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냥 여행을 갈 작정이었다. 제주 겨울 바람을 맞으며 가파도에서 용궁 정식이나 먹으면서 한 일주일 뒹굴거리다
오자는 생각으로 계획을 잡았다. 그러다 알게 된 강정 평화 학교 일정을 보고 덜컥 신청을 했다. 낯을 가려 아는 사람 없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걸 불편해 하면서 왜 그랬는 지는 잘 모르겠다.
첫째날 : 비오고 바람 불고 춥다.
휴관일이라 4.3 공원 바깥만 둘러 봤다.
끝도 없는 희생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나이...뭔가를 알기에 너무 어린 아이들과 가족인 듯 이어진 이름들
쌀쌀한 바람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을 베어 먹먹한 가슴에 할말을 잃게 하고 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던 알뜨르 비행장은 제주의 해군기지가 한반도 안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미일 군사 공조속에서 중국을 겨냥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로는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둘째날 : 비오다 갬
빗속에서 백배는 비장한 느낌이었다.
첫번째 강의 - 해군 기지 투쟁 역사
삶을 대하는 자세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역경이 오면 정면으로 맞서거나 회피하거나
직접 겪으며 체득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고한 기억과 명쾌함으로 해군 기지 투쟁 역사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하지만 다른 마을에서 해군 기지 반대 운동을 할 때 무관심해서 강정이 지금 천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울컥했다.
왜 착한 사람들만 죄책감을 갖고 착한 사람들만 반성을 하는 것일 까?
천벌을 받을 사람들은 따로 있는 데...
두번째 강의 - 평화를 위한 주민의 투쟁
그녀가 기억났다. 마을 회관에 도착해서 숙소로 올라가려고 할 때 크고 쾌활한 목소리로 강정에 왜 왔냐고 여기 오면 다 OO이
취급받는 다고 이야기했던 그녀다. 반가움과 조심스런 걱정이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 목소리다.
밝은 데서 찬찬히 보니 환한 미소가 아름답다. 당찬 이야기가 멋지다.
그녀 역시 부딪히며 느끼고 배워 단단하다.
"난 성격이 그런 거 못참아."라고 반대 투쟁을 시작한 이유를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지만
단순히 성격때문에(? !) 시작한 것 치고는 그녀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은 것 같다.
생각하는 대로,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모양이 갖춰 지는 사람, 그녀가 말했다.
"강정은 태풍의 길목이야. 설령 우리가 져서 해군기지가 건설된다고 해도 자연이, 바다가 그냥 두지 않을 꺼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렇게 될 것이다.
세번째 강의 - 강정 마을 둘러보기
강정 마을 둘러 보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시간이 많이 없다고 하셔서 살짝 귀찮아 하시는 게 아닌 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마을을 둘러 보는 내내 조금이라도 더 보여 주려고 애쓰시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강정을 사랑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는 지
그래서 이렇게 상처입은 강정에 얼마나 아파하는 지 그 마음이 느껴졌다.
지난 해 제주 여행을 왔을 때 묵었던 표선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제주에 지하수가 말라 간다고 했다.
이곳 저곳에서 너무 뽑아써서 그렇다는 데 이렇게 물이 맑고 좋은 강정을 제주 전체를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옳은 일일 텐데 참 갑갑한 노릇이다.
둘러 보고 난 강정은 그 전과 다르다. 살갑다. 이젠 그냥 강.정. 마.을.이 아니다.
냇길이소도 있고 냇길이소를 따라 내려온 물이 빚어낸 작은 연못도 있고 꿩망골(?)도 있는, 내가 아는 마을이다.
셋째날 : 화창한 날씨 심지어 바람도 잔잔했다. 그러나 바다는 달랐다.
첫번째 강의 -해상 평화 활동
평화 활동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있는 지 "비무장 평화의 섬"이 어떤 의미인 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비무장 평화의 섬이란 의미에 병역의 의무까지 없애는 것이라는 설명에 약간 혼란이 생겼다.
자고로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를 갔다 와야 어른이 된다는 감언이설로 현혹하고 실제로 법으로 "의무"지어졌으나
돈있고 힘있는 놈들은 모두 빠져나가는 이 X같은 현실에서 타지역과 형평성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 나역시 관제교육의 폐해에서 허덕이고 있구나 했다.
실제로 전쟁의 도구가 되어 사람을 죽이는 교육을 받으며 살아 팔팔한 청춘의 한때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 보다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인류와 자연 보존, 평화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대체 복무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여러모로 더 나은 일임이 분명해 보인다.
비무장 평화의 섬으로 천명한 올란드라는 실제 사례가 있다는 말에 인터넷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 보려 했으나 별로 없어서
인터넷이 아닌 다른 경로로 좀더 알아 볼 작정이다.
이 강의 중 마음에 남는 인도네시아 라말레라 부족 이야기
이 부족민들은 사냥하는 고래를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과 자녀들을 위해 조상들이 와 준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또한 그들도 죽으면 고래가 된다고 믿는다고.
두번째 강의 - 수상 안전 교육
강정 앞바다 이야기만 해도 하루가 모자랄 것 같았다. 구럼비 바위 위로 샘솟는 용천수에 의지해 피는 수꽃옆을
붉은 발 말똥게가 지나가고 멀리서 남방 돌고래가 헤엄치던 시절의 강정 앞바다 이야기는 반짝바짝 빛나서 더 슬펐다.
그때는 구럼비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방향을 잃은 붉은 발 말똥게가 육지로 기어 오르다 아스팔트 위에서 차에
치여 죽고 장벽에 울음이 막힌 남방돌고래가 더 멀러 더 멀리 헤엄쳐 가버리고 있단다.
나는 온전한 구럼비를 본 적이 없다. 붉은 발 말똥게도 남방 돌고래도 몰랐다.
이러한 나의 무관심이 구럼비를, 아름다운 이 아이들을 멀리 보내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