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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왕
요 19:17-27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17-27 / [십자가에 달리시다;마27:32-44,막15:21-32,눅23:26-43]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 넘겨졌다. 그들은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워 성밖으로 나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 불리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골고다란 `해골산'이라는 뜻이다. 18)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를 중간에 두고 양편에 다른 죄수 두 명도 함께 십자가에 달아 세워 놓았다. 19)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쓴 표지판을 붙였다. 20)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은 예루살렘 성내에서 가까운데다 그 표지판은 히브리 말, 라틴 말, 헬라 말로 써놓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읽었다. 21)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것을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고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그러나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을 뿐이오. 바꿔 쓸 수 없소' 하고 대답하였다. 23-24)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군인들은 예수의 겉옷을 네 몫으로 나누어 한몫씩 차지한 후 속옷은 이음매가 없는 것이므로 `속옷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지 제비를 뽑자' 고 말하였다. 이렇게 해서 ㄱ) `그들은 내 옷자락 나누어 갖고 또 더 나누어 가지려고 제비 뽑았다' 라고 한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그들이 한 짓이었다. (ㄱ. 시22:18) 25) [예수와 그 어머니] 예수의 십자가 가까이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다. 26) 예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 곁에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시자 어머니에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리고 그 제자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예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
빌라도에 의해 유대인들에게 내어줌을 당한 예수께서는 골고다에 올라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당시 중동에 통용되는 모든 언어로 유대인의 왕이라 쓰여 집니다. 빌라도에 의해 쓰여졌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우리의 왕이심을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붙여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17-22) 유대인의 분노와 압박은 빌라도로 하여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게 만듭니다. 정치적으로도 예수를 살려주었다가는 왕으로 추종받는 자를 살려주는 격이 되어 로마로부터 큰 궁지에 몰릴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를 조롱이나 하듯이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씁니다. 로마에 대한 반란을 제압했다는 정치적 노림수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패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히브리어와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빌라도의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로마 제국의 언어인 로마어로, 당시 문명사회의 언어인 헬라어로 기록함으로 예수께서 온 세상의 왕이심을 모두가 알도록 선포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시며 진정한 왕이심이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3-27) 당시에 옷감은 비싼 물건에 해당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례에 따라 형을 집행한 병사들은 사형수의 옷을 나누어 갖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일상과는 달리 나누지 않고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갖도록 합니다. 마치 놀이를 즐기듯 행하는 일이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성경의 말씀을 이루는 일에 사용됩니다(시 22:18). 이를 통해 십자가 사건이 예수의 패배요 악의 승리처럼 보여지지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승리임을 선언합니다. 한편, 이렇게 십자가 밑에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는 로마 군병들과는 달리 예수의 죽음을 끝까지 지키고 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마저 두려워 도망친 상황에서 끝까지 예수를 향한 사랑과 비통한 슬픔을 나눈 사람들입니다.
적용: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가 나의 왕,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까? 이 사실이 고백됩니까? 패배 같지만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승리의 인생임을 믿으십니까?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이끄시는 주님을 신뢰합시다.
동물원 원장이 각 동물들의 특성과 수명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난 후 질문 시간이 되었을 때 어느 학생이 질문 했습니다. “동물 중 어느 것이 빨리 죽나요?” 그러자 동물원 원장은 “호전적이고 성질이 급한 놈, 덩치가 큰 동물들이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동물들은 오래 삽니다. 또 곤충 가운데서도 투구벌레처럼 등딱지가 딱딱한 놈들이 빨리 죽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원수들이 욕하고, 비웃고, 저주했지만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온유한 순종은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겼으며, 그 승리를 통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최후 승리자가 되게 하십니다.
< 설 교 >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 19:16-30 / 최창훈 목사
이 세상에는 십자가 형틀만큼 무서운 고문은 없습니다.
로마의 시세로(Cicero)는 말하기를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은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다 이루었다 하시고"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조명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도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왜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까?
18절을 보면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 값이 크다 해도 어떻게 이런 끔찍한 죽음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을까요?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는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3: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저주를 받았다" 말을 주목 하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 이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구약에 저주받은 자의 죽음에 대한 한 가지 원칙이 나와 있는데
신21:23절을 보면 "그것은 나무에 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읽을 때면 늘 대제사장들과 빌라도를 특별히 주목해 봅니다.
그 당시에 대제사장들이나 빌라도가 최소한의 공정함을 고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그와 같이 혹독하고 소름끼치는 십자가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생명은 공정성과 합법성에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한사람의 생명을 끊어놓는 사형을 선도하는 재판이라고 한다면 다 른 어떤 재판보다 공정하고 합법적이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일만한 분명한 죄목이 있어야 하고 그 죄가 확실하게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받았던 재판에는 이와같은 상식적인 요건들이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대제사장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분명한 죄목이 있고 분명한 증거가 있어 예수님을 재판대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생 사람을 끌어다 놓고 그에게 무슨 죄목을 씌워 죽일 것이냐를 궁리하느라 밤새도록 법석을 떠는 그런 재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나온 죄목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예수님의 죄목은 "행악자"라는 것이었습니다(요18:30).
"행악자" (行惡者)란 어쩌다가 한두 번 실수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고질적으로 악을 행하는 흉악범을 가리킵니다.
이 말만큼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어디 있습니까?
대제사장들이 한치의 상식이라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었다면 예수님에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죄목을 걸어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또 어떻습니까?
그가 법정을 네 번이나 들락거리면서 "나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 여러 번 반복하여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떠들면서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했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 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아무 죄도 찾지 못했노라고 말하던 바로 그 입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을 선고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들에게서 예수님을 몰랐던 당시의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교양이 있는 것처럼 꾸미고, 사람들에게 양심적인 것처럼 행동하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역시 악의 화신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면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죽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2. 저주스러운 무관심입니다.
십자가형이 확정되자 네 명이 한 조를 이룬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인계 받았습니다.
이 네 명의 군인들은 예수님을 골고다까지 호송하고 거기서 십자가 형틀에 예수를 못 박아 사형을 집행하는 책임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팁이 있다면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처형되는 사람의 옷을 벗겨 가지고 나누어 가진다는 것이 정말 웃음거리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여 전적으로 수공업에 의존해서 옷을 만들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옷은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벌을 가지면 평생을 살아야 할만큼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만큼 더 소중 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고대사의 전쟁 기록을 보면 양편이 서로 싸우면 이긴 쪽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전사한 사람의 옷을 전부 벗기는 것입니다.
피가 묻었든지 창으로 구멍이 났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옷이란 옷은 모조리 벗겨 가지고 전리품으로 들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남성 들의 정장은 보통 다섯가지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머리에 쓰는 터번과 신발, 속 옷 한 벌, 외투 한 벌, 허리띠가 그것입니다.
네 사람의 군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외투같은 중요한 옷은 계급이 제일 높은 사람이 차지했을 것입니다.
신발 같은 것은 계급이 제일 낮은 사람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가 한 가지씩 나누고 보니 속옷 하나가 남았습니다.
물론 속옷이 라고 해서 요즈음의 속내의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당시의 속옷은 무릎까지 혹은 발꿈치까지 오는 통으로 짠 옷입니다.
통으로 짠 옷이기 때문에 네 조각으로 나누게 되면 걸레로도 쓸 수 없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중 한 사람이 "이것은 나누지 말고 제비를 뽑아 누군가 한 사람이 갖기로 하자."고 제의하자 그 제의를 좋게 여기고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찢어진 손발에서 핏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십자가의 기둥에는 핏물이 흘러내리는 바로 그 발치에서 로마 군인 넷이 예수님의 옷을 놓고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다" 하면서 옷을 나누고, 심지어 마지막으로 남은 속옷 까지도 누가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제비를 뽑고 있었던 광경을 말입니다.
물론 다윗이 시22:18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될 때 십자가 아래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한 바 있긴 하지만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이 누구인지, 또 그분이 왜 죽으셔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주스러운 무관심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오직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물욕이요,
다른 사람보다 하나라도 더 얻는 것이요,
다른 사람보다 한발이라도 더 앞서는 것입니다.
내가 더 잘 사는 것, 이것 말고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로마 군인들에게서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던 때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추호도 긍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그때 우리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남보다 하나라도 더 소유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소망이 없을 만큼 악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고결한 피를 흘리며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3.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여러 시간을 고통하시다가 드디어 한마디 자기의 고통을 외쳤습니다.
