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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묵상글 ( 연중 29주간 수요일. - 악용하지 말아야 할 것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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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10.22 04:12
- 악용하지 말아야 할 것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우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행복한 종의 비유를 복음에서 듣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종의 행복 얘기를 들었다면
오늘은 주인이 없을 때도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는 종의 행복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니까 마르타와 마리아, 일과 사랑, Doing과 Being에서
어제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문 마리아의 행복 얘기라면
오늘은 주님 사랑 까닭에 주님 일을 충실히 하는 마르타의 행복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종의 비유 얘기에서는 종의 불행 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일을 충실히 하는 지혜로운 종은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어리석은 종은 불행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집사가 아닌 단순한 종이었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어제의 종은 주인과 종 사이에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없어서
그저 주인님만을 위해서 잘 깨어 기다리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종은 단순한 종이 아니라 집사 신분의 종이고,
주인님과 자기 사이에 다른 종들이 있으며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주인님께는 자기도 종이지만 종들에게는 지배인(manager)입니다.
그런데 주인님의 종이기에 맡겨진 일을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데
차츰 지배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종들을 지배하고 억압합니다.
주인님의 집사(Steward)요 지배인이 주인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대신 사랑을 베풀라고 자녀를 맡겼는데
집사에 불과한 아비 어미가 자녀를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대신 사랑을 행하라고 형제들을 맡겼는데
집사에 불과한 본당 신부와 수도회 장상들이 제 맘대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사라는 지위를 선용하지 않고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집사직의 나를 돌아보고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용하지 말고 선용해야 할 것은 집사라는 지위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은총 지위도 악용하지 말아야 하고 선용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어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느님 은총은 풍부할 것이라고
은총을 악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동시에 선용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한 죄인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풍부하지만
은총을 악용하는 죄인에게도 은총이 풍부하지는 않습니다.
얼마간 참아주시기는 해도 마냥 참아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노자 도덕경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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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삽시다”
“우리의 영혼은 새와도 같이,
사냥꾼의 올무를 벗어났으니,
올무는 끊어지고 우리는 살았도다.”(시편124,7)
주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지향하는 이들이라면 마음에 담아둬야 할 다음 오늘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독.”버섯과 독벌레는 아름다운 색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도 이와 같으니, 꾸며낸 색은 유혹이 아닌 경고다.”<다산>
“교묘한 말로 꾸미는 얼굴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仁)한 사람이 드물다.”<논어>
오늘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기념일이네요.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웠던 성인 교황님으로 기억합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들이라면 언행 역시 소박하고 담백합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하지 않은(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한국미의 삶을 삽니다. 예전 써놨던 <초록빛 생명들>이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영성이 아니다
하늘만 보고 별들만 보고
살 수는 없다
땅에 뿌리 내린 더불어의 영성이다
하늘 담을수록
땅깊이 뿌리내려 초록으로 빛나는 생명들
채소밭의 무, 배추, 형제들
포근한 어머니 땅 품에서 사이좋게 잘도 자란다.”<2001.9.14.>
또 하나의 재미있는 <웬 아침부터 육체미 대회가?> 라는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이미 타계한 이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이 이 시를 읽고 빙그레 웃으며, “이 신부님 야해.”하는 따뜻한 반응도 잊지 못합니다.
“웬 아침부터 육체미 대회가?
잘 가꿔진 무밭
나란히 도열한 무 사나이들
옆으로 늘어지 무잎들 다 벗어버리고
저마다 육체미를 자랑하는 무 사나이들
근육질 알통의 팔뚝들 같기도 하고
쭉벋은 종아리들 같기도 하다
옆에서 넋놓고 바라보는 배추 처자들
얼마동안은 계속될 육체미 대회
아침 산책 때 마다 꼭 봐야겠다”<2007.10.22.>
혼자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의 삶입니다. 혼자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이요, 더불어의 구원이지 혼자의 구원은 없습니다. 깊고 넓게 보면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가족, 한식구입니다. 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이며 서로는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와 같은 연장선 안에 있습니다. 어제 깨어 있어라는 권고가 모든 제자에게 내리는 권고라면 오늘 복음은 관리자로서 형제들을 책임진 이들에 내리는 권고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관리자들은 물론 공동체에 몸담고 더불어의 삶을 사는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 할 권고입니다. 어제의 마지막 부분이 오늘 역시 복음 서두에 강조됩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유비무환입니다. 주님도 죽음도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베네딕도도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권고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주님께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서 늘 깨어 준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믿음이나 사랑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종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믿음의 삶,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물음에 분명한 답을 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언젠가 그날의 헴바침에 앞서, 하루하루 날마다 주어진 책임에 충실했는지 계산하며, 헴바치며 사는 일이 지혜로운 구원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2T의 삶이었는지 각자의 지난 하루 삶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삶의 ‘시험(Test)’에 통과한 삶이요, 책임을 다한 ‘신뢰(Trust)’할 만한 참삶이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순종의 종이자 의로움의 종에 해당됩니다.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삶은 역시 선택입니다. ‘충실한 종이냐 또는 불충실한 종이냐?’의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충실한 종의 삶을 선택하여 그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는 자기 책임에 소홀했던 불충실한 자들에 대한 처벌내용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데 이는 주님이 아닌 스스로 책임에 소홀함으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마지막 말씀이 엄중합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남에게 맡겨진 것과 비교하여 우월감이나 열등감의 유혹에 빠질 것이 아니라 각자 주어진 책임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만큼 노력을 많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각자의 처지에 따라 셈하시지 더도 덜도 바라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업적의 양>을 보시는게 아니라 맡겨진 책임에 최선을 다했느냐의 <삶의 충실도>를 보십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로다.”(시편12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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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도 종말에 관한 비유인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의 것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이라면, 뒤의 것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곧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일하는 자, 곧 ‘청지기’(집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과 ‘양식’과 ‘재물’을 돌보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동시에 ‘그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음을 밝혀줍니다. 그러니 ‘맡겨진 종은 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종’이며, ‘마구 부려 먹으라고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식을 내주라고 맡겨졌다’는 ‘사실 인식’을 정확히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실함’은 하느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신실하심’(헤세드)과 ‘한결같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종들을 끝까지 챙기시는 ‘충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 마음’을 ‘청지기가 지녀야 될 태도’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슬기로움’이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루카 12,42 참조) 일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주님을 알고, 주님의 뜻을 아는 일과 그를 수행하는 슬기로움’입니다. 이는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경외함이니,
그것들을 행하는 이들은 빼어난 슬기를 얻으리라.”(시편 111.10)
