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10.26 총성이 울립니다.
서울에 그렇게 봄이 찾아 왔습니다.
봄은 약동하는 계절이라
모든 만물이 땅속을 뚫고 나오기 시작하지만
그 모든 만물엔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봄을 타는 각각의 사람들이 움직임을 더 빠르게 하는 것이 봄이기도 합니다.
1026이후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게엄을 선포했습니다.
12월 7일 기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최규하는 대통령이 됩니다.
이후 그는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 논의를 금지한 긴급조치9호를 해제하고
헌법을 개정할 것을 약속했으며, 정치적 억압을 완화합니다.
그런데 1212쿠데타를 통해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등은
민주화 일정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1212이후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등은 정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하나씩 계획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봄이 그들에게 기지개를 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026으로 봄을 맞은 대학은 학내민주화투쟁에 집중합니다.
80년 새학기를 맞아 각 대학은 족벌사학에 대한 시위, 농성에 집중하다
4월 중순에 접어들어 병영집체훈련 문제가 전국적 이슈가 되자
각 대학은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전두환 등의 계획을 눈치 챈
일부 운동권에서 대자보를 통해 전두환의 음모를 게시하지만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던 차 80년 4월 14일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겸직 보도가 나오자 대학은 투쟁의 진로와 방법에 대해
노선토론을 진행하게 됩니다.
일부 대학에서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 중단, 노동3권 보장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5월 10일 서울대에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이 모여 '비상게엄 즉각 해제'와 '전두환 등 유신잔당 퇴진요구' 등을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항간에 유포된 '5월 봉기설'에서 쿠데타 명분을 찾으려는 신군부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 평화적 교내 시위만 전개하기로 합의합니다.
그러나 5월 13일 밤 일단의 학생들이 광화문 일대로 나서게 됩니다.
한편 정치권에선 79년 1월 9일 각 신문에서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을 보도하자 최규하 정부가 주도하는 개헌론에
반대하며 국회가 개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학생들과 노동계가 과격한 시위로 신군부에게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준다며 인내와 자제할 것을 요청합니다.
80년 5월 14일 서울지역 27개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이 모여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하기로 결의합니다.
14일 정오를 전후하여 서울지역 각 대학들은 교문을 박차고 "비상게엄 해제", "유신잔당 타도", "전두환은 물러나라", "언론자유 보장", "정부개헌 중단" 등을 외치며 서울역으로 수만명이 집결합니다.
15일 오후에는 20만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합니다. 지방에서도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돌연 서울대 학생회에서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고 통보합니다.
그들은 시민들의 적극적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대가 먼저 서울역을 빠져 나가자 다른 대학들도 속속 각 대학으로 복귀합니다.
5월 17일 전두환 등 신군부는 제주도까지 포함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각급 학교 휴교조치, 국회해산,
국보위설치 등을 최규하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최규하는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서울의 봄은 마감하게 됩니다.
결과론적 이야기이지만
당시 정치권에선 전두환 등이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전두환 등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지만
신구부와 충돌하면 너무 많은 희생이 발생할 것으로 생각 휘퇴했던 것 같습니다.
봄은 만물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만물엔 항상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탐욕이 강한 자들은 더 빨리 움직이고 권력욕이 강한 자들은 정의가 아닌 권력을 위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봄을 타고 있지만 상황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첫댓글 역사를 통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는 진리
당시에도 이원집정부제 개헌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