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키나와

부대 내 사진동아리의 스미어 병장은 필름을 오키나와沖繩로 보내어 컬러사진을 뽑아서 자주 보여주곤 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흑백만 만들어 총천연색 컬러사진은 그 자체로서 경이로운 부러움이었다. 미지의 세계 오키나와는 그렇게 처음 그 이름을 듣게 되었고 가끔씩은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병사들이 그쪽으로 가거나 그곳에 복무하다가 한국으로 전입을 오기도 했다. 반백년 전 그땐 오키나와가 미국 영토여서 그러했을 터이다. 일본 가고시마 지란의 특공평화회관에 전시된 자료들은 잊고 있던 오키나와를 떠오르게 했다. 오키나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이곳 주민들과 강제로 끌고 간 우리 조선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안겨준다.
패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은 오키나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전투준비를 마친 후 미군이 상륙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1945년 4월 1일, 드디어 미군 6만이 오키나와 해안에 상륙을 감행한다. 두 나라의 사활을 건 전투가 벌어지면서 3개월 가까이나 국지전은 이어졌고 일본의 저항은 격렬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사투 속에서 미군은 오키나와 지상전에서 4킬로미터를 전진하는데 한 달 반이나 걸릴 정도로 맹렬한 저항을 받아야 했다. 무사시와 함께 일본이 자랑하던 전함 야마토 역시 격전 끝에 4월 7일 침몰했다. 3천 명의 시체와 함께 전함 야마토는 그 거대한 몸체가 넷으로 쪼개지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일본인은 미군기가 전함 야마토를 향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오키나와 해역에 포진한 1천여 척의 미군 함정에 대항하여 일본군은 백여 대씩 편대를 이룬 비행특공대를 투입했다. 숨 쉴 사이 없이 자살폭탄이 되어 날아들었다. 자살특공대를 편제한 것은 해군이 먼저였다. 일본 육군이 반다萬朵라는 이름의 자살특공대를 편제했을 때 일본 해군은 이미 자살특공으로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전투기에 의한 자살공격만이 아니라 해군은 함정으로 함정에 부딪치는 자살특공정 카이텐回天까지 투입했던 것이다. 일본의 공격은 계속되어 6월 4일 하루에만 196대의 특공기가 미군함정에 몸을 부딪치며 부서져갔다. 가미카제 특공대 가운데는 비행미숙으로 미군함정에 떨어지지 못하고 바닷물에 쑤셔 박히는 것도 많았다.
격침된 함정은 적었지만 미군의 손상은 의외로 컸다. 피로의 극한에 내몰린 미 해군 병사들 가운데는 일본군 자살특공대의 비행기가 자신의 함정에 제대로 떨어져주기를 바라는 병사들까지 나왔다. 배가 손상을 입으면 일단 하와이든 어디든 이 지겨운 전장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키나와의 하늘과 바다에서 일본군이 최후를 건 사투를 벌이는 동안 뭍에서는 섬 주민들까지 뒤섞인 항전이 처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일본군 병사 속에 섞여서 싸웠던 것이다. 여자들도 머리를 자르고 전투모를 썼다. 미군 진지로 뛰어들면서 폭탄을 안고 자폭하기 위해 남장을 했던 것이다. 죽창을 들고 전투에 가담한 주민들 속에는 아직 젖도 안 뗀 어린 것을 업은 엄마도 들어있었다.

어린 학생들까지 전투에 참여했다. 오키나와의 민간인 사망자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그들 또한 미군의 상륙에 저항한 평상복의 전투요원이었다. 마지막은 집단자살로 이어졌다.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이 맨 먼저 점령한 곳은 요미탄 마을이었고 그곳 주민은 139명이었다. 주민들은 치비치리 종유굴로 피신했다. 미군이 포위하자 열여덟 살 소녀는 “엄마 날 죽여주세요”라며 매달렸고 종군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주방의 식칼로 딸의 목을 쳤다. 딸을 죽인 후 어머니는 독극물이 든 주사기로 남은 가족을 하나하나 살해한 뒤 자신도 그 주사기로 자살했다. 낫으로 가족을 죽인 아버지는 불붙은 이불을 뒤집어쓰는가하면 자식들을 먼저 죽인 부모들은 동반자살을 택했다.
이렇게 목숨을 끊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키나와를 지키려는 일본인의 사활을 건 저항은 여자중고등학생들까지 동원한 처절한 것이었다. 밀고 밀리는 오키나와의 전투가 두 달째 접어들었을 때 동굴 안에 자리 잡은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돕던 여학생들은 해산명령을 받고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들은 모여 앉아 부둥켜안고 다 함께 목 놓아 <바다에 가면>을 불렀다. ‘바다에 가면 물에 젖은 시체가 되고 산에 가면 풀에 덮인 시체가 되리 천황의 곁에서 죽으니 무슨 아쉬움이 있으랴’ 여학생들이 탈출하려 했을 때였다. 미군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 37명 가운데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여학생은 다섯이었다.
히메유리姬百合학도대는 오키나와사범학교 여자부와 제일고등여학교의 교사와 학생 240명으로 간호업무를 맡은 조직이었다. 백합소녀들이란 뜻의 ‘히메유리’는 두 학교의 교지 오토히메乙姬와 시라유리白百合에서 따온 것이었다. 간호업무에 투입되었던 히메유리학도대가 진격해 들어오는 미군에 포위당하자 군부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다만 해산을 명령했다. 이들도 <바다에 가면>을 부르며 죽어갔다. 오키나와의 함락과 운명을 함께한다는 각오로 섬의 남쪽 절벽 아라사키 해안에서 바다로 몸을 던진 소녀들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동굴에 숨어있던 세 명의 소녀는 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학교의 비극도 있었다.
어린 남학생들을 모아놓은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라는 학도병조직은 1780명 가운데 890명이 전사했다. 오키나와사범학교는 224명의 학생을 잃었다. 석 달 동안 이어진 이 전투로 학생과 교사시설을 전부 잃은 사범학교와 제일고등여학교는 폐교절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50만의 병력을 투입한 미군은 일본군의 처절한 저항을 걷어내며 결국 18만 3천 명의 병력을 오키나와에 상륙시키는데 성공한다. 30만 명에 가까운 희생자를 내며 오키나와를 지키려했던 일본군의 사투가 끝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여학생들이 바다를 향해 뛰어내린 그 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자살절벽이라는 이름이 남았다. 오키나와의 비극은 전쟁과 그에 따른 살상의 비극을 넘어선다.