아니 외쳤다기보다는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신음처럼 한 마디 내뱉으셨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시69:21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이 한 마디로 요약하여 "저희가 쓸개로 나의 식물을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손바닥이 아프다거나, 쥐가 난다거나, 숨이 가쁘다거나, 열이 난다는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모든 고통을 "내가 목마르다"라는 한 마디에 집약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흔히들 목이 탈 때의 고통을 일컬어 "죽음의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한번도 그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아서 목이 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고통을 시22:15절에서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귀한 광야에서 이 갈증의 고통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의 위기사태가 그들에게 엄습했는가를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하나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불기둥이 밤낮없이 그들의 눈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그들 중에 있습니다.
막대기를 가지고 어떤 이적 기사라도 행할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들의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어 목이 타 들어가고 혀가 입천장에 들어 붙을 때가 되자 하나님의 기적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불기둥도 소용이 없고, 과거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적 기사를 행했던 사건도, 그들을 진정 시킬 만한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나라의 기초를 뒤흔들고 모세의 리더십을 완전히 뒤집어엎을 만큼 그들은 엉뚱한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이 마르는 고통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바로 이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은 세상을 살면서 온갖 고통을 당하는 우리들과 같이 되시려고 친히 그 고통을 맛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지옥에서 영원토록 당해야 될 고통을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고통이 올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 찾아가 어린애처럼 "주여, 나의 고통 아시지요? 주님이 맛 보셨으니까 내 고통 아시지요? 도와주세요."하고 기도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몸소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고통을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4. 예수님의 당하신 십자가 고난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지 약 6시간이 지나갈 무렵 예수님은 또 한번 짧은 한 마디를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태나 마가는 "크게 소리 지르시고 운명하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소리지른 내용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크게 소리지른 내용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요한이 그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겁이 나서 멀찌기 군중 속에 숨어 가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대담하게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 바로 곁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어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6-7시간을 진액이 빠지도록 고통과 싸우고 이제 초죽음이 되어 마지막 호흡을 몰아 쉬기 직전에 처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크게 질렀겠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놀랠 만큼 소리를 크게 질렀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요한은 그 소리를 분명히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힘을 다하여 말씀하신 한 마디 "다 이루었다'는 말씀에는 굉장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은 사람을 움직이고, 역사를 흔들어 놓을 정도로 굉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루터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 한 마디를 가지고 기치를 높이 들자 중세기의 그 어두운 암흑이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링컨이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한 마디 말을 외쳤을 때 북아메리카의 여러가지 혼란 상황이 하나하나 수습되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도 유명한 한 마디를 내세웠습니다.
"잘살아보세"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린애 노래 가사 같은 짧은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 한 마디는 정말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잘 살아보세" 라는 이 말 속에는 그 분의 통치 이념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난에 찌들은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잘 살게 만들어 열강 앞에 내노라하고 얼굴을 쳐들고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까 하는 집념과 한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 말이 가진 위력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알고는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길입니다.
마26:39절을 보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조차도 피땀을 쏟으며 고민하셨을 정도로 발을 들여놓기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향해서 묵묵히 발을 옮겨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몇시간 전에 요15:11절을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 만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자기 마음에 기쁨이 있다고 제자들에게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아는 기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마음속에 이 기쁨이 있었지만 이제 십자가의 고통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순간에도 자기가 그렇게 피 흘려 죽음으로써 전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드디어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생각에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았던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에 예언한 모든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로는,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장대한 계획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길 을 활짝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는 순간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막아 두었던 지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져 내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된 것입니다.
셋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는데 성공하셨다는 뜻입니다.
롬5:8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다 이루었다"는 말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게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6-7시간 동안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비명 한마디 안지르셨을까?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닙니까?
필리핀에 있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직접 체험해 보겠다고 자기 손에 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발에는 박지 않고 양손에만 박았는데 그는 못을 다 박기도 전에 그만 까무러쳐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모든 고통을 그렇게 감내할 수 있게 만든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강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고통할 때 비명을 지를 수 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당하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한 것은 철못이 아니라 사랑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이 승리의 외침 때문에 엄청난 은혜를 입게 된 자들입니다.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에게서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리게 될 그 영광을 빼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이루었다"고 하는 이 외침 속에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과 특권이 우리에게 다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십자가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우리가 십자가에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이 더 분명하고 또렷하게 들릴것입니다.
주님의 그 힘찬 외침 속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우리의 환상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넘어지는 자 같으나 일어서는 힘이 있습니다.
그 외침 속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의 긍지와 만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의 예수
기독교는 십자가를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십자가가 뭐기에 십자가를 떼어놓고서는 기독교는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일까요? 오늘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무리들의 요구에 밀려 예수를 내어 주니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라 불리는 언덕으로 오르십니다. 밤새 심문을 받고 가시 면류관에 찔리고 채찍에 맞아 찢긴 몸으로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몸소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힘겹게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시던 주님이 그만 풀썩 넘어지십니다. 군병들이 달려와 채찍을 휘두릅니다. 다시 일어서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러나 다시금 쓰러지고 맙니다. 이윽고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대신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합니다. 지치고 상한 모습으로 이윽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군병들이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고 십자가 위에는 유대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쓴 명패를 붙여 놓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십자가는 누구의 십자가입니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그러나 사실은 내가 져야 될 내 십자가가 아니었습니까?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이사야서 53장 4절로 6절은 말씀합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사실은 내가 짊어져야 될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매달려야 될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주님이 지신 것입니다. 내가 맞을 매를 주님이 대신 맞으심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나의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나,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주님이 찔리셨습니다. 주님의 고난 때문에 내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누리게 된 평화입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를 못박고 있는 군병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못박고 그것도 모자라 예수의 옷을 서로 가지겠다고 제비를 뽑고 있는 군병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또한 보아야 되지 않습니까? 날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니었던가요? 그러면서도 "주님 오늘도 저를 이렇게 저렇게 복 주시기 원합니다. 나는 이런 복 받기를 원합니다. 저런 복 받기를 원합니다. 제게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해결해 주세요." 이런 우리의 모습과 군병들의 모습이 어떻게 다릅니까? 아니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도 복 받기만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마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 대가를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눔으로 얻으려고 했던 군병들의 모습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슬프게 하면서도 여전히 바라기만 하는 모습이 너무하다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내가 져야 될 십자가를 내 대신 져 주신 주님 앞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셨던 주님 이제 제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밝히 보여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셔서 제가 져야 할 십자가를 능히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간구하며 보여 주시는 길을 따라 주를 따르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십자가 위의 예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빌라도는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써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굳이 써서 붙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빌라도의 마지막 양심일 것입니다. 