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의 충격과 부활
사도 10, 34-43; 콜로 3,1-4; 요한 20,1-9
주님 부활 대축일; 이태원 참사 희생자 시청앞 빈소; 2023.4.9.; 이기우 신부
1. 빈 무덤의 충격
오늘은 부활대축일이고 지금은 저녁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태원 참사로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고 그 유가족을 위로하고자 여기에 모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우리가 슬픔에 잠길 겨를도 없이 백일 넘게 빈소를 지키고 계시는 유족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이분들의 슬픔에 함께 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을 떠난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슬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일이야 인간이라면 최소한도의 윤리도덕에 속하는 본성인데도 죽은 이들을 공공연하게 폄훼하는 자들까지 설치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 유족들과 함께 하는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는 뜻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도 누명을 뒤집어쓰고 당해야 했던 억울한 죽음이었고 더군다나 정치 반란범에게나 가하는 십자가형으로 온 몸이 발가벗긴 채 수치스럽게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는데도, 그 당시 이스라엘의 주류는 물론 대부분의 백성들도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비게 된 무덤을 놓고도 제자들이 스승의 시신을 훔쳐가 놓고 부활했다고 우기는 소동이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여 놓고, 거짓 선동에 명예 훼손까지 서슴없이 범했던 자들이 당시 기득권층이었습니다. 너무나 똑같이 닮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태원 참사는 빈 무덤이 가져다준 사회적 충격과 아주 비슷하게 닮아있습니다.
2. 막달레나의 외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때는 금요일 오후였는데, 숨을 거두신 후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내어준 돌무덤에 부랴부랴 모시고 난 시각이 이미 해가 기울어 질 무렵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나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율법 규정상 시신에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는지라 돌무덤에 안치만 한 채로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식일이 완전히 끝난 일요일 이른 아침에 그 돌무덤으로 갔던 사람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서 십자가 형장에 예수님께서 숨지시는 순간까지 남아 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네들은 시신에 향료를 발라 드림으로써 염을 해 드리려던 것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무덤 입구를 막아놓았던 큰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입구가 열린 무덤 안은 그 내부까지 바깥에서도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비백산한 막달레나는 한걸음에 제자들에게로 달려가 알렸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ㄴ).
2. 사도들의 대응방식
막달레나의 이 외침을 듣고 두 제자가 움직였는데, 어린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랐습니다. 그래서 돌무덤에 먼저 도착한 요한이 입구에 멈추어 서서 안을 들여다보니 과연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만 놓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뒤따라 도착한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과연 시신을 안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이 따로 한 곳에 개켜져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그분의 시신이 도난당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가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두 사도의 대응방식은 달랐습니다. 그래도 그들 모두는 시신이 도난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급한 전갈을 듣고도 나와 보지도 않은 나머지 제자들은 그저 자신들도 잡혀갈까봐 겁이 나서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3. 현장과 카리스마와 제도, 그 긴장과 조화
성서 주석의 최고 권위는 사도들의 제자인 교부들입니다. 교부들이 주해해 놓은 가르침을 근거로 성서를 해석하는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이 본문이 후대의 교회를 위한 심오한 표지가 숨겨져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막달레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요, 요한은 이 현장 선교사들을 돕고 연대하는 사도직 교회의 카리스마를 대변하는 인물이고, 베드로는 이 현장교회들 모두를 아우르는 제도 교회의 권위를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현장의 위기를 감지하는 복음 감각과 이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사도직 교회의 카리스마 그리고 이 모두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제도 교회의 역량이 교회를 일치시키는 요소들인데, 이 세 가지 요소의 긴장과 조화를 당부하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사실 현장을 지키는 사도직은 언제나 복음적 가치의 위기를 제일 먼저 감지하는 복음선포의 최일선이고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의 울부짖음을 대변합니다. 이 외침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주체는 현장을 중시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사도직 교회입니다. 사도직 교회는 현장에서 복음 감각으로 알려준, 빈 무덤의 위기 상황에서 언제나 발빠르게 대처하는 카리스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원인과 대책을 수립하는 일에 있어서는 제도 교회를 기다려주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제도 교회는 전체 상황을 아우르고 나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다음 모두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책임감 있는 권위의 보유자입니다. 이렇게 해서 빈 무덤의 위기 체험은 제도 교회의 책임과 권위를 통해서 발현 체험이라는 기쁨과 희망의 체험으로 전환될 뿐만 아니라 이 체험이 교회 전체로 보편화되어 공유됩니다. 이 과정에서 현장과 사도직 교회, 그리고 제도 교회 사이에서 때로 긴장도 발생하지만 조화와 협력을 통해서 교회의 일치가 가능해집니다.
4. 우리의 경우
지금 우리가 시청 광장 한 구석에 차려진 빈소 앞에서 드리는 이 미사를 위해서도 막달레나의 현장 외침이 있어서 시작될 수 있었고, 요한의 카리스마 같은 현장 단체들 즉 ‘함께 걷는 예수의 길’, ‘예수살이 공동체’, ‘가톨릭평화공동체’,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에서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발빠르게 움직였던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부활대축일 미사를 빈소 앞에서 봉헌한다고 해도 우리 앞의 도전과 과제들은 하나도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향후 진상규명이나 명예회복 등 남은 과제들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현장 단체들의 도움과 연대는 절실히 필요할 것입니다. 현장 카리스마를 보유한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돕고 연대하기 위해서도 이 미사에 오신 신앙인들의 관심과 지지 그리고 응원이 반드시 필요할 터인데 이 미사가 그 연결 고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현장의 복음 감각과 사도직 교회의 카리스마와 제도 교회의 긴장과 조화를 거쳐서야 비로소 역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회적으로도 증거할 수 있다는 기본 메시지에 대해서만 다시 한 번 환기시켜 드리고, 베드로의 책임과 권위에 해당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이 미사에서 꺼내고 싶지는 않고 복음과 강론에 따라서 여러분이 스스로 유추해 보실 몫으로 남겨놓겠습니다.
첫댓글 사도요한 신부님,
알렐루야!
주님 부활대축일 축하합니다.
부활의 은총과 축복속에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이날 신부님께서도 시청앞 빈소에 함께 하셨군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