편견과 차별로 오키나와 주민을 대해왔던 일본은 미군에 잡히면 모두가 사살되거나 강간당한다는 공포심으로 그들을 절망에 빠뜨려 집단자살을 하도록 세뇌했던 것이다. 포로가 된 주민들을 통해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려는 군부의 음모였다. 그러나 세뇌만으로 이 광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세뇌된 그대로 천황의 나라를 몸으로 지킨다는 국체호지의 정신에 따라 집단자살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군의 작전에 방해가 되는 주민들이 식량을 조금이라도 덜 축내도록 군부는 주민들에게 수류탄과 칼을 주며 자결을 명령했던 것이다. 자국민에게까지 가해진 일본군의 가공할 만행이었다.
오키나와의 참화 속에도 조선인은 있었다. 오키나와에 끌려와 비행장을 닦거나 여러 공사에 투입되었던 1만 명의 조선인 군부軍夫와 일본군 위안부 소녀들도 미군의 포탄에 희생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조선인들에게조차 자신들의 동태나 정보를 미군 측에 알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학살을 감행했다. 오키나와에 끌려와 있던 조선인들의 죽음은 이토록 처참했다. 왜 그들이 죽어야했는지는 그 어떤 논리나 인과성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두 나라의 전쟁 사이에 낀 압살, 오키나와의 조선인은 그렇게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죽어갔다. 와전瓦全이라는 말이 있다. 헛되이 아무 보람도 없는 삶을 이어갈 때 쓰는 말이다. 이 와전의 반대가 되는 말이 옥쇄다.
부서져 옥이 된다는 뜻이다. 와전과 달리 명예나 충절을 더럽힘 없이 지키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때 쓰이는 말이다. 미군에 의해 일본의 기지들이 하나씩 점령되면서 일본인들은 수없이 많은 옥쇄를 감행한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이후 이어진 일본군의 패퇴를 두고 옥쇄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참패 혹은 전멸과 어떻게 다른가. 꽃이 아름다운 고산식물과 관목림이 우거진 태평양 알류산열도의 섬 애투는 1942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다. 그러나 다음해 5월 이 섬을 탈환하려는 미군과의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2500명은 전멸한다. 이 참패를 두고 일본은 옥쇄라고 한다. 죽었지만 항복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미화한 것이다.
타라와섬 공방전에서 섬 전체를 요새화했던 일본군 수비대는 4일간에 걸쳐 격렬하게 저항했다. 결과는 4600명이 죽고 포로가 된 일본군은 146명뿐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일본은 옥쇄라고 말한다. 일본이 말하는 황군. 천황의 군대라고 신성시했던 이 군대의 실상은 이미 1937년 중국의 난징대학살에서 낱낱이 그 잔학함이 드러난다. 난징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중국인을 학살한 일본군은 자포자기에 빠진 패잔병도 비적도 아니었다. 당시 일본 최정예를 자랑하던 10만의 정규군, 이름하여 황군이었고 그 지휘관은 제10군사령관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과 천황의 숙부가 되는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였다.

일본군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수많은 부녀자를 강간하고 난징 성내를 피바다로 만들어가던 한 달 사이에 여기저기 나붙은 대자보에서는 일본을 가리켜 동양鬼 혹은 삼광이라고 불렀다. 삼광작전이라는 작전이랄 수도 없는 비인도적 행위를 일본군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저질렀다. 죽여 버린다는 殺光, 태워버린다는 燒光,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여자를 더럽힌다는 掠光으로 중국인들에게 행한 일종의 몰살작전이었다. 천황의 군대가 저지르고 있던 이 만행을 난징함락이라는 승전으로 받아들여 기뻐하면서 일본인들은 곳곳에서 온통 하나가 되어 등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애국행진곡을 합창하고 깃발을 펄럭이며 그들은 거리를 돌아 신사 경내까지 행진했다. 황군의 난징 입성을 맞아 일본 천황은 이례적으로 기쁨의 칙어를 내렸던 것이다. 살아오면서 줄곧 일본이란 섬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부끄러웠던 것은 나라 잃은 망국의 한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일제 강제징용으로 히로시마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고 원폭투하마저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을 떠올리면 모골이 송연하다. 직접 동란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도 오키나와 비극의 역사를 통해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