아니 저의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라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신의 죄책감을 씻고자 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단지 자신의 신분과 처지로 인해서 예수를 자기의 왕이라고 고백하지 못했던 것이요 그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고는 나는 죄가 없다고 손을 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 세상의 신앙 고백이 이루어지는 곳곳마다에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라고 고백되어지는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께서 온 세상의 구주라고 말하면서 아니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사실의 삶을 통해서는 환경과 여건에 매여서 주님을 드러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주님을 욕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주님과는 상관없는 자인양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능력을 주님의 은혜를 평가 절하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느냐 이말입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건만 우리는 그런 고백을 드리기는커녕 난 혼자 힘으로 무엇을 해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의 도움을 세상의 도움을 찾아 분주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내 방식대로 살아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직 하면 그렇게도 그렇게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셨던 주님께서 그리고 각오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절규하셨겠습니까?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기에 못 박히면서도 견디셨던 주님께서 이처럼 절규하신단 말입니까? 우리가 죽어야만 했던 그 죄가 얼마나 중한 죄기에 하나님 마저도 외면하신단 말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도 세상으로부터도 외면당하신 주님은 육신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그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서 절규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이 절규 뒤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세상을 좇아서 살아서는 안됩니까? 세상을 좇는 무리들의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되어지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는 철저한 고독의 세계입니다. 철저한 고통의 세계입니다. 철저한 외면의 세계, 철저한 파멸의 세계입니다. 우리로 이러한 영원한 파멸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님이 이런 절규 속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주님의 생명과 바꾼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우리가 오늘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3. 십자가의 예수와 십자가 곁의 여인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십자가 밑에 모친과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 곁에 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지는 순간인데 모든 것이 어두운 절망으로 바뀌는 그 순간에 그러나 여기 십자가 곁에 서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죽음을 이겨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본 것은 죽어가는 나약한 예수의 겉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은 왜 예수가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가 억울하게 죽어간다고 마음에 분노를 느끼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아니면 우리 예수 불쌍하다고 넋두리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어쨌든 저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십자가 곁에 있었다는 것은 큰 용기였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해가 될 것 같으면 아무 유익이 안된다 싶으면 매정하게 돌아서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지를 않습니까? 아무런 소망이 없고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 해도 끝까지 지켜 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 다시 한 번 십자가 위의 예수를 보십시오. 예수께서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를 향하여 "어머니 보십시오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말씀하시고 그 제자를 향하여 "보라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그 순간까지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을 자신 대신 아들로 여기도록 그리고 요한에게 어머니를 끝까지 잘 모시도록 당부하시는 주님의 아름다운 효심을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를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셨는데 마지막 가시면서 까지도 부모 공경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의 뜻을 받들어 요한은 마지막까지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고 위험의 때에는 저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으며 마지막 마리아가 숨질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부탁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큰 역사를 일으키고 바울이 복음의 불길을 일으킬 때 요한이 잠잠했던 것은 바로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요 요한이 순교의 길을 가지 못했던 것 역시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사도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그 길을 가지 못하고 있었던 요한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참다운 이웃 사랑의 첫 출발이 무엇입니까?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 분의 부모가 계십니다. 육신의 부모, 말씀의 부모, 영의 부모 즉 육신의 부모와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종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바로 우리가 섬겨야 할 부모들입니다. 살아 계신 육신의 부모도 올바로 섬기지 못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영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영의 아버지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 생활 잘하는 그것이 첫째 되는 효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바른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살아가는 모습 중에 주를 부인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그런 삶의 모습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그런 모습이 내 삶 속에 있다면 주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보여주시는 대로 잘못된 것을 바로 세워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오늘 하나님이 내게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예수님이 누구 때문에 그 험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그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죄 때문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나는 또 다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다시 죄가운데 살아감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절규하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순종하며 사랑하며 공경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래서 주를 위해 기꺼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 기쁨으로 지고 주를 따라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김태환 목사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 준 후, 그 뒤 일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직접 지고 “해골의 터”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골고다라고 합니다. 라틴어로 갈보리 (Calvary)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에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은 강도 (criminals or revolutionaries)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38, 마가복음 15:27) 그 두 강도가 그날 사형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이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은 이 두 강도와 같은 “criminal”이나 “revolutionary”로 취급 받아서 십자가 형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런 에피소드 (episode)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 사실만을 신속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가가 기록한 로맨틱한 에피소드마저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시골에서 온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입니다. 군인들은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15:21)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기운이 없어서 기진맥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골고다로 가는 행진이 너무 느렸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로마 군인들이 채찍으로 죄수들을 때렸기 때문에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채찍에 작은 쇠갈구리들이 달려 있어서 때릴 때마다 살점들이 묻어났다고 합니다. 때마침 옆에 지나가던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레네 (Cyrene) 사람이라고 하면 지금의 아프리카 북쪽의 리비아에서 온 사람입니다. 정말 구레네 사람인지, 아니면 구레네에 살고 있던 유대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많은 화가들이나 시인들은 구레네 시몬을 흑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성경 말씀을 보면 “The soldiers forced him to carry Jesus' cross”라고 한 것을 보면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군인들이 강제로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7:32) 아무튼 구레네 시몬이 누군지 정확한 정보가 없는데, 마가복음에는 이 사람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이 구레네 시몬이 누군지 아는데 도움이 될까요? 신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서기 60년대 초반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그 때 기록된 마가복음에 알렉산더와 루포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때 크리스천들 사이에 두 사람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로마서 16:3에 보면 “주님 안에서 선택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루포의 어머니는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루포의 어머니에게 사랑과 존경을 표현한 말씀인데요. 루포의 어머니라면 이 여자는 구레네 시몬의 아내입니다. 대단히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상상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상상력이 아니라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요한복음에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에게는 이런 에피소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가 붙었습니다.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 이렇게 3개국어로 씌었습니다. 이 명패를 붙일 때 제사장들과 빌라도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고 하지요? 제사장들은 그렇게 쓰지 말고 “He said, ‘I am King of the Jews'"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것도 3개국어로 기록되어서 누구나 봐서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쓰거나 저렇게 쓰거나 별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쓰면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이었는데, 유대인들이 그들의 왕을 죽인 것이 되고 맙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패를 볼 때마다 자기들의 왕을 죽인 사실을 싫든 좋든 인정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 (He said, ‘I am King of the Jews')” 이렇게 쓰면 십자가에 못박힌 이 사람은 완전히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거나 저렇게 쓰거나 별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의 주장대로 하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왕을 죽인 것이니까 자기는 그 일에서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무슨 명패를 붙이느냐 하는 문제 하나 가지고 제사장들과 빌라도 사이에 이런 신경전이 벌어졌습니다.
예전에 어디서 우스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느 정신 병원 병동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나는 나폴레옹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저 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사람이 쫓아가서 그 사람의 따귀를 한 대 때리면서 “나는 너 같은 아들이 없다!” 그랬답니다. 유대인의 제사장이나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미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오.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뒤에, 예수님의 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속 옷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누가 가질지 결정하자고 주사위 (dice)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관례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혔고, 십자가 위에는 명패가 붙었고, 군인들은 늘 하던 대로 사형수들의 옷을 벗겨서 나누어 가졌고, 간혹 통으로 짠 옷이 생길 때는 누가 그 옷을 가질지 낄낄거리며 주사위를 던집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저 예수님도 한 사람의 범법자로, 자기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하다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되어 죽은 사람으로, 그의 옷은 벗겨졌고, 군인들은 서로 그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제 조금 시간이 지나면 십자가 위에 못박힌 그 사람은 고통스럽게 죽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군인들은 죽는 사람에게 대한 마지막 배려로 솜 뭉치에 신 포도주에 적셔서 사형수들의 입에 물려줬습니다 (요한복음 19:29).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은 곧 숨이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주도했던 사람들도 그 시간에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안도의 숨을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시편 22:18 말씀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들이 둘러서서 내 겉옷을 나누고, 내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이 시편은 그 옛날 다윗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과 수치와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도입니다. 그 기도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구원해 주시지 않고, 멀리 떨어져 계십니까? 너무 멀리 계셔서 나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십니까?......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조롱합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깔보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니 그가 구원해 줄 거야.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보지. 그가 너를 사랑하시니 아마 너를 구출해 줄 거야.’” (1, 6-8절)
