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태백산맥'(조정래 작)은 1948년 여·순사건에서부터 6·25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질곡을 담아낸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그 읽는 재미와 함께 무수히 많은 토론의 장을 만들어냈다. '현대사 실종의 시대'라 할 만큼 치열했고 격랑이 심했던, 분단사 속에서 그만큼 왜곡과 굴절이 심했던 그 시대의 진실과 참모습을 얼마나 복원해냈나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잔디에서든 강의실에서든 혹은 작가와의 대화에서든 활발하게 얘기가 펼쳐졌었다.
출간된 지 15년이 지난 지금, 작가가 태백산맥의 허리를 잇기 위해 수없이 답사하고 증언을 들었을 소설속 역사의 현장을 가본다.
현부자집 태백산맥의 첫장면에 등장하는 현부자집. 정하섭이 숨어지내던 곳. 아직도 이층솟을 대문이 장관이다. 1930년대 목욕탕 한 개로 온 마을 사람들이 목욕을 하던 시절에 이미 목욕탕을 갖춘 으리으리한 집. 지금은 사람 기척이 없어진 지 8년이 넘어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도 위풍당당한 기세를 느낄 수 있다. 기와와 처마는 한옥의 틀을 갖췄으나 나머지는 일본식 건물이다. 대문앞에 있는 연못은 조금 넓혀 보수공사를 하였지만 연못 가운데 동산은 당시 그대로다. 보존차원에서 개보수하려는 노력은 있으나 사유재산이라서 어려움이 있다. '막핀 하얀 배꽃처럼 순결한' 소화. 그의 집터는 얼마전까지 토담의 일부와 장독 흔적들이 남아있었으나 이제는 정리되어 밭으로 사용하고 있는 까닭에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다.
중도방죽 현부자네 높은 마당에 서면 멀리 중도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길게 펼쳐져 있는 중도들판은 벌교 앞바다 10여리를 둑으로 막아 일군 눈물어린 간척농지다. 일본인 중도(中島 나카시마)의 이름을 따 붙인 중도방죽은 사람의 손으로 돌과 흙을 퍼날라 땅을 만들었지만 일제와 해방후 지주들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낼 수밖에 없었던 소작인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소설속에서 방죽 쌓던 때의 어렵고 골빠지게 힘들었던 일을 하대치의 아버지가 이야기 하는 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워따 말도 마시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 하자고 뫼들어 개 돼지 맹키로 천대 받아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쌓는 것을 질러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위찌 뻘밭에다 방죽쌓는 일 에 비하겄소 돌뎅이 지고 깔끄막(비탈) 올라댕기기도 심이 들겄지만 장딴지고 허벅지꺼정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돌짐지는 고초에야 비하겄소 ? 지금은 그 덕분에(?) 벌교의 3대평야에 들어간단다.
회정리 교회(대광교회) 큰소나무 한그루 옆에 석조예배당. 일제 침략기인 1935년에 건립된 60평의 석조 예배당이다. 15~16년 전부터 예배당으로 사용하지 않아 유리창도 깨지고 출입도 통제되어있다.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듯 이 예배당에는 남녀출입구가 서로 다르다. 문 위를 보면 '남출입구, 여출입구'라고 씌인 페인트 글씨가 지금도 희미하게 보인다. 소설에서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부상당한 안창민을 자애병원에서 간호하고 피신 하도록 도운 죄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석방된 뒤 학교를 그만둔 이지숙이 이곳에서 야학 교사로 일한 곳이다. 올해 안에 이곳을 무의탁노인 복지시설, 태백산맥 전시관 등으로 개보수해서 사용할 계획이다.
소화다리 벌교사람들에게는 가장 한이 많이 서려있는 곳. 여순사건(14연대 반란사건)의 회오리로부터 6 . 25 로 이어진 우리 민족의 비극을 고스란히 겪어낸 곳이기도 하다. 당시 벌교남교와 북교에서 처형이 결정된 사람들을 이 소화다리로 끌고 와 즉결 처형했던 '피의 다리'.
소설에서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보겄구만이라... 사람 죽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라는 표현으로 처참했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 아래 벌교천에서 고기잡이 하고 놀던 아이들의 그물에 사람 허벅지뼈가 걸려나오기도 했단다. 낮에는 토벌대, 밤에는 빨치산에 점령되었던 동족상잔의 생생한 그 현장이다. 지금은 인도로 사용하고 있으며 바로 옆에 나란히 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를 건축했다.
1931년 6월 (단기 4264년)에 건립된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서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일제의 강점기였던 소화6년에 건립 되었다하여 소화다리로 더 알려져 있다.
횡갯다리(홍교) 소설에서는 이곳에서 염상진, 하대치 등 빨치산들이 소작인들에게 설을 쇨 쌀을 쌓아뒀던 곳으로도 그려지고 있는 무지개형 다리. 현존하는 아치형 다리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으며 사실상 벌교의 상징.