그러니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이신 당신의 뜻을 아는 지혜와 당신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주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는 까닭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먼저 부여받은 일, 맡겨진 일을 하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는 일에 헌신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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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반 모임에서 ‘휴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10월 13일에 출발해서 11월 7일에 돌아온다고 하니, 한 형제님이 그날 딸이 한국으로 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딸은 태권도 선수로 한국의 전국 체전에 참가한다고 했습니다. 가는 길이 같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자매님은 11월 7일에 어머니가 달라스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좌석을 확인해 보니 제 자리와 가까웠습니다. 따님이 이야기하기를 “손에 묵주 들고 기도하는 분이 저희 어머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저는 사제복을 입고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4시간 넘는 긴 여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동행할 수 있는 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은총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장거리 비행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론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정리하다 보면, 같은 시간이지만 무료한 시간이 아니라 은혜로운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쓰느냐에 따라 지루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은총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 다시 한번 “깨어 준비하는 종”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깨어 있음은 단순히 일을 미리 하는 것,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원 버스를 피하려고 일찍 걷는 것도, 학교나 직장에서 과제를 남보다 빨리 끝내는 것도 세상에서는 칭찬받을 수 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깨어 있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성과와 능률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도시 빈민 사목을 오래 해 온 제 친구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큰 성과를 내는 사목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이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추운 겨울 광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뜨거운 여름에도 복직을 호소하는 이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눈빛은 여전히 맑고, 가슴은 뜨겁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깨어 있는 종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문득 한용운 시인의 시 〈복종〉이 떠올랐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의 주어를 ‘하느님’으로 바꾸어 읽어보면 신앙인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지만, 그 자유를 하느님께 기꺼이 내어드릴 때 참된 자유가 됩니다. 억지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드리는 복종이기에, 그것은 더 달콤한 자유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었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들에게 천상의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저의 부모님 역시 늘 감사하며, 기도하며, 기쁘게 사셨습니다. 신앙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서 지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처럼 깨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를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각 시대와 문화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했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 내일은 너). 우리가 언제 주님 품에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과보다 의미를, 능률보다 가치를 바라보는 사람, 그래서 주님 앞에 언제든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깨어 있는 종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등불을 밝히며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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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오래되었지만 늘 새로운 지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10월 21일 화요일- 마흔두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그리스도교는 살아 숨 쉬는 전통입니다.
수도자(수도승)들은 전통을 지키면서도 변화와 발전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ONEING: A Living Tradition』(ONEING: A Living Tradition)에서 영성 작가 케이티 고든(Katie Gordon)은 베네딕도 수녀들과 함께 살아가며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나눕니다. 수도자들의 규칙적인 삶의 리듬 속에서, 수녀들은 끊임없는 쇄신의 전통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고령의 베네딕도 수녀 캐롤린(Sr. Carolyn)은 케이티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깊이 새기도록 당부했습니다. "하느님은 곧 변화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진화하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변화는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막 팍스 프라이어리(Pax Priory)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이곳은 1972년, 펜실베이니아 주 이리(Erie)의 베네딕도 수녀회가 도시 한복판에 평화와 비폭력의 중심지로 설립한 특별한 지향을 지니고 살아가는 공동체(Intentional Living Community)입니다. 캐롤린은 여든이 넘은 베네딕도 수녀로, 이 공동체의 초창기 구성원이었습니다.
한편 저는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지만, 현재는 '영적인 삶을 살지만 종교와는 무관한'(spiritual-but-not-religious) 성향을 지닌 30대 초반의 새 입주자였습니다. 제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 캐롤린 수녀님은 자신의 사무실을 저와 함께 쓰자고 초대해 주셨습니다.
그 수도원 구석의 사무실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참으로 살아 있는 전통(living tradition)의 문턱에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 세대와 세대 사이, 그리고 수도 소명의 다양한 표현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한때 수도복을 입은 수녀들이 거룩한 침묵(Grand Silence)을 지키던 그 공간에는, 이제 어린이집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천장을 울리며 퍼져 나갑니다. 과거에 수녀들이 칫솔로 정성껏 닦던 웅장한 나무 계단 위를, 지금은 다양한 이주민 공동체의 언어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뛰어다닙니다.
그 위층에는 수녀들의 신실한 사도직 활동에서 발전한 여러 사목 사무실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료 급식소와 식료품 나눔터, 현대의 구도자들을 위한 온라인 수도원, 그리고 전 세계 수도원들이 자원을 공유하는 그 모든 모습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1850년대, 독일계 이민자 교육을 위해 이곳에 정착했던 초기 수녀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목은 여전히 공동체와 봉사에 대한 동일한 수도소명의 연장이며, 단지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롭게 응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옛 수도원 건물은 오늘날 종교와 영성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fraction)에 불과합니다. 수도자들은 한 손에는 교회의 전통을, 다른 손에는 시대의 진화를 붙잡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의 핵심인 콘베르사시오(conversatio)—즉, 끊임없는 쇄신의 영성—은 여전히 우리를 미래로 이끌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수도자들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쇄신의 최전선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자 역시 누구나 그렇듯, 그 소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전통 안에 내재된 영적 쇄신의 실천들을 기억하고 되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 쇄신의 최전선에 머물기 위해서는 깊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안주하지 않기 위해서는 꾸준한 영적 훈련이 요구됩니다. 변화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려면, 그 내면의 근육을 단련해야 합니다. 쇄신은 단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한 번 실행하고 끝나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쇄신은 지속적인 실천이며, 바로 그것이 살아 있는 전통(living tradition)의 본질입니다.
오늘날의 수도자들은 살아 있는 전통(living tradition)과 제도(institution)를 동시에 물려받았습니다. 이상적으로는 이 둘이 서로를 살찌우며 조화를 이루지만, 때로는 한쪽이 다른 쪽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제도는 살아 있는 전통을 억누를 수 있고, 반대로 살아 있는 전통은 그것을 실천하거나 전수할 수단이 없을 경우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수도자는 전통과 진화를 동시에 부여잡고 살아가는 이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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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마찬가지로, 공동체 이야기를 기고하는 이들도 대개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며 이 시기에 다가오는 문제들을 성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교회 안의 이방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신학들은 이제 더 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고, 오랫동안 ‘영적 고향’이라 여겼던 교회 안에서도 더 이상 우리의 자리를 찾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저작들과 『매일 묵상(Daily Meditations)』의 다른 필자들은,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진실하고 살아 있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려는 전 세계의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이 두렵지만 설레는 여정 속에서, 더 넓고 깊은 신앙의 지평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Sonia R.