여러분, 다윗의 생애 가운데 이런 수치와 모욕을 당했던 때가 있었나요? 다윗의 시편들은 거의 모두가 그의 생의 정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기의 때라면 사울의 추격을 이리 저리 피해서 도망 다니던 때였습니다. 그 때 자기 자신을 벼룩 (flea)에다 비교했지요?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까? 왕이 뒤쫓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은 죽은 개나 벼룩을 뒤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무엘상 24:14) 도망가다 도망가다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투항합니다. 그 때 그는 살기 위해서 블레셋 왕 앞에서 침을 흘리면서 미친 척하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상 21:13). 이 때의 수치와 모욕을 시로 쓴 것이 시편 22편일까요? 다윗의 생애 속에 그보다 더한 고난과 수치와 모욕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들 압살롬의 구데타로 예루살렘 궁을 버리고 피난을 갈 때였습니다. 소수의 사람들을 데리고 요단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옆에서 자기를 지켜 줄 군인들이라야 요압과 그리고 잇대 (Ittai)와 후새 (Hushai) 같은 이방인 출신 군인들뿐이었습니다. 그 피난 길에서 돌과 먼지를 던지면서 온갖 욕설을 퍼 붓는 시므이 (Shimei)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처량하고 외로운 것은 가까스로 요단강을 건넌 그가 홀로 하나님을 대면했던 그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시편 22편을 그 때 썼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죽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는구나! 내가 죽으면 내 옷을 가지려고 제비 뽑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이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것은 예수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도 다른 두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군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많은 십자가 중에 하나일 뿐 다른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그 사람, 예수님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평범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군인들이 십자가 아래서 늘 하던 대로 옷을 가지려고 주사위를 던지는 그 일까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온 천하에 드러날 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 카이로스 (kairos)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 전에 다른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 하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요한에게는 이 에피소드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십시오!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 “보아라, 네 어머니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이 제자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이 제자는 바로 요한 자신입니다. 놀랍게도 십자가 밑에 다른 제자들은 없고 요한만 있습니다.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잘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훗날 곰곰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터키에 가면 마리아의 집이 있습니다. 이 집에서 요한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부탁했던 말씀은, 마리아의 여생이 염려가 되어서 자기 제자에게 부탁했다는 그 말씀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머지 않아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를 인식하게 될 새로운 공동체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미 전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고, 누가 나의 형제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나의 형제와 자매이며 또한 어머니이다.” (마가복음 3:33-35)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를 형제로 부르고 자매로 부르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를 그렇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피를 나눈 혈연관계가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케임브리지교회라는 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의미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배를 보기 위해서 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함께 전의(戰意)를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갈보리산 예수님
이필재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역사에 대해서 책도 많이 나왔고 영화도 많이 나왔습니다. 저는 모두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일 인상에 남았던 작품 하나가 있었는데 ‘마지막 유혹’이라는 영화였습니다. 다른 영화들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잘 보았지만 새로운 느낌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성경대로 그냥 진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제가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런 내용이라서 새롭게 느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대단히 큰 문제 작품이 되어서 한국에는 못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마지막 유혹(The last temptation)’ 보신 분 손 들어 보세요. 이것이 왜 문제가 되었느냐 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생각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어떤 내용이냐 하면 예수님은 사역 초기부터 유혹을 많이 받으신 것으로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유혹이잖아요? 물리치셨습니다. 나중에는 임금님이 되라고 했지만 물리치셨습니다. 이런 유혹이 계속 예수님 주변에서 일어났고 다 물리치셨는데 마지막 유혹은 뭔가? 십자가 위에서 있었다고 어떤 작가가 상상한 것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온갖 멸시와 조롱과 아픔을 당하고 계시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랬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 말을 그대로 들어서 ‘그래,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 포기하고 보통 인간으로 내려가 버린다면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예수님은 십자가를 저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뜻을 버리고 ‘십자가 위에서 이 고통을 다 버리고 편안하게 내려가서 너희들과 같이 내가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셨잖아요? 이 십자가의 고통이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부담이 너무 커서 “하나님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그냥 지나갈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고 인간 구원의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십자가에 달렸잖아요? 생각한 것과 똑같이 말할 수 없는 모멸감과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지금 참고 있는 겁니다. ‘그래! 여기서 내려가자! 십자가를 지지 말자.’ 내려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사역을 포기했기 때문에 보통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아마 예수님을 따르던 여인들 가운데 가장 가깝게 따라왔던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을 것이다. 아기를 낳게 되고 생활을 위해서 예수님도 생존 경쟁에 뛰어들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우리들과 똑같이 하게 되고 좀 더 행복한 살림을 하기 위해서, 출세를 위해서 투쟁적 역사를 그도 사셨을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마 인간으로서는 더 좋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상상을 마지막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 마지막 유혹을 막 받고 있는 그 때에 “빨리 내려오라.” 소리치는 것에 깜짝 놀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결정을 어떻게 하냐? ‘아니다. 나는 내려가면 절대 안 된다. 아버지가 인류 구원을 위해서 나에게 주신, 반드시 내가 져야할 십자가다. 이것을 내가 버리고 내려가면 안 된다. 나는 끝까지 이 십자가를 지고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마지막 자기의 머리를 스치는 유혹을 물리치고 내려오지 않고 끝까지 견디셨다는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 밑에 달려와서 말합니다. “예수여! 왜 이렇게 바보같이 고통을 참고 당신을 향해서 외치는 저 모멸감의 많은 소리를 들으면서 왜 이러고 계시나이까? 그러지 말고 저 사람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칠 때 빨리 내려갑시다. 그리고 평범하게 우리가 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손에 박힌 못을 다 뽑아줍니다. 장면이 그렇게 나옵니다. “봐요! 아프지 않잖아요? 빨리 나를 따라와서 내려오세요.”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데리고 내려옵니다. “우리 평범하게 이렇게 살아요. 그러면 더 좋잖아요?” 그런데 마지막 스치는 유혹을 다 물리치고 “아니다. 나는 절대로 안 내려간다.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죽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마지막 유혹을 물리치셨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마 그것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생각할 텐데 저는 굉장히 감명 깊었습니다. ‘그렇다. 그도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으니까 인간적인 생각을 하실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유혹들을 다 물리치고 끝까지 아버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의 메시야다. 맞다.’ 저는 그렇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유대 나라는 국법이 따로 없고 율법을 국법으로 실시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재판은 종교 재판이 됩니다. 죽일 죄인이라는 죄의 판결은 가야바 법정에서였는데 가야바 법정은 종교 재판국입니다. 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형 집행은 빌라도 정권에만 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끌고 온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에 대한 재판 과정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재판으로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그렇게 중요한 재판을 새벽에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법에는 재판은 낮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밤에 재판을 하게 되면 감정의 변화로 낮에는 잘 할 수가 있지만 밤에는 잘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재판은 반드시 낮에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낮에 하면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올 것을 이 대제사장들이 계산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의 추종자들이 와서 법정에서 난리를 펴면 어떡하지? 밤에 하면 율법을 어기고….” 그래서 새벽을 선택하는 아주 약삭빠른 재판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재판관의 모순입니다. 빌라도와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에 대한 죄목을 찾아내는 질문이 전혀 다른 것을 우리가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야바 법정에 끌려갔을 때는 대제사장의 질문이 “네가 메시야냐?”라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질문에 메시야라고 말하면 죽일 수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보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거할 수 있느냐?”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질문이 다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것은 정치적인 질문입니다. 유대나라는 왕이 있는데 유대 나라의 도움을 받아야만 왕 노릇을 했기 때문에 헤롯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봉왕이라고 했습니다. 헤롯이 나이가 많아지니까 나라를 세 쪽으로 쪼개서 아들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어서 그 사람들이 분봉왕 역할을 했습니다. 갈릴리의 분봉왕, 사마리아의 분봉왕, 유다의 분봉왕입니다. 지금 빌라도가 질문하는 것은 “이런 왕들은 로마가 인정했다. 너는 어떤 왕이냐?” 묻는 겁니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이 내가 어떤 왕이라고 답을 하셨다면 로마법에 의해서 죽일 수가 있습니다. “로마 원로원이 인정하지 아니했는데 네가 어찌 왕이 될 수가 있느냐? 로마에 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가야바 법정에서 종교적인 질문으로 “네가 메시야냐?” 메시야라고 말하면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빌라도는 “네가 어떤 왕이냐?” 죄목을 찾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8장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랬더니 빌라도가 또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세상 왕이 아니라 진리의 왕이니라.” 이렇게 답변하시잖아요? 그러면 빌라도는 아무리 찾아봐도 로마법에 의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러면 석방 선언을 하면 됩니다. 자기가 재판 과정에서 마지막 선언을 했습니다. “아무 죄 없다.” 그런데 빌라도는 자기가 말한 것으로 번복해서 죽이라고 나중에 선언을 또 하잖아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런 엉터리 재판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빌라도는 정치적인 사람입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기 때문에 자기는 지금 로마 원로원에서 파송한 유대 나라의 총독인데 “아니, 빌라도 너더러 잘 하라고 보냈더니 무슨 문제가 있기에 이렇게 유대 백성들이 난리와 소란을 치느냐?” “네, 갈릴리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죽이든가 말든가 그 한 사람 처리하는 게 뭐가 어려워서 온 백성들이 난리를 피게 이렇게 만들었느냐?” 당장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두려워서 죽이라고, 차라리 하나를 죽이는 것이 낫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재판을 보십시오. 설사 죄가 있어도 재판관이 없다고 선언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법 정신입니다.
