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으로 승진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바로 울산으로 발령이 났다.
유치원에 가기 싫어 울며 불며 떼를 쓰던 아들도 적응을 잘하고 있고
딸아이도 골목에 나가 제 또래들과 어울려 놀줄 알게 되었고,
텃밭에 배추는 김장을 해도 될만큼 잘 자라고 있었는데.
집을 구할 겨를도 없던 차에 울산과 고리 사이 남창이라는 동네에
한전 사택 한 채가 비어있으니 그곳에 살아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집은 넓었으며 약간 높은 지대에 있었으므로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었다. 온양면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이었는데 도로에 인접해
있어서 아이들이 걱정되기는 했다.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되는 지역이라
집보다는 빈터가 훨씬 많아 조금은 황량해 보이기는 했으나.
다행이었다. 돈이란 돈은 전부 그러모아 서울 언니네와 공동으로
일원동 재건축아파트 한 채에 들어부은 상태였으니 우리가 가진 돈은 없었다.
반듯하고 튼튼하게 벽돌로 지어진 집이라서 벽지와 바닥재만 새로 갈아도
새집처럼 변모될 집이었으나 절약이 우선이었다. 안방과 거실은 그런대로
쓸만했으니 그대로 쓰고 아이들방만 도배를 하였다. 전기세와 물세만 내면 되니
우리에게는 적격이었다. 그가 울산까지 삼십여분 차를 몰고 가야한다는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대운산'이 먼저 떠오른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높은 산이었는데
경치도 좋고 물도 맑았지만 춘란이 꽤나 많이 자생하고 있었다.
누구도 제재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욕심에 욕심을 내었다.
산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 큰언니 둘째언니까지
합세해서 춘란을 싹쓸이하 듯 캐왔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그는 딸아이를 옆구리에 끼고도 날듯이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만큼
춘란을 캐는데 신이 나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에 와서는 후회를 한다. 자연에 그대로 두고 봐야 할 식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산에서 제 종족을 충실히 번식시키며 살아야 할
생명이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둘 사람들 독한 숨소리에 짓눌려 죽어갔으니
말이다.그대로 두었다면 지금쯤 대운산은 춘란으로 뒤덮여 관광지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개발지역이었으므로 가게도 멀리있고 시장도 멀리 있었다. 그래봐야
십분 거리였지만 소소한 것이 필요할 때면 불편을 느끼는 거리였다.
그래서 장날이면 작은 손수레를 끌고 장을 보러 나서고는 했다.
시끌벅적하고 거칠게 살아가는 장 사람들 사이를 한참 돌아다니다 보면
내 삶이 얼마나 편하고 안락한지를 깨닫게 되기도 했고
사람 살아가는 냄새를 느낄 수 있었으니, 정체되어있는 내게 원동력이었다.
울산온천도 생각난다. 오분 거리에 있었고 그곳에서 수영강습이 있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어찌나 열심히 연습을 했던지, 체력이 부족한 나는
한달만에 감기와 몸살을 호되게 앓고 말았다. 기침이 심해서 그만두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수영을 하다보면 일차적으로 육체의 자유가 느껴진다.
이차적으로는 정신의 자유까지도 느껴진다.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있었으니.
초등학교 일학년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은 아들이 어느날 배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일시적인 아픔이려니 했는데 몇일이 지나도 여전하다하여
근처 병원에 갔더니 맹장염인듯 하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여덟살짜리가 맹장염!!
울산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당장 입원하란다. 맹장염이라고.
나는 당연히 아들 옆을 지켰다. 그가 출근하면서 딸아이를 병원으로
데려왔고 퇴근하면서 딸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각자 알아서
밥을 챙겨 먹어야 했다. 잠을 자다 깨어난 부스스한 머리를 제대로
묶지도 못하고 아빠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왔던 딸아이도 그렇고
아내가 챙겨주는 밥을 제때 먹지 못한 그도 그렇고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대충 끼니를 때우는 나도 그렇고 수술이 끝난 아들도 그렇고
일주일동안
우리 모두가 그리워한 것은 가족이 모여서 밥을 먹는 것. 아무일 없이
심심한 듯 지루한 듯 밥상에 둘러앉던 일상들이 뼈저리게 고맙고
감사한 일이라는 것.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는 것.
한동안 친하게 몰려다녔던 이웃들도 생각난다. 물국수를 순식간에 말아
우리를 흔쾌이 대접했던 그녀, 바쁘고 나이 차이가 많았던 남편과 살아
욕구불만이 많다며 자꾸 울산으로 나가 끼를 발산하고 오던 명랑한 그녀,
총각김치나 깍두기는 소금에 절이지 않고 바로 담가야 그 국물맛도 좋고
무의 씹힘이 아삭하다고 주장했던 그녀, 그리고 경제신문을 열심히 보면서
주식에 조금씩 재미를 보던 옆집 그녀, 살림은 전쟁이 지나간 집처럼 놔두고
피아노 교실을 운영하던 그녀.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일광에 들렸다가 고리에 들렸다가 다시 이곳 남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그 많던 빈터에는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우리가 살던 집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당시에 우리가 살던 집 뒤쪽에 있던 아파트, 동호대안이라는
한 동의 아파트만이 그곳임을 알려줄 뿐이다.
아쉽다. 헛헛해지지만 어쩌랴.
추억은 마음 안에 있는 것.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게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