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눅10:27)
예수의 반문에 대한 율법교사의 대답입니다. 율법교사는 모세오경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에 관한 계명쯤 얼마든지 읊을 수 있고, 구약성경의 핵심사상을 정확하게 축약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명기와 레위기를 적절하게 인용하고 간추려서 영생에 이르는 계명을 예수에게 알려줍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율법교사가 예수를 막상 만나보니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예수에 관한 소문은 과장되어 보였습니다. 율법교사 자신보다 예수가 훨씬 못해 보입니다. 그래서 습관대로 예수를 잘 가르쳐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적절한 질문을 찾았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10:29)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고 묻는 것일까요? 이웃은 어려운 철학용어도 아니고, 새로운 물리법칙도 아닙니다. 일상 속에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웃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그냥 다 압니다. 율법 교사에게 이웃은 ‘동포’ 혹은 ‘동지’입니다. 문맥상으로도 그렇습니다. 예수가 이것을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일종의 사상검증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갈릴리 벽촌 사람이고, 이집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소문도 있어서, 주류 유대인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주류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제한된 일부 사람들입니다. 동족, 동포가 이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질문은 당신 예수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 겁니다. 이웃이란 내 편이어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인 겁니다. 율법교사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동의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도와주시는 분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도 율법교사와 생각이 같습니다. 내 편을 삼고 싶은 사람과 이웃하고 싶습니다. 나를 도와줄만한 사람을 이웃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동족, 동포들과 이웃하며 살고 싶습니다.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이웃이 되라’고 답하십니다.(눅10:36~37) 동족이 되라는 것입니다. 동포가 되라는 것입니다.
렘브란트, '선한 사마리아 사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을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삼아 이웃의 전범으로 소개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나그네를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하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사마리아 사람이 동포요 동족이라는 것입니다.(눅10:34) ‘이웃이 누구’인지 그 개념을 정의하고 체계적으로 알려주려는 율법교사에게 예수는 ‘이웃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앎’에 집착하는 자에게 ‘알음답기’를 요청하신 겁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알음답다’에서 온 말이지요. 이웃이 되는 것이 이웃의 개념을 아는 것이요, ‘알음다운’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타고난 외모와 빛나는 장신구로 치장한 사람이 아니라, 뜻을 알고 아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알음다운 사람입니다.
현실 속 사마리아 사람은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자비를 베푼 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나그네 예수를 접대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눅9:53) 예수는 자기를 거절했던 사마리아 사람을 참된 이웃의 모범으로 소개하십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를 대접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사마리아 사람을 대접하십니다.(마5:12) 예수는 원수를 갚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십니다.(레19:18)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대로 원수를 사랑하십니다.(마5:44) 이것이 예수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미학美學입니다.
이웃이 되는 것은 악한에게도 햇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사람은 원수라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육신 속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비로소 돌출된 사람이, 이웃입니다. 육신의 욕심과 한계에 갇혀 있던 사람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날 때 이웃이 됩니다.(요3:3) 이웃이 되어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의 영생이 시작됩니다.(눅10:25) 이웃이 되면서부터, 사람은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누리길 시작합니다. 이웃이 되어 영생을 사는 그가 아름답습니다. 내 포도주와 기름과 여비를 강도 만난 자와 나눌 때, 나는 아름답습니다.
사실, 오래전에 나는 이 미학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알음답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