저는 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내가 원치 아니하는 일에 많이 불려 나갔습니다. 재판석에 서서 선서를 하고 증인을 서는 일을 여러 번 했습니다. 교인들 관계 때문에 한 것입니다. 목사가 왜 그런 데를 나가느냐? 한국에서는 이런 문화가 없지만 미국에서는 목사의 증언은 굉장히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증언해 줄 필요가 있어서 갔는데, 사람들이 방청석에 가득하게 모이고 큰 죄를 다루는 증언대에 나가서 선서하고 위증했다가는 내가 잡혀 들어갑니다. 보통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과정을 제가 많이 경험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재판관이 그 자리에서 무죄선언을 한 적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목사님, 저는 필라델피아에서 온 사람인데 저를 좀 도와주세요. 저를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저는 변호사도 살 수 없는데 법정에 출두해야 됩니다. 목사님이 좀 같이 가주세요.” “아니, 누구세요?” “제가 한국에서 와서 미국 남자와 결혼했는데 이혼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허락 없이 찾아가서 그 집에 들어갔는데 무단출입이라고 해서 나를 고소해서 지금 재판에 출두하게 되었는데 얘가 보고 싶어 갔다가 감옥에 가게 생겼으니 어떡합니까?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있어야지요. “나와 법정에 같이 가주세요.” 정말 곤란한데 이렇게 애원을 하니 제가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하잖아요? 그런데 법정에 가보니까 아무도 없고 나와 그 여자 둘이 앉았습니다. 재판관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목사입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교인을 도와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정말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온 겁니다.” “이 여자가 지은 죄를 목사가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무단출입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책임지고 교육을 시켜서 다시는 그렇게 안하겠다고 목사가 보증을 서주면 이 자리에서 석방시켜 주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사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재판관이 “그러면 됐습니다. 데리고 나가세요.” 끝났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데리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의 책임이 뭡니까? 다시는 그렇게 못하게 하는 책임을 줬으니까 교육해야 됩니다. 세워놓고 법원 앞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교육하는 거야! 다시는 그러지 마! 교육했어! 가시오.” 그러고 끝났습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러면 냉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고 가야지 그냥 가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미국 재판정에 여러 번 갔기 때문에 잘 압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무슨 재판이 이런 재판이 있습니까? 세상에 예수님 밖에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그런 엉터리 재판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라틴말로 ‘갈보리’, 히브리말로 ‘골고다’ 해골이라는 뜻은 사형장입니다. 여러분, 그 갈보리 산 위에서 아무 죄도 없이 처절하게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하고 온 백성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하면서 피를 흘리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산으로 한번 그림을 그려보세요. 예수님이 뭘 잘못하고 그렇게 되셨습니까?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래야만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구원의 진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는 곳에 이르러” 자기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재판 과정은 잘못 되었어도 이 십자가는 내 몫이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사명이다. 그래서 내가 져야 한다.” 누가복음 22장에 가룟 유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너는 화가 있을 지로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류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나 너는 나한테 죄를 지어서 너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우리에게 신앙이 큰 문제점이 어디서 오느냐? 십자가가 내 앞에 다가올 때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말입니다. 왜 우리가 바울을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 “사나 죽으나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나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십자가를 지겠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소에 “나는 주님을 위하여 뭐든지, 주님을 위해서는 내 생명까지라도 드리겠습니다.” 다들 약속하고 다들 의로운 찬송가를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 십자가가 다가올 때는 다 도망가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문제점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너희가 나를 다 버릴 것이다.”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습니다.” 다들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왜 도망갔습니까?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다가오니까 무서워서 다 도망갔지요? 또 예수님에게 은혜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만 명씩 따라 돌아다녔습니다. 오병이어 떡 먹고 예수님께 은혜 받고 좋다고 하고 아주 흥분하고 충만해서 좋아했던 사람들이 왜 다 도망갔습니까?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십자가가 다가오는 부분이 싫어서입니다. 십자가가 싫은 겁니다.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거기입니다. ‘내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질 것인가, 버릴 것인가?’ 그겁니다. 지금 로마 베드로 성당 안에 가보면 로마 군인의 복장으로 동상이 서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입니다. 왜 그 사람이 거기 성전 안에 동상으로 서 있는가? 그는 그 다음에 그 아픔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내가 왜 예수의 손에 못을 박아야 돼?’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 했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일생동안 그가 뭘 했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아프게 했기 때문에 아픈 일에 몸을 바치자.’ 자기 몸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톨릭교회에서 그를 성자 칭호를 주어서 성전 안에 동상을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이 좋다고 은혜입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이 다 도망갔다는 것은 사람들이 말로는 표현하지만 정말 십자가가 올 때는 타산적이 되고 이기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하는 것을 인색하고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돈 몇 푼 때문에 떨고 시험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아무도 없구나. 나를 위해서 죽겠다던 제자들마저 한 사람도 없구나.’ 외로이, 외로이 저 갈보리산 위에서 혼자 피 흘려 운명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 사순절은 이것을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나도 주님을 위해서!’ 이 십자가 형벌은 페르시아 형법입니다. 흉악범은 땅에서 죽이면 땅이 오염된다고 공중에 매달아죽입니다. 그리고 죽자마자 독수리들이 날아와서 그 살점을 다 뜯어먹게 만듭니다. 그래야 땅이 오염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예루살렘에 여행 와서 구경꾼 중에 하나가 되었다가 로마 군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징벌을 당해 주님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를 잠시 동안 지었습니다. 잠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은 그 기쁨 때문에 ‘아! 내가 잠시나마 주님의 고통을 덜어 들였다.’ 이것이 은혜로 주어져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살았느냐 하면 사도행전에 보세요. 이 구레네 시몬의 부인이 사도바울 선생의 어머니 역할을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내가 직접 못하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어머니 역할을 해서 사도 바울이 나중에 고백합니다. “그는 내 어머니라.” 그 다음에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 두 명 있었습니다.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 때 유명한 성직자가 되고 선교사가 된 것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지금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줄 것인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약속하고 세례 받을 때부터 ‘나는 주님을 위해서 내 몸까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마지막 내 운명을 하는 것이 영광이지!’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정말 그의 노력과 너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내 앞에 십자가로 다가왔을 때는 다 도망가 버리고 ‘이러다가는 손해 보겠다.’라며 별 계산을 다하고 정작 주님을 위해서는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마저도 한명도 없어졌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나중에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잖아요? 그때 그들은 버렸던 십자가를 다시 찾아 나서지요? 베드로의 십자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오 나의 십자가여 내가 버렸던 나의 십자가여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다시 오기를 기다린 나의 십자가여 주님이 달려 돌아가신 그 십자가에 나 또한 죽게 되니 감격의 마음으로 그대를 맞이하노라. 나 얼마나 그대를 버리고 울었던가 그대가 내게 다시 돌아오게 됨이 나에게 얼마나 큰 감사인가 그대는 오늘 나를 주님 곁으로 인도하니 나 이제 그때 품에 달리겠노라 주님은 똑바로 달리셨으므로 나는 거꾸로 달리겠노라.” 그래서 거꾸로 달려 죽었잖아요? 안드레는 옆으로 매달려 죽겠다고 해서 옆으로 매달려 순교 당했으며 도마는 동인도에 가서 죽창에 찔려 순교했고 야고보는 최초 순교의 피를 흘렸고 맛디아는 돌에 맞아 순교했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누가는 그리스에서, 바돌로메는 전신 껍질을 벗기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십자가 문화가 많습니다. 무덤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활과 영생의 상징입니다. “이 성도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래서 무덤 앞에 십자가를 해놓는 것이고, 여러분! 앰뷸런스가 달려갈 때 보세요. 푸른 십자가가 있잖아요? 질병에서 구원을 뜻하는 십자가입니다. 그 다음에 빨간 십자가인 적십자! 전 세계 어느 나라나 고난의 해결 표시로 적십자를 사용하고 있고 그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을까 입니다. “하나님, 건강주시고 돈 주시고….” 다 얻는 것만 생각합니다. 믿음이 충만해지면 무엇을 드릴까 입니다. 어떻게 하면 드릴 수 있을 것인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고 내 몸 하나가 있을 때 “하나님! 나를 순교자로, 나도 주님을 위해서 피 흘릴 수 있는 기회로 나에게 주세요.” 그래서 순교자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이 이렇게 전해진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처음에는 제자들같이 말하고 행동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상황이 조금만 변해도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계산을 합니다.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열 두 제자도 그랬습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이 뭐하는 거냐? ‘아! 그러지 말아야지. 주님을 위한 일이라면 내가 무엇이든지 해야지.’ 이것을 결심하는 기간입니다.
