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蒼頡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에 대하여...
역사 기록에 의하면, 창힐은 옛날 황제(黃帝)시대의 좌사(左史)로, 창힐(倉頡) 또는 황힐(皇頡)이라고도 하며 사황(史皇)이라고 불렸습니다.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은 일찍이 선진(先秦)시대 제자백가의 저작에서 이미 여러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순자(荀子)』.『한비자(韓非子』.『여씨춘추(呂氏春秋)』 등에는 모두 창힐이 문자를 만든 것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동한(東漢)시기 허신(許愼)이 지은, 유사 이래 가장 먼저 문자와 서예문제를 다룬 전문서적인 『설문해자(說文解字)』도 역시 창힐이 문자를 만든 것에 대한 전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좌사 창힐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 자취를 보고 이치를 분간하여 서로 구별되고 다름을 알아 처음으로 서계를 만들었다.
黃帝之史蒼頡, 見鳥獸蹄迒之蹟, 知分理之可相別異也, 初造書契.
당나라 장회관(張懷瓘)의 『서단.권상.고문(書斷.卷上.古文)』에도 창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러러 별자리의 둥글고 굽은 형세를 보며, 굽어 거북이 무늬와 새 발자국 자취의 형상을 살펴 여러 아름다움을 두루 모아 합해 글자를 만들었으니, 이를 고문이라 한다.
仰觀奎星圓曲之勢, 俯察龜文鳥跡之象, 博采衆美, 合而爲字, 是曰古文.
실제로 고대의 문자 생성은 사회의 진화와 발전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들이 노동과 일상생활 그리고 오락 등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세상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자기의 이해와 상상을 더하여서, 상형(象形)과 지사(指事) 등의 사물을 기록하는 부호의 기초위에 회의(會意).형성(形聲).가차(假借).전주(轉注)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점차로 창조하고 진화 변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창힐은 당시 통치자의 사관(史官)이었기 때문에 부락의 중대한 사건을 수집하여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창힐은 백성들 사이에서 이미 만들어진 글자들을 전문적으로 수집할 수 있었고, 아울러 그는 이것을 정리하여 규범화, 통용화 시키고 나아가 널리 원류로서 전했기 때문에 창힐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각종 고고학 자료에 의하여 단언하면 문자는 결코 창힐 한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집, 정리하여 이것을 규범화, 통용화 시킨 역사적 공적은 또한 천추에 빛날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은 광범위하게 전해졌고 아울러 역사의 기록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창힐의 글자에 대해 원나라 정표(鄭杓)의 『연극.권일.지박편(衍極.卷一.至朴篇)』에서 유유정(劉有定)은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습니다.
이옹이 또한 창힐의 장서대를 갖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글씨를 얻었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진나라 이사가 그 글자를 인식하여 "위로 하늘에서 명을 받아 황제가 시작되고 왕이 갈마들었다."라고 했다. 한나라 손숙통은 12자를 인식했다.
北海亦有蒼頡藏書臺, 人得其書, 莫之能識, 秦李斯識其字曰, 上天作命, 皇辟迭王. 漢孫叔通識其十二字.
이 말은 매우 견강부회한 것으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퍼오면서도 불편하였던 마음/ 그러나 이런 글이 많이 필요합니다. 글쓰신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위에서 열(10)줄에 '書契'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퍼 온글이기 때문에 주석을 달지 않기로 하지만...서계를 설명드리자면, '書'는 東漢때 사용하던 글씨를 부르던 '글'의 이름이며, '契'는 한나라 이전의 문자를 부르는 이름입니다. '서계'를 '서글'이라고 하여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서계'라니요... 혹시 보셨는지 모릅니다만, '刻契'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만 모두가 후대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한 수단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