 | 가스용접강관(삼천리자전차) | |
| 1958년 | 부산파이프 강관생산 | |
| 1961년 | 한국 최초의 수도법 법률 제 939호 제정 | |
| 1961년 | 신한공기주식회사 영등포에서 수도미터제작 | 60-80년대 1세대 수도계량기 기업 모두 도산, |
| 1964년 | 청동밸브 생산 | |
| 1965년 | 수도미터기공판개시 |
1966년에는 수도법이 개정되었다.(법률 제1824호) 한국수자원개발공사법의 제정되고(1966년),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창립되었다.(1967년) 지방공기업법이 제정(법률 제2101호)되어 수도국이 지방공기업으로 지정되어 지방공기업에 의한 상수도 운영이 시작되었다. <상수도시설기준>이 발간(1972년)되고 한국상수도협회가 설립된다.(1973년)
한국상수도협회지 ‘수도’지가 발간되고(1974년), 건설부 주택도시국을 도시국과 주택국으로 분리하였으며 도시국에 상하수도과로 개편한다,(1977년) 1980년 환경청이 발족하고 1981년 수도권 광영상수도 2단계, 낙동강 광역상수도(1983년), 금강계통 광역상수도(1984년)가 준공된다. 지방상수도는 내무부 공기업과가 맡았으며 건설부터 운영전반에 대해서는 건설부 상하수국이 담당했지만 물관리 일원화로 1994년 건설부 상하수국이 환경부로 이관된다.(보사부 음용수관리과)
박중현 교수를 성장시킨 서울대 1세대 교수들(1953-1957년)
박중현교수는 1953년 서울대에 입학하고 1957년 졸업한다.
원태상(1903년-1976년, 『하천공학』, 『위생공학』, 『수력발전공학』 등을 저술한 토목공학자, 경기도 광주 출생. 경성고등공업학교 토목과를 졸업, 조선총독부 토목과와 만주국 교통부에 근무, 하천조사와 하천수문(河川水文)자료의 정리·분석,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위생국장 근무 후 서울대학교 토목과교수, 미국에 가서 미네소타대학교·컬럼비아대학교·뉴욕대학교에서 연구)교수에게 하천 위생 및 수리를 공부한다.
구조공학에서는 박상조 교수와 안수한 교수(1925-2008년,양산시 출생, 규슈대 토목공학사, 도쿄대 토목공학박사, 한국수문학회장, 한국해양공학회장, 1954년 서울대 부임, 1986년 전두환 정부가 벌였던 '금강산댐 200억톤 수공(水攻) 위협' 사건 당시 건설부가 주최한 중앙하천관리위원회 회의에서 정부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조작이라는 생각이 들어 협조하지 않았다. 1996년 '서울대 총장의 양심'이라는 제목으로, 어용단체가 주관하는 강연회와 좌담회에 참가해 금강산댐이 폭파되면 큰 피해가 난다며 대응 댐 건설울 주장했던 선우중호 서울대 총장의 사죄를 촉구하는 글을 기고했다.)에게서 응용역학과 수리학을 배웠다.
이경형교수에게 콘크리트학을 배우고 시간강사인 정인준 선생과 신영기선생, 수원농대 변보엽 토목과 교수에게 토질과 수자원을, 박성대 교수에게 수자원을 안철호 교수(시간강사)에게 측량을 수업 받았다. 대학 후반기에는 최종완 교수(1927-2001년,강릉산, 경기고, 서울대 공대 토목공학과, 육사교수, 미네소타대 토목공학박사, 서울대 토목공학 조교수, 장충체육관설계(돔형식 최초),서울시 초대수도국장,서울시 제2부시장,강원도지사,공진청장,과학기술처장관,건설부장관,효성중공업회장, 14대 국회 출마 낙선)에게 구조공학을 정명식(1931-2021년, 서울산, 서울대 토목공학과 졸업(1955년), 미국미네소타대 토목공학석사(1959년), 서울대 토목공학 조교수,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1968년), 포스코입사(1970년), 토건부장, 건설본부장(부사장), 사장, 부회장, 포스코 3대회장(1993년), 한국철강협회장(1993년), 포스텍이사장(1995년) 선생에게 강의를 받는다.