저는 교회와 사회를 비교해볼 때 요즘에는 우리 대한민국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잖아요? 교인이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과 사회인들이 어떤 기관에 충성하는 것을 비교해 봤을 때 교회가 뒤떨어집니다. 저는 대학에서 이사로 20년째 봉사하고 있습니다. 대학교수 채용하는 것에서부터 대학 모든 일을 결정하는 일에 늘 참여해서 20년 동안 모교를 위해서 해달라고 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 대학을 위해서 사회인들이 헌납하고 있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지팡이 지면서 절뚝거리는 할머니가 이사회 하는데 오셔서 “내 마지막 남은 재산 이 학교에다 바치겠습니다.” “어휴! 그러시겠습니까? 정말이십니까?” “내가 왜 거짓말합니까?”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아세요? 100억입니다. 기증하는 서류 절차가 다 끝났습니다. 지금 그분은 몸이 아파서 출입도 못하십니다. ‘대학을 위해서 내가 그나마 그런 일을 하고 죽게 되었으니 기쁘다!’ 여러분, 사회는 이런 문화가 굉장해 커졌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약삭빠르게 생각하고 십자가가 정말 다가올 때는 인색하여 지고 별 계산을 다하면서 빠져나가려 합니다. 여러분, 지금 대한민국에서 한 해 동안 없어지는 교회가 2000~3000개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십자가 지기를 싫어합니다. 옛날에는 개척교회가 잘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졌습니다. 지금은 다 계산해서 ‘어휴! 이 교회 나가면 건축헌금 많이 해야 되겠다.’ 안됩니다. 경기도와 서울에서만 일 년에 1500개 이상의 개척 교회가 없어집니다. 십자가를 안집니다. 이런 세대가 되었습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져 줄 것인가?” 주님은 오늘도 끊임없이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순절, 고난주간 “주님! 나를 써주세요.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렇게 결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신 예수님
요 19:17-18 / 김성호 목사
첫째,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17절)
‘자기의 십자가’에 담겨있는 뜻은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인간을 구원하시는 길은 고통의 길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억지로 떠밀려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의 이사야의 종의노래 세번째 부분에서 아주 잘 예언되어져 있습니다. 이사야 50장 4-7절까지를 보면 본문을 보면 학자의 혀를 주셨다고, 아침마다 나의 귀를 깨우쳐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메시야에게 아침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끔 말씀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순종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 보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메시야는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얼굴이 부싯돌처럼 단단하게 되어서 모든 고난을 다 견디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은 이루시는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에서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후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또한 순종의 결과가 기쁨임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입니다.
둘째,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로 나가셨습니다.(17절)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의 밖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골고다’ 라는 장소보다 성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나가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1-12절입니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서 불사름이라 /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밖에서 고난 받으셨느니라’
이는 레위기 16장 27절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셨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다가 불사를 것이요’(레16:27) 주님의 성문 밖으로 나가심은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제를 온전히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율법을 익히 알고 있는 히브리 교인들에게 말할 때 특별히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일년에 단 한번있는 대속죄일의 속죄제물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3장 13절에서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영문밖으로 나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무슨 말씀이냐면 성밖에 버리워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라고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셋째,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예수님
십자가형은 자기의 살을 뚫는 순간적인 고통보다 몸을 가누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끊임없이 느껴야 하며 죽기까지 속도를 최대한으로 늦추어 고통을 최대한으로 오래 느끼게 하는 사형법입니다. 즉 몸을 고통에 의지해야 살고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이 고통인 것이 십자가 형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죽지 않으셨습니다. 사는 것이 고통인 장치, 고통과 아픔을 기대야만 하는 장치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런 십자가의 고통이 나타내는 것은 죄로 물든 인간의 삶이 사실 이렇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죄로 물든 인간의 삶은 살면 살수록 하나님 앞에 심판의 제목만 만들어냅니다. 인간의 입으로 산소가 들어가면 나오는 것은 이산화탄소입니다. 또한 남의 고통과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고통을 몸소 겪으며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의 삶의 죽음을 알리신 것이다. 고통을 몸소 겪으심으로, 고통의 숨을 쉬심으로 그렇게 죄의 결과를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며 동시에 이러한 죄의 결과를 예수님이 모두 짊어지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종의 노래 네번째인 53장 5-6절에서 바로 이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6)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다 저와 여러분 각자의 죄의 고통이라는 말씀이며 예수님이 이 고통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용서함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사순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고통의 처절함을 기억하시고 그에게로 나아가고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이루었다
요 19:17-42 / 전철민 목사
‘다 이루었다!’
이 외침은 최종 승자만이 외칠 수 있는 선언입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로마 세계를 통일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을 때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고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습니다.
천하를 다 점령하고 더 이상 점령할 땅이 없는 것을 알고 통곡한 알렉산더만이 ’다 이루었다’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최후 승자만이 이렇게 외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십자가에 달린 한 젊은 사형수의 입에서 ‘다 이루었다’는 외침이 나왔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세계에서는 하루에도 몇 명씩, 몇 십 명씩 많을 때는 몇 백 명씩 죄수들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아주 흔한 일상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죄수의 십자가 사형문제로 당시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고,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마저 이 이상한 사형에 연루가 되어 극도의 긴장과 고민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죄목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왕’이라고 선언한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체포하여 사형시켜 달라고 로마 총독관청으로 끌고 왔습니다.
예수를 심문한 사형언도권을 가진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그에게서 어떤 죄도 찾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풀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의 가장 큰 임무는 자기 관할 지역에 민란이 일어날 때 군사적으로 신속히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중이 모이는 것을 가장 경계했습니다.
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한 예수로 인해 그가 나타나는 곳이면 수백, 수천, 수만 명씩 모였기 때문에 극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군중은 갑자기 로마에 대항하는 폭도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디오 빌라도는 정보원들을 위장시켜 예수가 집회하는 장소마다 군중 속에 투입을 시켜 매일 매일 정보원들로부터 상황 보고를 받았습니다.
날마다 들어오는 정보원들의 보고는 놀랄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는 로마의 지배와 착취를 받고 있었던 유대인이었으면서 유대인도 사랑하고 로마인도 사랑하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신적 능력이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만들었다는 보고라든지,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고, 귀머거리를 듣게 해 주고, 문둥병자들을 단숨해 고쳐 주고, 귀신들도 예수가 누구신지 알아보고 벌벌 떨면 추방당하는 것이라든지, 심지어 죽은 자들도 다시 살게 해 준다는 보고를 받을 때 빌라도는 도대체 예수가 누구인지 직접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정보원들의 이야기로는 날마다 대중적인 인기가 더해 가고 있는 예수를 군중들이 억지로 왕을 삼으려 한다는 것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질까봐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정보원들을 보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초청합니다.
예수님은 총독청 접견실 발코니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빌라도는 접견실로 내려오면서 예수의 뒷모습을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온 몸이 굳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성과 위엄 앞에 압도당하고 맙니다.
로마의 총독들은 정기적으로 관할 지역의 정세를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보고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유대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예수로 인한 대 규모 집회와 예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 군중집회는 정치적인 집회가 아니라 순수한 종교집회입니다. 이 집회를 이끌고 있는 예수는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 황제여 나는 그 동안 수많은 전쟁을 겪었고, 두려움을 모르는 로마의 장군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온 몸이 떨렸습니다. 감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는 신의 아들인 것 같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지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언제든지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 총독 관청으로 와서 보호를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신의 아들’로 알고 있는 예수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과 왕‘이라는 죄목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끌려 자기 앞에 있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또 다시 두려움으로 예수께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왕인가?”
고문으로 만신창이 된 예수는 아주 또렷하게 “네 말대로 내가 왕이니라”고 답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두려움은 극치에 달합니다.
만일 자기가 사형을 언도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풀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우리의 황제는 로마의 가이사 황제 밖에 없다’고 외치는 군중 앞에 “나는 이 사람의 사형에 책임이 없다. 너희들이 책임을 지라”며 세숫대야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손을 씻습니다.
군중들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책임을 질 것입니다”며 예수를 넘겨받아 십자가에 달리게 합니다.
결국 빌라도는 자기의 정치적 생명 때문에 예수를 내어 주고 맙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을 때 거침없이 자신의 ‘하늘로서 내려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적과 표적들을 베풀었습니다.
분명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의 선언대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정신병자거나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완전한 정신적인 균형과 말과 행동의 일치 앞에 어느 누구도 흠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공격하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죄로 책 잡을 수 있겠느냐?”(요8:46)며 반문할 정도로 균형 잡힌 정신과 인격 그리고 삶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고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정신과 균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면서, 지금까지 사용해 온 신적 능력을 다 포기한 채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는 그의 외침은 세상을 정복한 정복자의 외침이었습니다.