References
Katie Gordon, “Tradition in One Hand, Evolution in the Other: The Ongoing Renewal of Christian Monastic Spirituality,” ONEING 13, no. 2, A Living Tradition (2025), 22–23, 24, 26.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sús Boscán, untitled (detail), 2021, photo, Venezuel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영적인 흐름과 변화를 향한 움직임은 마치 우리의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우리를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더 깊이 이끌어 갑니다—끊임없이 흐르고, 확장되며,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배우고 몸으로 살아낼 때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빚어갑니다. 바로 살아 있는 그리스도교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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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교회의 교사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
그러자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드시며, 이 명령이 교사의 직책을 받아 교회에서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각별히 더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밝히셨지요.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단순하고 명백한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뜻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것이 사도의 직무, 곧 교사의 직무로 불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유용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자께서는 이해력 깊고 믿음이 착실한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교의를 가르쳐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 영광을 알아보게 된 신자들 위에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아무 때나가 아니라 적절한 때에 그렇게 할것입 니다. 다시 말해, 각 사람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히 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우리도 마리아를 본받아 하느님의 어머니, 곧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아기 하느님을 낳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우리가 풍성히 낳기만 한다면,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일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슬픔이 자리 잡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어머니”가 되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은 아이를 임신하는 중이고, 분만기에 임박해 있을 따름이다. 신적인 기쁨이 여러분 안에서 태어날 때 비로소 그 아이는 태어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 쪽에서의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아이가 이미 태어났는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바란다. 왜냐하면 “성서가 말한 대로, 은총 가운데 최고의 은총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아들을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490)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1기: 1500~1700년
종교개혁과 가톨릭 개혁
제 3절: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가로의 발전
루터의 경력: 마르틴은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의 소농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한스 루데르가 광부로서 새로운 생계의 기초를 세운 만스펠트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중세 후기 민중 신심의 분위기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 마녀 망상과 마귀 신앙이 다른 거칠고 천한 미신과 더불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시에 그것들은 철저하게 교회와 결부되어 있었다. 교회가 민중 안에서 민중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던 것처럼,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 교회와 더불어 생활하고 있었다.
마르틴의 교육 과정도 완전히 교희생활 속에 피묻혀 있었다. 즉. 초등학교를 만스펠트에서 (1469∼1495), 라틴어 학교를 막데부르크에서(1496∼1497) - 여기서 그는 공주생활 형제회의 회원들과 같이 지내며 그들로부터 “데보시오모데르나”의 정신을 배웠다 - 이어 아이제나흐에서(1498∼1501) – 여기서 특히 브라운 보좌신부와 참으로 사제적인 친구가 되었다 - 라틴어 학교를 다녔다. 1501년에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거기서 1505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철학의 기초 과정을 마쳤다.
에르푸르트는 그의 신학의 방향을 정하는 데 매우 큰 의의가 있었다. 그곳에서 가르치던 철학과 신학에서의 오컴주의적 • 유명론적인 “새로운 방법”은, 젊고 개방적인 인간인 그를 신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인 긴장 영역으로 가져다 놓았다. 그는 신의 의지의 위대함과 절대성 - 그 앞에서 가련한 인간은 무(無) 속으로 침몰한다 - 을 체험하였고 모든 것을 신의 뜻과 판단에서 이해하는 것을 배웠다. 죄와 은총, 선과 악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신에게 달려 있다. 신이 인간을 은총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착해지고, 신이 인간을 노여움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은 악하다. 신은 원하면 죄인도 자비롭게 간주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의화되고, 따라서 “의인”이 된다. 확실히 그는 여전히 죄인으로 남지만 신은 그를 의화된 것으로 간주한다(의인인 동시에 죄인) . 신은 은총을 부여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자유이고, 아니 자의적이다. 인간은 그것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신이 그에게 자비롭기를 바라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무조건의 헌신으로 신에게로 향해야 한다. 성사도, 구원의 시설로서의 교회도 인간을 도울 수 없다. 오직 인간 자신의 주체적인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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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묵상글(강론글)입니다
< 07시 이후 08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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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바쁜 일정으로 정신없이 살 때는 조금 게을러지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영국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의 게으름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그녀가 게으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그들이 항상 ‘이게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만 생각하면서 손익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손익 계산하면서 게을러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게으름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건전한 의욕과 열정을 훔치는 도둑이라고 말하는가 봅니다. 이기적인 욕구에만 관심을 두는 삶인 것입니다.
세상일은 손익계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나 중심의 삶도 절대 아닙니다. 성급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도 함께 사는 데에 지향점을 둔다면 그것이 성실한 것이며, 더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은 충분히 게으름의 악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사랑은 손익계산을 따지는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 행복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서 힘들다고 그래서 남들처럼 살겠다면서 계산적으로 살면 게으른 삶, 결국 그냥 사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제 복음에서 ‘깨어 기다리는 자세’를 말씀하셨다면, 오늘 복음의 부분은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특별히 집사, 다른 종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는 지도자 역할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집사는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루카 12,42) 임무를 따라야 합니다. 단순히 물질적 양식을 넘어, 공동체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내주는 역할입니다. 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 임무를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들처럼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게으른 삶을 살면 그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또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루카 12,45)라면서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창조된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다른 이에게 실천하면서 그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단순히 사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명언: 남들보다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더 중요하다(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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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깨달음에 가까운 사람,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이 되기 위해....^^
청지기(steward)란 주인이 집을 떠난 동안 집안 살림을 맡아 관리하는 종을 의미합니다. 그는 단순한 하인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대신 수행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입니다. 특히 다른 종들의 안녕과 복지를 돌보고, 음식을 공정하게 나누는 일이 그의 중요한 책무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청지기가 다른 종들보다 높은 직책이 아니라 다른 종들을 섬기는 직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청지기는 [종들의 종]인 셈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종들의 종]이라고 부른 사람은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인데, 그는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식량을 마련하여 제공해 주고 사회 약자들을 돌보는 데 힘썼던 교황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비유는 우리 교회 안에서 직무를 맡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특히 사제, 주교,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 등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이끄는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당부가 담겨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권력과 지위를 꿈꾸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2-44).
그러고 나셔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좀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권력은 우리 인간에게 위험한 매력을 뿜어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영향력과 통제력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와 현실은 권력이 남용될 때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부패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느님은 어디에 위치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반문해야 합니다. "누가 하느님을 전능하다고 말하는가?"
사실 하느님을 전능하다고 말하는 존재는 "우리 자신" 아닌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무력함을 택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에,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무력합니다!