5-60년대 내무부 수도분야에 활동한 사람들(1957-1962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이경형교수의 추천으로 내무부에 취직한다, 토목국에는 도로과, 도시과, 항만과가 도시과에는 도시계획계, 수도계, 하수도계가 있었으며 박중현교수는 도시과 기사보로 취업한다, 3년간 근무하면서 서울시 뚝도수원지 급수공사, 노량진에서 인천 수도 도수관로 공사, 나주에서 목포간 도수관로, 부산 회동댐공사, 대구 가창댐공사를 담당했다. 수도계에는 김경린 계장(1918년생, 함북 경성(鏡城)출생. 일본 와세다대 토목과(1942) 및 한양대 토목공학과 졸업(1967). 서울대 행정대학원 도시 및 지역 계획학과 석사과정 수료(1970). 1939년 『조선일보』에 「차창(車窓)」, 「꽁초」, 「화안(畵眼)」 등을 발표하여 등단. 일본에서 『VOU』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에 참가, 광복 후에는 『신시론(新詩論)』 동인으로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여 수도토목보다는 시인으로 유명) 정세연, 김태백, 이일선(서울대 8회), 윤철용(10회), 박숙현(한양대출신), 김원만(1927-2016년), 목포 조양해운 장남,서울대 토목과, 미국 존스홈킨스대,건설부 용수과장,한양대교수,한국수질보전학회 3대회장, 한국환경수도연구원 2대소장)등이 활동했다.
청구대학(영남대학교) 시절의 박중현교수(1962-1965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유학을 가게 된다. 오레곤대학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자 청구대학 최영박교수(서울대 6회,수원대총장)에게서 고향(대구)에서 생활하자는 권유를 받는다.(당시 토목과가 있는 학교는 서울대, 한양대, 대구 청구대, 부산 동아대, 조선대였다) 청구대에는 변동균(서울대 2회), 최영박 (서울대 토목공학6회, 7대 수자원학회장, 고려대교수, 수원대총장), 이우현(10회)교수가 있었다. 이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국립 구미공과대학을 설립하고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을 통합한 영남대학을 설립했다. 이후락은 울산 공과대학, 박종규 경호실장은 경남대학, 포철의 박태준은 포스택 대학, 인천대는 백인엽 장군이 설립했다. 청구대 공과대 토목공학 조교수로 활동했다.
안수한 선생 권유로 일본 동경대 유학(1965-1967년)
서울대 안수한선생의 권유로 동경대로 유학을 갔다. 동경대에는 하천의 최경열, 구조에 박상정 선생이 있었다. 여과사의 세균분석을 통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도표, 통계와 계산은 박중현교수의 사모님이 도와주었다. 박교수의 사모님은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최남선(1890-1957년, 육당,작가,언론인,신체시와 시조 발표,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 종합잡지‘소년’발행, 조선광문회 설립,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형 복역, 주간잡지 동명 발행,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 가담한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과도 결별, 태평양전쟁 시기 매일신보, 경성일보등에 학도병 권유 유세문 기고와 시국강연, 해방후 ‘민족개량주의로 친일파라고 비난, 그러나 장준하는 사상계에 <육당 최남선 선생을 애도함>이란 글에서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라고 옹호했다.)의 외손녀이다. 장인은 경성제대 이학부 교수고 장모는 동경여고를 졸업했다.
동경대에서 사층에 여과를 하면 기포가 발생되는데 그 기포 측정을 하였고 그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 후 서울대 시간강사로 1년 3개월간 출강했다. 봉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대 정주영회장 밑에서 1년 4개월 근무한다. 정주영 회장과 일본, 영국을 방문하면서 조선소 건립의 꿈을 실현시키는 청사진을 그려갔다. 토목계는 원태상, 최종완, 안수한 그리고 박중현 4인이 활동하였다. 영국 방문시 10만톤, 20만톤 배를 어떻게 만들 수 있냐고 물어오자 정주영회장은 “당인리 화력발전소를 현대에서 영국 차관으로 건설했으니 당연히 화력발전소의 철판을 만들 수 있으면 배도 만들 수 있다.”라고 답했다.