수난 주일을 맞이하여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의 의미를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I.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를 믿어야 합니다.
그를 믿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만일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시라면 ‘믿으면 좋고, 안 믿어도 괜찮고’ 정도가 아닙니다.
믿으면 영생, 안 믿으면 영벌입니다.
만일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면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과연 이 땅에 오신 예수가 구약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지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태어나시기 전부터, 그리고 태어나시고 나서 자라는 과정에서, 그리고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어 사역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선지자의 예언한대로 이루심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입증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500회 이상 자신에 관한 예언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주께서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란 말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한 두 번 맞는 것을 우연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수 백회가 넘는 선지자들의 각종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이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는 순간까지 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 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칠백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예언합니다.
이사야 53장 12절에,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여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는 두 사형수 가운데 그들과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본문 18절에,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폭도들을 동원해 자기를 사형시켜 달라고 청원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사형에 내 준 본디오 빌라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2.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천 년 전에 성령의 감동을 입어 자신이 마치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에 서 있는 것과 같은 환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시편 22절 18절에,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본문 19장 23~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힘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3. ‘내가 목마르다’고 외치시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영감의 사람 다윗은 다시 예언합니다.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었사오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28절에,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라고 했습니다.
신포도주와 해융은 일종의 마취제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경감시켜주기 위해 신포도주와 해융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십자가 형벌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다윗은 환상 가운데 십자가형을 보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틀림없습니다.
4. 그 뼈가 꺽이우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다시 예언합니다.
시편 34편 20절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고 했습니다.
사형수 집행관들은 사형수의 다리뼈를 꺾습니다.
건장한 사형수들은 십자가에 달린 채로 2,3일씩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다리뼈를 꺾어 주면 빨리 죽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뼈를 꺾으려고 다가섰을 때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뼈를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본문 32~33절에,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유월절에 먹는 어린 양의 뼈를 꺾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9장 12절에,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은 장차 세상에 오시어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을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는 순간에 성령의 감동으로 알아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뼈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틀림없습니다.
5.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고 했습니다.
주전 오백 년 전 선지자 스가랴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예언했습니다.
스가랴 12장 10절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본문34절에,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창에 찔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이 틀림없습니다.
6. 부자의 무덤에 장사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전 칠 백 년 전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가 어떻게 묻힐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장 9절에,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본문 38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빌라도에서 청합니다.”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41절에,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부자의 무덤에 묻힌 예수!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를 믿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택 하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30장 19절에,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선언의 의미는
II. 하나님의 계시 활동을 다 성취하였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구약 전체를 통해 일관된 하나님의 계시 활동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7절에, “구약 모세 오경을 비롯해서 선지서와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하여 쓴 것이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5장 39절에도,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한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증거하면서 그분을 보내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III.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행하셨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모형입니다.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거나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참 형상인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을 주신 두 가지 목적은,
첫째는 죄를 깨닫게 하고(롬3:20) 둘째는 죄로 인해 죽게 만듭니다(롬7:9)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과 죄로 인해 죽게 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율법을 성취하여 주신 율법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를 붙들게 합니다.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행하신 예수를 믿기에 우리가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한 것입니다.
IV. 구속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일이 다 성취되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서 14절에,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친히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친히 제물이 되시고, 친히 성전이 되어 주셔서 완전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어떤 공로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공로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선언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이 선언으로 인해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게 됩니다.
‘다 이루었다’는 이 선언으로 인해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이 선언으로 인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일이 다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주님처럼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이루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처럼 숨을 거둘 때 나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며 선언하실 수 있는 삶을 사시기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이정원 목사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그토록 악랄하게 고문하고 죽인 기록이나 사진들을 보고 몸서리치도록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잔인한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독재정권 시절에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토록 칭찬한 로마인들도 사실은 가장 잔인한 민족들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인 이야기에 보면 만 명이 넘는 군대를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죽음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가장 무섭고 잔인한 사형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 키케로는 십자가를 가리켜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죽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은 천 번의 죽음을 죽는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큰 못이 손과 발에 박힙니다. 나무에 달려 있는 동안 심한 염증이 생기고, 못이 박힌 상처 부분이 부어오르며, 근육이 찢겨짐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합니다. 그리고 깨지는 것 같은 두통과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바로 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그토록 잔인하고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감정의 개입 없이 담담하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확인한 것은 예수님에게는 사형에 처해질 만한 아무런 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여 로마 총독에게 끌고 가서 죽여 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예수님에게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십자가형을 언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처형당하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셨습니다. 참혹한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가 없어서 쓰러지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옆에 서 있던 구레네 지방에서 온 시몬이라는 청년을 붙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패를 써 붙였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속옷은 제비 뽑아 한 사람이 그것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두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거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던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알고 모시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마디 말씀을 더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의미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것도 왜 하필이면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셔야만 하셨을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저주 받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하) 왜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죄를 짓습니다. 역사 이래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런데 이 죄는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대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모두가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을 당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율법과 죄의 저주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이 모든 저주를 당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수치스럽고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예언의 성취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3-24절) 요한은 여기서 시22:18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두 명의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역시 구약에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53:9)
이 외에도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고난당하실 것과 죽으실 것, 그리고 부활하실 것이 모두 구약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져 영원히 죽게 될 소망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처음부터 이 모든 일을 계획해 놓으셨으며, 마침내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들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19-20절) 그런데 대제사장들이 이 패에 대해서 빌라도에게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21절)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패를 붙임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이렇게 처형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동시에 ‘너희들의 왕이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을 당한다.’라고 조롱하는 마음으로 이 패를 붙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말이 눈에 거슬렸으며, 빌라도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조롱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칭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고쳐줄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빌라도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인 죄패의 내용은 진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왕으로써 모든 백성을 대표하여 죽으신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모든 죄와 저주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이제 더 이상 저주와 심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한 사람들은 네 명의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피를 흘리며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가졌습니다. 군인들은 처형된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을 팁으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찮은 옷가지를 얻었을지 모르나 영원한 구원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군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고통당하시며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배하는 시간에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욕심으로 머리가 복잡하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에 밑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로마 군병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얻고자 하는 것은 좋은 분위기와 친구들과 추억이 아닙니다. 인간의 위로와 관심이 아닙니다. 예배하고 기도함으로써 내 사업과 가정과 직장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얻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속사람이 깨끗하고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아무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이 시간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십시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겸손히 주님을 영접하시고 죄와 저주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받는 축복을 받게 되기 바랍니다.
새로운 가족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다른 세 명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요한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망이었고 모든 것이었던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이제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26-27절)
물론 마리아에게는 또 다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어머니를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새로운 가족,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가족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자기 가족 밖에 모르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뜻을 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모두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혈연관계 못지않게 실제적인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가족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관계는 정말 소중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맺어진 새로운 공동체 역시 기존의 가족관계 못지않게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새로운 가족관계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신앙이 얼마나 성숙되었느냐 하는 것은 이 새로운 가족들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려운 형제는 마땅히 우리가 돌보아야 합니다. 고통당하고 있는 형제를 안 믿는 친척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우리가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한에게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어주신 것은 단순히 어머니를 걱정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들이 완전히 한 가족으로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늘 아쉬움을 느끼는 성도가 있습니까? 여기 이 교회 안에 있는 아들들이 모두 당신의 아들들이요,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아들이 당신의 아들인 것을 명심하십시오. 딸이 없어서 섭섭한 가정이 있습니까? 여기 교회 안에 있는 사랑스럽고 예쁜 딸들이 모두 당신의 딸들입니다. 그중에서도 당신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딸이 특별히 당신의 딸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이 교회 안에서 당신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부탁하신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증오했던 유대인들뿐 아니라 예수님을 직접 심문했던 대제사장들과 헤롯과 빌라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의롭고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것도 왜 그토록 잔인하고 참혹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죄와 저주와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믿는 우리는 모든 죄와 저주와 심판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마십시오. 날이 갈수록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깊이 깨달아지며, 그 사랑에 더욱 뜨겁게 감격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중에 있는 연약하고 어려운 형제를 특별히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서로 돌봄으로써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증거가 풍성하고 강력하게 나타나는 아름답고 복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요 19:17 / 우선동 목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복음의 핵심이고 구속사의 절정입니다. 모든 것이 이것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할 만큼 이 사건은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들이라면 십자가 설교를 많이 들었을 수 있으며, 때로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는 주님에 대한 영화도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십자가사건이 너무 익숙하고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이 놀라운 본문을 대하면서도 아무 감동이 없이 말씀을 읽고 듣는다면 그것은 여러분 영혼의 건강히 극히 위험한 상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길가와 같은 마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뿌려져도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녀 딱딱한 땅이 됨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고 감동을 줄 수 없게 되는 그런 땅 말입니다. 이런 날이 지속되다가 인생을 마친다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감동과 울림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주도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비슷한 본문을 다루고 있는 마27:32은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고 기록합니다. 막15:20은 “희롱을 다할 후 자색 옷을 입히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들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타인에 의해 억지로 지게 되는 수동태로 기록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오늘 본문처럼 주님이 주도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으로 능동태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대속 사역의 자발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사실상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 자체로만 보면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타의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상당히 우발적이고도 정치적인 이유로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즉, 십자가 사건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총독 빌라도가 결탁하여 만들어 낸 정치적 사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은 결코 타의에 의해 강제로 혹은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발생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17절에서 사도 요한은 끌려가는 사형수가 아니라 본인의 의지로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로 걸어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어는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께서 성문 밖 골고다라 불리는 처형장으로 나가셨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너무나 참혹했기에 죄수들이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것이 보통인데 주님은 비록 채찍질을 당하여 육체적인 힘을 다 소모하셨지만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의지를 가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고 계신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하나같이 군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갔다’는 표현을 하지만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조금의 저항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가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가룟 유다와 가야바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총독 빌라도와 같은 불의한 자들의 손을 잠시 빌리신 것뿐입니다.