권력을 지닌 이들이 자기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예는 우리 인류 역사 안에서 번번히 있어온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힘을 부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이 힘은 다른 이들을 내리 누르는 힘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배려해 주는 사랑의 힘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세속의 힘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맥락에서만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권능은 인간처럼 지배하거나 강압하는 힘이 아니라, 창조하고 돌보며 구원하는 힘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하느님의 이런 힘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정신 구조 때문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보통 힘이 있다고 하면 그 힘을 다른 무엇이나 누군가를 지배하는 힘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힘이란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직,간접적으로 배우면서 성장했습니다. 사회는 성공, 경쟁, 우위를 강조하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끄는 구조를 당연하게 여기게 하기에 , 이런 사고방식이 하느님의 힘, 즉 겸손과 사랑, 자기를 내어주는 힘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세상적 정신 구조에 의해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살아가면서, 우리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데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무엇이 우리 삶을 정말로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시편 90장 12절의 말씀을 우리는 자주 되새기며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날수 셀 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날 수 셀 줄 안다는 것"은 "우리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아는 것"이고, 이 진리를 우리가 참으로 의식하고 인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슬기 혹은 지혜가 은총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길지 않은 인생, 아니, 이 짧은 인생에서 우리가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가꾸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아니, 짧습니다.
이 짧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세상은 성취를 말하지만, 하느님은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경쟁을 말하지만, 하느님은 섬김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성공을 말하지만, 하느님은 실패 안에서도 당신 사랑의 뜻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데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천상병 시인처럼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떠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 하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 살 수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달리 말해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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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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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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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충실하지 못한 종도
처음부터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비록 그는 주인이 맡긴 일을 하지만
그는 그 일을 자기 일로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맡긴 일을 내 삶으로 살 수도 있고
주인을 대신해서 주인의 삶을 대신 살 수도 있습니다.
내 삶으로 살아간다면
맡은 일에서도 계획을 세우면서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삶을 대신 살아가는 것은
억지로 힘을 낼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그 삶이 기쁘지 않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그 일을 하지 않을 생각을 하거나
뒤로 미루게 됩니다.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충실하게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느슨해집니다.
주인이 맡긴 일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인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내 일이라고 생각할까요?
남이 시킨 일, 남이 나에게 맡긴 일을 제외하다보면
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마땅히 없습니다.
남이 맡긴 일이 싫다면 너의 일을 해 보라고 하면
정작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맡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불만만 가득한 삶을 살다보면
결국 내 삶도 잃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맡은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내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와 연결됩니다.
물론 능력이 부족해서 잘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해서 못하는 것과
능동적이지 않아서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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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39-48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주인의식’과 ‘주인행세’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 하는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진정한 주인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함부로 다루지 않습니다. 그것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마침내 그것을 얻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을 똑똑히 기억하기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잘 관리하는 겁니다. 또한 그것을 소유한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이 주는 기쁨과 이익만 골라 취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주인으로써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까지 다 끌어안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속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집사는 ‘주인행세’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맡아 관리하는 재산의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남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특별한 존재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똑같은 ‘종’의 신분임에도, 주인이 그에게 ‘다른 종들에게 제 때 양식을 내어주어야 할’ 중요한 소명을 맡겼기에, 그것을 실행할 뿐이었지요. 그러나 그 집사는 금새 자기 본분을 망각합니다. 자기 손에 쥔 재물을 자기 소유로 착각하고는, 그것을 세속적인 쾌락을 누리는 데에 흥청망청 써버렸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소명을 나몰라라하며,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재물을 권력처럼 휘둘러 동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갑자기 들이닥쳤고, 그는 집사로서의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벌을 받게 되었지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부족하고 약하며 유한합니다. 그런 존재적 한계로 인해 우리는 어떤 것의 참된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 덕분에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다 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뿐이지요.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분의 것이고, 내가 지금 누리는 그 어떤 것도 그분으로부터 받지 않은 게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잘 쓰라고 맡겨주신 것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분 뜻에 맞게 잘 쓰다가 다시 그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받은 것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일은 삶이 끝나고 난 다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게 될 지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회될 때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겠습니다. 내가 주고싶은 만큼이 아니라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만큼, 내가 주고싶은 때가 아니라 형제들이 필요로 하는 그 때에 즉시 나누어야겠습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더 많은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아까워하지 말고 더 많이 베풀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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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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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list.asp?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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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2. 연중 29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김종업로마노
■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뜻대로 하는 것은 뱀(사탄)의 유혹인 도둑이다.
복음(루카12,39-48)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 사람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는 도둑, 곧 하느님의 구원을 빼앗는 뱀의 지혜를, 그리고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한 때에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무슨 수로 준비하나? 하느님의 영, 지혜의 성령께 의탁하는 것이다.
(시편121,4) 4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께서는 졸지도 않으시고 잠들지도 않으신다.
= 나의 주인이시며 영원한 보호자, 하느님의 뜻, 비밀을 통찰하시는 성령 안에 사는 것이다.(요한14,26 1코린2,10)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을 깨닫는 것이다. 말씀 안에 늘 머무르면 된다. (요한8,31-32)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 모든 사람, 세상은 못 알아듣는 말씀 양식이라는 것이다. 선악의 도덕과 윤리의 사람의 말이 아니기에, 하느님 처럼의 자리에 앉은 인본주의는 못 알아듣는다. 하느님의 종, 곧 자신의 모든 것이 허무요, 헛된 것임을 깨달아, 하느님을 의지, 의탁하는 그 자기 버림, 부인이 된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다.
