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 때 고려 말 충신 이색의 14대손 이사관 (1705 ~1776)은 서울정동에 살았다. 그는 승정원 동부승지를 끝으로 벼슬을 물러나고 어느날 고향인 충청도 한산을 가게 되었다.
예산근처에 이르렀을때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뜰 수 없었으며 추워서 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눈을 헤치며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어느 산모퉁이에서 다 헤진 갓에 초라한 모습의 한 선비가 안절부절하며 서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듯한 젊은 여인이 무언가를 끌어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사관이 다가가 보니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뉘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시오?” 물으니 선비가 “아내가 해산일이 가까워 처가에 가던중에 그만 여기서 몸을 풀었지 뭡니까. 이런 날씨에 일을 당하고 보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험한 날씨에 산모와 아기가 생명을 부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애타한다.
이사관은 “아이구! 저런! 큰일이구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양털 가죽옷을 벗어 아기와 산모에게 덮어주고 선비와 마을을 찾아 나섰다.
어느 마을에 도착하여 급한대로 방 한 칸을 빌려 집주인에게 돈을 주고 산모의 방에 군불을 뜨겁게 지피도록 하고 미역국을 끓여 산모의 허기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선비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하며 이사관의 손을 잡고 “노형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아내와 어린 것이 큰일을 당할 뻔 했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곤경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아무쪼록 가시는데까지 무 사히 가시구료.”
이사관이 길을 떠나려 하자 선비는 한사코 이름을 묻는다.
“정동에 사는 이사관이오.” 가난한 선비는 가슴속 깊이 그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가난한 선비는 몰락한 양반가 자손 충청도 면천의 김한구 (1723~1769)였다.
이 후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러 김한구는 여전히 가난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먼 친척인 아저씨뻘 되는 당시의 세도 재상 김흥경을 찿아 나선다.
김흥경은 김한구를 딱하게 여겨 이따금 쌀가마니를 도와 줘서 겨우 연명하며 생활을 견디면서 간혹 사랑방을 찾아 놀다 오곤 했다.
김흥경의 생일날 사랑방에는 찾아온 축하객들이 아침부터 북적였다. 대부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김한구도 한쪽 구석에 초라한 모습으로 끼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는 관상을 잘보는 유명한 문객도 있었는데, 문득 김흥경이 말한다.
“여보게 음식이 올 때까지 여기 계신 대감들의 신수나 보아 드리게.”
문객이 이사람 저사람 관상을 보아주었을 때 김흥경이 웃으며 말했다.
“여보게 저기 있는 김생원은 내 조카뻘되는 사람인데 관상을 한번 보아 주게나.”
문객은 김한구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큰절을 한다.
“생원님의 고생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좋은 일이 시작되어 곧 대단한 벼슬 운이 트일겁니다.”
그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아무리 사람 팔자는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보잘 것 없는 선비가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는것은 믿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나라의 과거를 보는 시기도 아니며, 과거에 갑자기 급제한다해도 미관말직에서 높은 지위를 부여받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조롱하며 웃음을 터트리자 문객은 정색을 한다.
“지금은 모두들 웃으시지만 조금만 두고 보십시오. 대감님들도 생원님께 절을 올려야 할겁니다.”
문객이 한 이 말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농담 정도로 생각하던 대신들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는데 김흥경이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마침 잔칫상이 들어와 분위기는 겨우 수습되었지만 김한구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음식도 못 얻어먹고 황급히 자리를 떠야 했다.
“에이 참! 재수가 없으려니...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를 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어 오랜만에 고기 구경좀 하려고 했는데 그놈 때문에 다 그르치고 말았네!”
투덜거리며 집에 와 보니 생각지도 않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년 들어 열여섯살인 딸이 왕비 간택에 뽑혀 대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아이가 눈 쏟아지던 길바닥에서 태어나 이사관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그 아기였다.
아이는 용모가 뛰어나고 총명하여 부잣집에 시집을 보내 덕을 좀 보려는 욕심도 있던 김한구였다.
영조는 당시 예순 다섯이나 정정했고 늘그막에 중전이던 정성황후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법도상 국모자리를 비워둘 수가 없어 영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간택령을 내리게 된 것이고 가난하지만 뼈있는 가문의 김한구 딸도 후보자 중 한명이 되었다.
간택일날 백 여명의 후보 규수들이 대궐로 모였고 영조가 친히 접견하여 그 중 1명을 선택한다.
김한구 딸의 미모에 혹한 영조가 그녀의 사주단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면천 태생 김선비의 여식 애비는 김한구, 본관은 경주, 조상은 효종 때 바른 말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한 김흥욱이란 말이지? 흠! 이만하면 문벌도 괜찮구나!” 결국 간택을 받게 되었다.
김한구는 문객의 예언대로 정일품 보국승록대부 오흥부원군의 작위를 받았고 신분이 하늘처럼 높아져 금위대장 병부까지 하며 아들과 아우도 벼슬을 얻었다.
오두막살이에서 고래 등 같은 집으로 옮겨 살게 되고 죽마저 끼니 때우는게 힘든 생활에서 초호화판 생활로 바뀌었다.
김한구는 잊지 않고 은인인 이사관을 찿아 중전에게 부탁 호조판서가 되었고 이어 영조 48년(1772년)에 우의정에 이어서 좌의정에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