지금은 원형이 세칸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다리 밑에서 쳐다보면 둥근 천장처럼 보인다. 그 한 복판에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을 뽑아 버리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도 같은 형태이다.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라 고기가 많고 바닷바람이 불어 모기가 없다. 한여름밤 벌교천에 비친 달의 풍경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예나 지금이나 벌교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다리다.
김범우집 대지 600평. 골목길 끝까지 둘러진 담의 규모가 놀라울 정도다. 밤이면 '귀신 나온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골목이 길고 무서워 마음대로 지나다니지도 못했단다. 머슴숙소며 목욕탕자리, 장꽝 등 모두가 처음 지어졌던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에 주춧돌 한 개에 사나흘씩 일일이 정으로 쪼아서 지은 집이란다. "쩌그에 몇만석이 쟁여져 있었다네. 집 비워진지 8년만에 우리가 왔는디 얼매나 풀이 자라있었는지 모르네. 풀을 3일이나 맸네. 일본놈들이 망한 게 이집도 망해분거제" 이집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는 집을 건사 못해서 험상굿다며 쑥스러워하신다.
공원(M1고지) 벌교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횡갯다리와 소화교만 막으면 벌교는 입출입이 막히는 곳. 그리서 심재모는 두곳을 막아두고 이 곳에서 벌교읍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작전을 세웠단다.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자신이 좋아하는 M1소총의 이름을 빌려 만든 고지이다. 조선시대 봉화가 있었던 장소이며 일제때는 신사가 있었던 장소. 이곳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부용산 오리길' 표지석이 놓여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부용산. 박기동 시인이 폐결핵으로 짧은 생애를 마친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지은 시에 월북 작곡가 안성현씨가 곡을 붙였다. 이념이나 사상과는 무관한 이 노래가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 입으로 입으로만 전해내려왔다.
염상구가 장터거리 주먹패의 오야붕 쟁탈전에서 깡패 '땅벌'과 철교의 중앙에 서서 기차가 가까이 올 때까지 누가 더 오래 버티다가 바다로 뛰어 내릴 수 있는 지 담력을 겨뤘던 철다리<사진>, 빨치산들이 인민재판을 하고 심재모-백남신-양효석으로 계엄사령관이 바뀔 때마다 열병식을 가져던 벌교남초등학교와 북초등학교, 과거 벌교금융협동조합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외관에서부터 일본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금융조합 건물, 청년단이 들어있었던 목욕탕건물, 자애병원 등등...
보존되어 있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 소설속 여러 공간들을 지나면서 "역사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인 것이다. 역사는 관념도 추상도 과거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뚜렷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크는 것이다. 솥뚜껑 같은 사람의 힘과 의지로 역사는 크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새삼 되새겼다.
부용산노래
부 용 산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 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 해 설
구전가요 「부용산」은 슬픈 가사에 애조 띤 가락이
잘 어우러지는 노래다. 지난 시절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고 하며, 전남 지역에서는 지금도
입에서 입에서 전해지며 맥이 이어지고 있다.
80년대에 는 대학생들 사이에도 꽤 널리 퍼졌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노래는 해방 직후 목포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 과 국어교사
박기동이 이 학교에 다니다가 요절한 여학생의 상여
나가는 소리로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사는 그보다 몇 해 전 박교사가
전남 벌교에서 그 역시 일찍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고자 쓴 것이다. 최근에 1절이 지어진지
52년만에 2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벌교인들의 마음속에 가슴절이며 애절하게 불리워졌고,
호남인들의 마음속 아름다운 전설 처럼 입에서 입으로
불리워 졌으며 "엄마야 누나야" 작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노래의 작곡가 안성현씨가 가족을 데리고 월북 한뒤
부터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이 념이나
사상과 무관한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되었던
"부용산 오리길"로 시작된 부용산 노래가 벌교인 들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왔습니다.
이 노래는 일본관서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박기동 시인이 꽃같이 사랑스럽고 짧은 생애를
마친 누이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애닯은 심정을 시로 쓴 것입니다.
이 노래의 주인공 이름은 박영애 이며
벌교 선근교 부근에서 여산한약방을 운영하신
부친 박준태씨의 3남 3녀중 2녀였으며
나이 18세(1941)때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몸이 허약한 누이동생은 자식을 낳지 못한체
24세의 꽃같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순천도립병원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 하였습니다.
박기동시인은 누이동생의 짧은생애가
애달퍼 벌교사람들이 '절산'이라 부르는 부용산 자락에
누이를 묻고 돌아오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는 누이동생이 안스러워
가슴을 저미며 이 시를 쓴 것이며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표현은 여동생이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을 낳지못하고
고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 하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박기동 시인이 1948년 목포 항도여중 국어교사로
재직중, 문학도였던 제자 김정희(항도여중 3학년)양이
폐결핵으로 죽었다 합니다.
여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때,
음악교사였던 안성현 선생께서 박기동선생이
써놓은 부용산 시를 보고 여기에 곡을 붙여
"부용산 노래가 완성되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