정해진 양식, “씨”다.(창세3,29) 씨는 ‘제라’(후손) 후손- 예수 그리스도(갈라3,16)
(마르4,14) 14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요한6,27)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 ‘씨,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생명, 진리의 양식으로 주는 것이다. 그 양식을 먹어야 존재할 수 있다.(1코린8,6)
(에페3,4-6) 형제 여러분, 4 내가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하여 깨달은 것을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 성령의 이끄심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전하는 것이다.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 하느님의 모든 재산? 깨닫지 못해서, 말씀 안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성령을 통해 모두 깨닫고 믿도록 해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곧 예수님 안에 그리스도를, 옛 계약 안에 새 계약을, 그 새 계약인 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 안에 하느님의 뜻, 힘, 용서, 자유, 안식, 평화, 자비, 의, 지혜, 사랑, 생명, 영광까지 모두 그 하느님의 모든 것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마음에 지키기 위한 것이 신앙생활이다. 곧 자신의 뜻, 의, 영광을 위한 제사와 윤리, 그 옛 계약의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내 뜻, 소원을 빌어야 하는 십자가는 더 이상 없다. (히브5,12-6,3참조)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 그리스도의 종(奴)인 신자들에게, 이웃들에게, 새 계약인 십자가의 구원의 신비가 아닌 죄의 심판인 제사와 윤리, 그 율법의 신앙을 살게 하면, 그래서 그 옛 계약을 열심히 지킨 자기만족, 자기 의에 취하게 하면 자신의 뜻, 소원을 위해 십자가 아래서 열심히 비는 신앙을 살게 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하느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것이다.(요한6,29- 12,44참조) 인간들의 뜻대로 들어주는 기적과 능력의 예수님으로 섬기거나 섬기게 하면, 매를 많이 맞는다. 곧‘ 하느님의 재산, 하느님의 생명을 받지 못해 영원한 죽음에 갇히게 된다’는 말씀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 ‘깨달은 말씀을 흘려주어라’ 하심이다. 물 흐르듯이~~~
그것이 하느님의 모든 재산. 생명을 주는 이웃 사랑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듣고 싶어 하는 복음이다.
(에페3,10-12)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1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12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아멘)
= 십자가에서 하느님께 감사의 영광을 드리는 신앙을 살아야 한다. 다 이루어지지 않은 십자가로, 곧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계속한다면 언제 그분과 한 몸이 되겠는가?
하느님 나라는 내가 없음, 어둠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그 자기 부인, 버림으로, 빛이신 그리스도께 들어가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빛의 나라다. 내 뜻, 소원을 위한, 내 밖에 예수님으로 계시면 하느님의 뜻대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마르3,31-35) 하느님의 뜻, 일을 벗어난, 과녁을 벗어난(하마뜨리아-죄)다.
☨ 하느님의 지혜의 영이시며 진리이신 천주의 성령님!
말씀대로 저희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의탁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나라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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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21. 연중 29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원석님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9&id=2124402&menu=4770
최원석 [wsjesus] 2025-10-22 ㅣNo.185752
요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매번 묵상하고 하느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임마누엘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고 내 안에 갇혀서 살기에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지 않아서 혹은 나를 비우지 못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중에 묻혀 사는 것의 원인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갇혀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것도 경고로 보입니다. 매순간 주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최후의 심판이 오나 어느 때 오나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깨어 있음이 나의 길이기에 그것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나의 소임이고 갈길입니다. 어느 신부님이 그런 말씀하신던데 지금 어느 단계시죠? 영혼의 길이 무슨 단계가 있나요? 항상 주님은 나와 함께 계시는데 .. 심판에서 나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세상안에 눈이 가 있다면 그것이 심판이겠지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세상의 파고가 일지라도 주님의 손은 항상 붙잡고 걸어가고 싶습니다. 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내 인생의 파고 속에서 비록 누추하지만 항상 모시고 살고자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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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85
10월22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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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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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7v1U7K-JSM
[성바오로수도회 조용준 니콜라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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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조금씩 소멸되고 소진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께서는 1888년 1월 31일, 73세의 나이로 선종하셨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제자들의 생계와 교육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돈보스코가 한 평생 지고 갔던 십자가는 참으로 다양했고,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두 살 때 아버지와 사별하는 큰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로 인한 극도의 가난, 성소 여정의 난관들...
뿐만 아닙니다. 사제가 되고 난 후 그가 의욕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한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사업은 큰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시 당국자들뿐만 아니라 교육부 장관, 심지어 주교님과 동료 사제들조차 돈보스코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미친 사람’ 취급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수백 명의 가난한 청소년들이 기숙했던 오라토리오 내일 아침 아이들이 먹을 빵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 처럼 달릴 곳을 다 달린 노인 돈보스코는 만년에 이르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드디어 하느님께서 제게 맡겨주신 과업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가요?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던가요? 그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면 솔직히 제가 그것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보스코가 항상 쉴새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강철체력이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돈보스코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사제 시절부터 주기적으로 각혈했습니다. 서품 2년 차부터 눈병을 앓기 시작해서 결국 나중에 오른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서품 5년 차부터 심한 다리 부종으로 인해 걷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심한 두통과 치통에 시달렸고,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으면 불면증, 만성 소화불량, 가슴 통증을 앓았습니다. 종창과 포진으로 고생했으며, 생애 마지막 15년간 주기적인 발열로 힘겨워했습니다. 한 프랑스 의사의 증언에 따르면 돈보스코의 몸은 ‘수선 불가능한 코트’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보스코는 불평 한 마디 없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처럼 열심히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하루 서너 시간씩 빠짐없이 고백성사를 집전했으며, 수시로 장거리 사목 방문을 다녔습니다. 매일 밤늦도록 교회와 수도회를 위한 집필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신의 병세에 대해 의사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년에 도달한 돈보스코에게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집니다. 절친이셨던 비오 9세 교황님의 당부로 그는 로마 떼르미니 역 옆에 예수 성심 대성당을 건축하게 됩니다. 경제가 바닥이던 시절, 기금 마련이라든지 공사 진척을 위한 장거리 여행 등으로 그의 수명이 단축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돈보스코는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에너지, 삶 전체를 주님과 교회와 수도회를 위해 쏟아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신신당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목자로서의 깨어있음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답은 너무나 쉬운 것 같습니다.
돈보스코처럼 몸사리지 않고 양들 사이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들 한가운데 현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 목숨을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내가 조금씩 소멸되고 소진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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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은 잘하는 걸 원하실까, 끝까지 하는 걸 원하실까?>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종, 특별히 사제들이 깨어있어야 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제들이 깨어있는 방식은 이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사제에게 부제가 필요한 이유는 사제가 ‘기도와 말씀 봉사’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4) 그러니 사제가 신자들에게 주어야 하는 양식은 ‘말씀’입니다. 말씀 안에 성체도 포함되지만, 특별히 강론준비나 교리나 성경과 같은 가르침일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질은 떨어지더라도 제때에 말씀을 전하는 게 더 좋을까요? 오늘 말씀대로라면 질적인 것보다 ‘때’가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질 좋은 강론은 준비하다 때를 놓쳐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때마다 강론을 준비하다 보면 저절로 질도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제때에 꾸준히 양식을 내어주지 못하게 만드는 최고의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있는 ‘완벽주의’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완벽하지 못하다는 데서 우울감이 오고 그래서 또 우울하게 만들어 일을 지속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가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내가 완벽하다는 생각을 버리면 됩니다.