2. 성경이 이런 태도를 강조하는 이유
이처럼 사도 요한이 주님께서 주도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양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목자
주님은 요10:11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그리고 15절에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아시듯이 자기 양을 아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또 주님은 자기 양을 아실뿐만 아니라 자기 양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17절에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 구절에서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유대인 대제사장들이나 빌라도가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려놓으신 자리입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주도적으로 지셨다는 말씀 속에는 이런 의미들이 다 녹아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2)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고난의 길, 고통의 길’ 이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주님은 죽기까지 완전한 순종을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빌2:8에서 주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역을 했던 아담, 그리고 그 후손으로 나서 시종일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을 일삼고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인생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참 아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아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완벽하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죽기까지 순종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모습에서 한 아들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기적적으로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이 십대 소년이 되었을 무렵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태워서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제사법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명하신 모리아산에 이르러 종들은 산 아래에 두고 이삭만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창22:6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자기를 태울 번제 나무를 지고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산으로 오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버지에게 온전한 순종을 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오르자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이삭이 지고 온 나무를 벌여놓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9절에서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라고 기록합니다. 이삭이 십대였다면 아버지 아브라함은 100살에 이삭을 낳았으니 110세가 넘은 노인입니다. 이 늙은 아버지가 이삭을 결박하려고 했을 때 불과 나무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냐고 물었던 이삭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리고 보통 아들이라면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것을 알고 거부하거나 반항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기사에서 이삭이 거부했다거나 반항했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힘이 왕성한 십대 아들인 이삭을 결박하였고 제단 위에 두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순종하는 아들, 죽음의 제단 위에서라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아들 이삭을 통해서 2천 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계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제단에 올라 죽으시기까지 하셨던 참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고도 철저히 순종하시기 위하여 당신을 매달아 죽일 제단인 십자가를 친히 지시고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라 불리는 처형장을 향하여 자발적으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3)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예수님이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위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특별히 고난 받는 종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데 사53:7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양들은 죽을 때에도 저항하거나 울부짖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도 양의 모습으로 아무 저항 없이 소리도 내지 않으시고 병사들이 이끄는 대로 사형장으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요1장에서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소개했던 말이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시기 위해 오셨고, 그 임무를 완수하시고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시는 주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절대침묵, 절대순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이런 요소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항상 말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시끄러워서 문제입니다. 내 의견과 소신이 문제입니다.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말이 없습니다. 말이 많이 필요치 않음을 압니다. 몸으로 감당하면 되니까요. 주님은 절대순종과 절대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4) 성 밖에 버려지는 속죄제물
하나 더 볼 것은 “나가시니”라는 단어인데 공동번역은 ‘성 밖을 나가’라고 풀어 번역하였습니다. 처형 장소인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장소였습니다. 주님은 이곳까지 가시기 위해서 성문을 지나 예루살렘 밖으로 나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 단어가 왜 중요합니까?
레위기서에 보면 각종 제사법이 나오는데 1장은 번제 드리는 방법, 2장은 소제, 3장은 화목제 그리고 4장은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레4장에 기록된 속죄제물은 그 제사 방식이 번제물과 달랐습니다. 번제물은 전체가 다 놋제단 위에 드려졌지만, 속죄제물로 드려지는 수송아지와 수염소의 경우에 피는 향단이나 속죄소에 뿌리고 기름 부위는 취하여 놋제단에 태워서 하나님께 드려졌지만 남은 가죽과 고기와 머리, 다리, 내장과 똥 전부는 이스라엘 진영 밖 재 버리는 곳에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진 밖은 하나님의 처소로부터 떨어진 형벌의 장소 곧 지옥을 상징한다고 보았는데 주님께서 바로 이 속죄제 규정에 적힌 대로 예루살렘 성 밖 형벌의 장소인 갈보리로 가셔서 저주의 나무에 달려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구약의 속죄제물처럼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13:12-13은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약성경에 당신 자신을 가리켜 예언한 것 뿐 아니라 예표로 주어진 모든 것들을 이처럼 철저하게 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루셨던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런 주님의 죽음에 임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심으로 주님의 죽음이 준비된 죽음이요, 계획된 죽음이며, 목적이 있는 죽음이고 결과를 예비하는 죽음인 것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릴 위한 것이고, 우리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왜 주님은 스스로 생명을 버리시는가?
왜 주님께서는 자기 양을 위하여 스스로 생명을 버리시는 것입니까? 왜 주님께서는 그분을 인정하지도 알지도 않고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 인생을 살던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그 큰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까? 왜 주님은 불순종과 반역 그리고 비뚤어진 마음으로 가득한 우리네 인생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초지일관 순종하신 것입니까? 왜 주님은 우리 같이 말 많고 불평과 원망이 많은 인간들이 무슨 가치가 있길래 아무 저항도 없이 잠잠하게 그 모든 합당하지 않은 고난과 모욕과 천대와 죽음까지도 다 받으신 것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왜 속죄제물이 되셔서 성 밖에서 저주의 나무를 지고 죽으신 것입니까? 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스스로 짊어지셨습니까? 누구를 위함이고 무엇 때문입니까? 요10:10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생명을 모르는 우리 비참한 인생들에게 진짜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려고 그리고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해주시려고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몸소 지고 예루살렘 성문을 통하여 성 밖의 처형장, 골고다로 나가셨던 것입니다. 순종을 모르고 지옥으로 가면서도 무지하여 알지 못하고 제 길을 고집하는 짐승 같은 삶을 살면서 그것을 잘난 줄로 여기는 인생들을 위하여, 그런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은 성육신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마10:38에서 주님은 이렇게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사형수는 자기가 달려 죽을 십자가의 가로대를 스스로 지고 처형장으로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주님은 내 제자가 되려면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형을 언도받은 사형수처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그 가치들을 추구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감으로써 자신이 이 세상을 향하여 죽은 사람임을,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 밖으로 주님을 따라 나가는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수십 번 수백 번 십자가 찬송을 부르고, 십자가 설교를 들었으며, 십자가를 붙들고 살겠노라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십자가를 잘 알고 계십니까? 구원에 이르고 천국에 당도할 만큼의 십자가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아는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고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십자가의 사람이십니까? 정말 십자가 없으면 못살 것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주님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주도적으로 지셨습니다. 양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 밖에 버려진 속죄제물로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양떼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도록, 풍성한 생명을 얻도록,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늘의 생명을 얻도록 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드리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즐거이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천국에서의 삶을 위하여 자신의 지옥과 같은 삶을 묵묵히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아십니까? 얼마나 아십니까? 어떤 방식으로 알고 계십니까? 이제 안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십자가를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각자가 십자가 앞에서 진실하게 이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