정회장이 500원짜리 거북선 지폐를 보여준 것도 있지만 기술적으로 화력발전소를 건설했듯 철판으로 돌리는 게 배다, 현대건설도 20만톤 배를 만들 수 있다고 영국측은 화답했다.
서울대 복귀하여 도시공학과 설립(1969년-1998년)
서울대 관악캠퍼스 정문앞에 댐건설을 설계
현대건설에서 학교를 그만두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처갓집 외할머니(최남선의 부인)가 “머슴살이를 하더라도 개인 머슴살이보다 국가의 머슴살이가 낫다고”고 충고했다. 박봉이지만 서울대로 자리를 옮기고 도시공학과 설립을 설계했다. 당시 공과대학에는 응용 3 과인 화학과, 물리과, 수학과가 있었는데 화학과는 전자공학과, 물리과는 계측공학과, 그리고 도시공학과를 만들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설계를 담당했다. 규장각 너머 500호 남짓한 부락을 철거하고 현대건설과 영국,프랑스, 미국을 돌아 다녔다. 일본에서는 조선소 도면, 미국에서는 상하수도 도면, 하수처리장, 정수장 도면을 가져왔다. 그 도면으로 1백만톤 조선소를 만들었다.
도시공학 설립을 위해 박창호 교수, 건축과 주종원, 윤정섭교수, 안철호교수가 측량을 담당했다, 도시공학은 미국은 인문대학 지리학과, 일본과 독일은 공과대학에 있다. 박교수는 “일본은 수도를 일반 구조보다 상위로 여기는데 상수(上水)는 일본어로 신(神)이라고 한다, 따라서 상수도 공학은 신의 공학이고 생명공학이다. 따라서 상하수도공학은 상하수도 생명공학이라고 명칭을 바꿔야 한다, 농과대학을 농생명과학으로 바꾸듯...”라고 말한다.
강의는 박중현교수가 상하수도를 정태학교수가 환경을 강의했다.그래서 오늘의 상하수도 전문 학자들은 서울대 박중현,정태학 교수 가 대부분 배출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연못과 낙성대 터널도 설계
한심석(의과대학출신)총장시절 주종원교수는 학교 계획을 설계했고, 박중현교수는 서울대 하부구조 계획을 세웠다. 미국 용역팀은 한국에 와서 경복궁과 덕수궁을 둘러보고 서울대 건물 배치를 ㅁ자로 배치했다. 당초에는 연못을 만들었지만 부영양화로 녹조처리가 어려워 연못에 정류장과 정구장으로 만들었다. 초창기 학교 앞에 댐을 설계하고 낙성대에서 서울대 가는 중간에 터널을 만들어 대학본부하고 총장실을 연결하는 계획도 세웠지만 무산되었다.
2천년대 서울시 도시기본계획 수립
2000년대를 향한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최상철 환경대학원 교수, 박병주 홍익대학 교수, 강병기 한양대학 교수, 김안재 환경대학원 교수, 교통에 임강원 환경대학원 교수, 그리고 하부구조 상하수도는 박중현 교수가 담당했다. 서울시 총책은 안상현씨였다. 박중현교수는 서울시 상수도, 하수도 및 하수처리장 계획과 한강 수자원 확보가 주였다. 한강 수중제, 수중보를 뚝도와 마포, 하구언 쪽으로 계획했다. 경인운하계획은 국방부와 협의하였다. 38선 방위와 2차 마지노선으로서 한강을 생각하였고, 적의 탱크부대의 저지 방법으로서 수위를 높여 건설하는 계획을 설계하였다.
대한민국 학술원 활동으로 25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은 134명이다. 인문사회회원이 67명, 자연회원이 67명이다. 자연분야 1분과에는 노재식박사가 3분과에는 박중현교수와 일사회 회원인 손장열박사가 있다. 토목분야 학술원 회원으로는 경도대학 출신의 최경열, 내무부 토목국장출신의 민한식, 서울대 원태상교수, 신영기 선생 후임으로 박중현교수가 학술원 회원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환경경영신문 https://ionestop.kr/김동환 환경국제전략연구소장, 환경경영학박사, 시인,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