영화 ‘비버’(2011)는 심각한 우울증 환자 월터 블랙과 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내용 전체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그냥 한 가정의 아버지가 자살 직전에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내용입니다. 월터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사도 망해가고, 가족 관계도 파탄이 납니다. 자살도 실패할 정도입니다. 되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일이 잘 풀립니다. 가족과의 관계도 다시 회복되고 아이디어가 보이기 시작해 회사도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도대체 영화에서는 월터가 어떻게 우울증을 극복해나가게 되었다고 표현했을까요?
바로 자기 손에 끼어 있던 비버 인형과 대화하면서부터입니다. 그러며 자신을 비버로 여깁니다. 사람들에게도 자신은 비버라고 합니다. 이것은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처방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니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줍니다. 사람들은 월터와 이야기하지 않고 월터의 비버와 이야기합니다.
자신을 비버처럼 여기는 것은 분명 자기비하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은 오래 못 갑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우울증은 자신이 자기를 평가하는 기대치보다 못 미치는 자기 자신을 보는 것에서 옵니다. 따라서 자기를 비버로 여기는 것은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비버가 하는 모든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결과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비버는 기껏해야 나무때기로 작은 댐을 만들면 그것으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비버라고 여기면 자기비하입니다. 결국, 월터는 비버 때문에 자기 팔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는 우리 자신이 정말 비버보다 더 나약한 존재로 보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작아 보이고 그러면 그냥 작은 일을 해도 스스로 만족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겁니다.
로라 윌킨스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다이빙 10m에서 미국인으로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다이빙은 중국 선수들에게 밀려 단 한 번도 미국이 금메달을 따보지 못한 종목입니다. 윌킨스는 올림픽을 준비하던 중 오른쪽 다리 골절상을 당합니다. 7주간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때 미국 팀의 코치와 주치의는 그녀에게 올림픽 출전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얼마큼 큰 부상이었는지 정확히 알 방법은 없지만, 3년간의 준비 과정을 수포로 돌릴 만큼 심각한 부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초기 성적은 메달 밖이었습니다. 5차에 걸친 다이빙을 하는데 3차까지 5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4차에 완벽한 다이빙을 하여 바로 1위로 올라섰고 더 완벽한 다이빙으로 5차에서는 금메달을 확정 짓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기적을 이루어냈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감격으로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모든 것을 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그분 앞에서는 그냥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면 포기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보다 크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부모님이 많이 배우시지는 못하셨지만, 자존감이 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저희에게 맨밥을 주시면서도 미안해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반찬이 없어 맨밥에 물 말아먹은 적이 있습니다. 둥둥 떠 있는 쌀벌레들을 제거하고 맨밥을 먹자니 헛구역질이 났습니다. 물론 밥을 먹다가 중간에 소위 총각김치를 찾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저희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줄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님도 그렇게 주는 것에 실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굶기지 않은 것에 만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양식을 거르지 않고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굶기지 않으신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오늘 복음에 완벽히 준비된 양식을 주라는 말은 없습니다. 제때에 주면 됩니다. 그렇게 못하게 되는 이유는 내 자존심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면 그대로 때를 거르지 않고 양식을 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완벽함을 도모하다가 시작도 못 합니다. 완벽주의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매일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건 그렇게 하는게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더 나은 양식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과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실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언가 할 수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님 축복이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데 실망스럽고 우울하고 멈추고 싶다면 생각하십시오. 그건 교만함 때문이란 것을. 예수님은 제때에 양식을 주라고 하셨지 그 질적인 면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음을 명심하고 제때에 양식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 죽이든 밥이든 깨어있음에 만족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가집시다.
모든 걸 끝까지 가지 못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완벽주의는 주님 앞에 머물 줄 아는 사람들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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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 반 모임에서 ‘휴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10월 13일에 출발해서 11월 7일에 돌아온다고 하니, 한 형제님이 그날 딸이 한국으로 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딸은 태권도 선수로 한국의 전국 체전에 참가한다고 했습니다. 가는 길이 같아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자매님은 11월 7일에 어머니가 달라스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좌석을 확인해 보니 제 자리와 가까웠습니다. 따님이 이야기하기를 “손에 묵주 들고 기도하는 분이 저희 어머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저는 사제복을 입고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4시간 넘는 긴 여정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는 길과 오는 길에 동행할 수 있는 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은총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장거리 비행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강론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정리하다 보면, 같은 시간이지만 무료한 시간이 아니라 은혜로운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시간을 쓰느냐에 따라 지루한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은총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제에 이어 다시 한번 “깨어 준비하는 종”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 깨어 있음은 단순히 일을 미리 하는 것, 효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원 버스를 피하려고 일찍 걷는 것도, 학교나 직장에서 과제를 남보다 빨리 끝내는 것도 세상에서는 칭찬받을 수 있지만, 주님이 말씀하시는 ‘깨어 있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성과와 능률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바라보는 삶입니다. 도시 빈민 사목을 오래 해 온 제 친구 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큰 성과를 내는 사목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이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추운 겨울 광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뜨거운 여름에도 복직을 호소하는 이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눈빛은 여전히 맑고, 가슴은 뜨겁습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깨어 있는 종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문득 한용운 시인의 시 〈복종〉이 떠올랐습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의 주어를 ‘하느님’으로 바꾸어 읽어보면 신앙인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는 자유를 아는 사람들이지만, 그 자유를 하느님께 기꺼이 내어드릴 때 참된 자유가 됩니다. 억지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드리는 복종이기에, 그것은 더 달콤한 자유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순간에도 담대할 수 있었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들에게 천상의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저의 부모님 역시 늘 감사하며, 기도하며, 기쁘게 사셨습니다. 신앙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께서 지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처럼 깨어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를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각 시대와 문화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했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분을 드러내야 합니다.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곧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나, 내일은 너). 우리가 언제 주님 품에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과보다 의미를, 능률보다 가치를 바라보는 사람, 그래서 주님 앞에 언제든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깨어 있는 종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등불을 밝히며 예수님을 맞이하는 종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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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이찬우 다두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은 편한 대로 살다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회개하고 제대로 살면 되잖아!’ ‘어차피 죽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안 오실 거니까, 지금은 그냥 살다가 죽기 직전에 성당에 가서 성사 보면 되잖아!’ 이런 생각은 우리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쓸 때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제멋대로 살면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회개하고 죽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도 알 수 없지만, 우리 삶의 마지막 또한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불충실한 종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옛날에 성인들은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잘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자신도 부활하게 해 주심에 감사드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하루, 그리고 우리가 지금 눈 뜨고 생활하는 이 하루는 어제 밤사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하루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맙게 여겨집니까? 오늘 하루가 새롭게 주어짐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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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9-48: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오늘 복음은 우리가 모두 주님 앞에서 ‘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다양한 은총과 임무를 맡기셨고, 그 임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가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이라고 하신다. 이는 단순한 성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과 기다림의 태도에 달려 있다. 종의 본분은 맡겨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며, 주인이 돌아올 때 부끄러움이 없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 곧 영적 양식을 나누는 사제들과 봉사자들은 “때에 맞추어 동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루카 12,42 참조) 그러나 만일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게으름과 욕심에 사로잡혀 자기 이익만 챙기고 형제들을 억압한다면, “많이 맞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가 주어진다(47절). 반대로, 맡겨진 것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더 큰 책임과 영광을 맡게 될 것이다(44절).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맡겨진 양 떼를 돌보도록 명령받은 자들이다. 만일 그들이 양들을 잘 이끌지 못한다면, 양들의 멸망보다도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Homilia in Matthaeum, 77) 또한 성 아우구스티노는 목자의 직무를 이렇게 설명한다: “목자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양들을 위해 존재한다. 만일 그가 양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 배만 채운다면, 그는 목자가 아니라 삯꾼에 불과하다.”(Sermo 46, On Pastors) 교리서 또한 지도자의 책무를 분명히 한다. “누구에게 많이 주셨으면, 그에게서 많이 요구하실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봉사자들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맡기신 것을 다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2041항 참조)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 맡겨진 소임이 있다. 부모는 자녀를 신앙 안에서 양육하는 책임을, 교사와 지도자는 진리를 가르칠 책임을, 신자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섬길 책임을 지닌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총과 달란트를 따라 마지막 날에 물으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이 지금 오신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신앙은 먼 훗날의 결산이 아니라, 오늘의 충실한 봉사와 책임에서 드러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와 동시에 희망을 준다. 주님은 우리의 성실함을 잊지 않으시며, 충성된 종에게는 더 큰 하늘의 보화를 맡기실 것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뜻을 알고도 외면하는 게으른 종이 아니라, 매일 깨어 준비하는 충실한 종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이 말씀이 우리 삶의 결론이 되기를 청하도록 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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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만큼>
루카 12,39-48 (깨어 있어라,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만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믿으시는
만큼
주시니
믿는
만큼
드립니다
희망하시는
만큼
주시니
희망하는
만큼
드립니다
사랑하시는
만큼
주시니
사랑하는
만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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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 날이 언제인지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것도 은총입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2ㄴ-48)
1)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뜻으로는 “도둑이 몇 시에 올지는 몰라도 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종말과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은 반드시 온다.”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는, “너희는 ‘지금’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 마음대로 종말과 재림의 날을 계산하지 마라. 그 날은 인간이 미리 계산할 수 없다.”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예고 없이 갑자기’ 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말씀 자체가 종말과 재림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고, 사람들이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1-6.9-10)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태평스럽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즉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신앙생활도 하지 않고, 세속 생활에만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종말은 갑자기 닥치는 재난이 될 것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종말은 갑작스러운 재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그 날은 모든 희망이 이루어지는 기쁜 날이 될 것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에, 종말과 재림의 날을 미리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것도 사람들의 구원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일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회개는 평소에, 진심으로, 또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와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심판의 날이 언제인지 알아서 억지로 하게 되면 거짓 신앙생활과 거짓 회개가 됩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그 날이 언제인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으면서 대비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합니다. 만일에 그 날을 미리 알려 주면, 잘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할 것입니다. 또 그 날이 다가올수록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회개는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4)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라는 말씀은, 성직자라면 성직자답게 살아야 하고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표현만 보면, 하느님을 ‘채권자’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빚이 아니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분이고,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면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그리고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신앙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보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무슨 대단한 업적이나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더라도, 당신이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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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몽땅 차지했으니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아는 만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집행과 복음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그에 맡겨진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권리이기보다는 책임입니다. 저는 한 기관의 책임자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철저히 ‘을’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카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2,40)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혹 많이 받고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를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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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준비’와 ‘깨어 있음’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를 이어 가려고 마태오 복음서 저자는 ‘도둑’의 비유와 함께 ‘집사’의 비유를 소개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오실 분은 주인이었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 대상이 바뀝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상하지 못한 때 도둑이 들어오듯이, 사람의 아들도 이처럼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진술에서 미래의 사건을 예상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함이 강조됩니다. 이는 제자들이 깨어 준비하면서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이어 가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이 예시되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비유적으로 제시됩니다. 주인이 집사에게 맡긴 임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인의 가정을 돌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주인은 집사에게 자신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리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만일 집사가, 주인이 늦게 온다는 사실을 알고 방만한 생활을 한다면, 그는 주인에게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비유, 곧 집사의 비유에서 집사의 불충실한 모습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사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경고는 자칫 나태하고 방만한 생활에 빠져 있을 수 있는 우리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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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은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주님의 집, 곧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이라는 말 그대로 성전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일은 기쁨이었습니다.(시편 122[121],1 참조)
성전에 도착한 사람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돌보아 주심에 감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에 또한 감사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감사함을 표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일상 속 구원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신앙을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이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편의 저자는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라고 고백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전이 있습니다. 그 성전에는 하느님 사랑의 절정을 품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예수님의 몸, 바로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전도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코린토 1서 3장 16절)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우리는,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기에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의로움의 도구”답게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님께서 오시더라도 “행복하여라.” 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맡기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성전을 향하는 마음과 발걸음이 무겁고 또 성전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기가 참으로 버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우리의 성전은 ‘기쁨의 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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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누구의 종인지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복음 12장 42절)
집사는 압니다. 주인이 왜 자기를 다른 종들에게 봉사하는 자리로 불렀는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이미 주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충실하고 슬기롭게 제 역할을 수행하면서 맡겨진 종들에게도 유익을 주겠지만, 거기에 더해 차츰 주인을 닮아갈 겁니다. 그것이 그에게 허락된 가장 큰 선물일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로마서 6장 17절-18절)
복음에서 보듯, 집사는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인의 뜻을 토대로 자기가 무얼 해야 하는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이었을 때는 재물과 육의 질서에 묶여 살아갔고, 율법의 문자에 매달려 사고하고 행동했습니다. 단죄와 심판이 앞섰고 쾌락과 욕정에 타인을 희생시키며 자신을 드높였지요.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서 6장 14절) 반면 은총 아래 있는 의로움의 종은 다릅니다. 복음 속 주인의 바람처럼 그는 맡겨 주신 다른 종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며 충실하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합니다. 그 일이 바로 주인의 일이기 때문이고, 주인이 그걸 바라시니 순종할 따름입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복음 12장 48절)
율법과 전통의 그늘 아래서 태어나 숨 쉬고 교육받으며 살아온 구약의 백성 중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을 믿고 그분의 제자가 된 이들은 말하자면 더 많이 받고 더 많이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문자를 넘어서 의미로, 형식을 넘어서 정신으로 모험을 시작한 이들이지요.
그들은 새로운 생명의 주인이 하셨듯 단죄가 아닌 포용으로, 심판이 아닌 용서로 맡겨진 이들에게 헌신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먹이고 키우고 돌보는 주인의 자비와 사랑을 따라하다가 닮아가고 닮아가다가 끝내 하나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의로우신 주인 마음에 순종하여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주인께서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느닷없이 오시더라도 사랑의 상태에 머물러 사랑을 살고 있다면 그 해후의 순간이 얼마나 행복할런지요! 은총 아래서 의로움의 종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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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바쁜 일정으로 정신없이 살 때는 조금 게을러지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영국 작가 도로시 세이어스의 게으름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습니다. 그녀가 게으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그들이 항상 ‘이게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만 생각하면서 손익을 따진다는 것입니다. 손익 계산하면서 게을러진다고 말합니다. 결국 게으름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입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은 건전한 의욕과 열정을 훔치는 도둑이라고 말하는가 봅니다. 이기적인 욕구에만 관심을 두는 삶인 것입니다.
세상일은 손익계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나 중심의 삶도 절대 아닙니다. 성급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도 함께 사는 데에 지향점을 둔다면 그것이 성실한 것이며, 더 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은 충분히 게으름의 악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사랑은 손익계산을 따지는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 행복을 갖게 됩니다. 이 세상 안에서 힘들다고 그래서 남들처럼 살겠다면서 계산적으로 살면 게으른 삶, 결국 그냥 사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제 복음에서 ‘깨어 기다리는 자세’를 말씀하셨다면, 오늘 복음의 부분은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특별히 집사, 다른 종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는 지도자 역할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집사는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루카 12,42) 임무를 따라야 합니다. 단순히 물질적 양식을 넘어, 공동체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내주는 역할입니다. 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행복하여라.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4)라고 말씀하십니다.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는 임무를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들처럼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게으른 삶을 살면 그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또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루카 12,45)라면서 안일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창조된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특히 사랑을 다른 이에게 실천하면서 그들을 돌보는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단순히 사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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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악용하지 말아야 할 것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우리는 어제에 이어 오늘도 행복한 종의 비유를 복음에서 듣습니다. 그런데 어제는 주인을 깨어 기다리는 종의 행복 얘기를 들었다면 오늘은 주인이 없을 때도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는 종의 행복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니까 마르타와 마리아, 일과 사랑, Doing과 Being에서 어제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문 마리아의 행복 얘기라면 오늘은 주님 사랑 까닭에 주님 일을 충실히 하는 마르타의 행복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종의 비유 얘기에서는 종의 불행 얘기도 합니다. 주님의 일을 충실히 하는 지혜로운 종은 행복하지만 그렇지 않은 어리석은 종은 불행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불상사가 일어났습니까?
그것은 집사가 아닌 단순한 종이었으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어제의 종은 주인과 종 사이에 아무도 없고 아무 일도 없어서 그저 주인님만을 위해서 잘 깨어 기다리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종은 단순한 종이 아니라 집사 신분의 종이고, 주인님과 자기 사이에 다른 종들이 있으며 맡겨진 일이 있습니다.
주인님께는 자기도 종이지만 종들에게는 지배인(manager)입니다. 그런데 주인님의 종이기에 맡겨진 일을 정해진 대로 하면 되는데 차츰 지배인이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종들을 지배하고 억압합니다.
주인님의 집사(Steward)요 지배인이 주인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대신 사랑을 베풀라고 자녀를 맡겼는데 집사에 불과한 아비 어미가 자녀를 학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대신 사랑을 행하라고 형제들을 맡겼는데 집사에 불과한 본당 신부와 수도회 장상들이 제 맘대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집사라는 지위를 선용하지 않고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집사직의 나를 돌아보고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악용하지 말고 선용해야 할 것은 집사라는 지위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은총 지위도 악용하지 말아야 하고 선용해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어제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하느님 은총은 풍부할 것이라고 은총을 악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동시에 선용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한 죄인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풍부하지만 은총을 악용하는 죄인에게도 은총이 풍부하지는 않습니다.
얼마간 참아주시기는 해도 마냥 참아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노자 도덕경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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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가자!>
오늘 복음(루카12,39-48)은 어제에 이어지는 복음으로 '깨어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어제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 뜻에 기쁘게 순종하는 것, 그래서 날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것이 깨어 있음의 의미라고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묵상'입니다. 곧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가는 것'이 '깨어 있음의 또 하나의 의미'라고 묵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고, 또 영원히 살게 되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하고도 극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 사랑에 이르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꼭 필요합니다.
어제 '솔로몬의 기도'(1열왕 8,22-53)를 필사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난 후 제단 앞에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바친 기도입니다. 솔로몬은 먼저 '주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고, 이어서 죄지은 사람들이 이 성전을 찾아와 잘못을 뉘우치면서 자비를 청하면 용서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죄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1열왕8,46)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하느님의 자비로 돌아갑시다! 매순간마다 자주 자비 기도를 바칩시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린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 때문'입니다.
오늘 10시 미사 마치고, 돌아가신 본당 신자 부친(안진태 요셉) 조문을 다녀오기 위해서 신자들과 함께 강화장례식장으로 먼 여행길을 떠납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안진태요셉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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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루카 12, 48)
많이 주신
단풍잎을
받아들이는
계곡물과
계곡물을
안고 흐르는
단풍잎의
내려앉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많이 주신다’는
것은 곧,
‘많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더 깊은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책임은 은총의
다른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책임을 낳습니다.
사랑받는 만큼
봉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이미 구원의
현장입니다.
책임은 존재의
진실함으로
드러나고
공동체의
건강함을 지키는
힘으로 드러납니다.
받은 은총만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받은 은총을
잊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요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많이 받았다는 것은
더 많이 사랑할
이유를 선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많이 요구하심은
사랑의 부담이
아니라,
신뢰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신뢰를 안고
오늘 하루도
은총 속에
살아가십시오.
사랑의 요구는
은총 속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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