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차 산이모 정기산행 안내
옛부터 천혜의 요새였던
그러나 오욕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각종 문화재가 산재하여 역사 배움터로도 각광 받고 있는
100대 명산 남한산 성곽길로 초대합니다...^^*
댓글로 신청바랍니다...
1. 산 행 일 : 2013년 9월 15일 (일)
2. 산 행 지 : 남한산성 (해발 522m, 서울, 경기 성남, 하남, 광주)
3. 트레킹 코스 (원점회귀, 7.7km, 100분 소요 예상이나 널널하게 4시간)
남한산성 역사관 (산성로타리) - 동문 - 동장대터 - 북문 - 서문 - 수어장대 - 남문 - 동문 - 산성로타리 주차장
4. 차량이동시간 : 3시간 10분 예상 (편도 292.2km)
5. 차량출발 및 시간 (※ 출발시간 절대 엄수 바람) 출발시간 ☆ 7시 30분☆
염주체육관(07:00) ~ 시청 정문(07:12) ~ 비엔날레 주차장(07:25)
(주요일정)
ㅇ 07 : 30 ▶ 비엔날레 주차장 출발
ㅇ 10 : 40 ▶ 산행지 도착 및 산행 시작 (남한산성 역사관 주차장)
ㅇ 12 : 00 ▶ 점심식사
ㅇ 15 : 00 ▶ 탐방 완료
ㅇ 16 : 40 ▶ 목욕 및 뒤풀이
ㅇ 20 : 00 ▶ 광주 도착 예정
☞ 상기 일정은 보수적으로 추정한 것이므로 실제 상황과 차이가 날 수 있으며,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6. 회비 : 35,000원 (목욕, 뒤풀이 등 각종 공통비용 포함)
7. 준비물 : 기본 등산복장, 중식, 식수, 간식, 비상약, 여벌옷, 스틱 등...
(임원단 등 연락처)
회장 : 양승복(010-8033-7048), 총무 : 박관수(010-2202-8872)
등반대장 : 김영호(010-2693-1967)
산행리더 : 이경수(010-3616-5291) / 양선태(016-609-4500)
버스기사 : 정성조(011-604-6509) ▷ 광남고속관광
☞ 산행 신청 및 예약은 댓글로 신청하여 주십시오. (승차 장소 부기)
☞ 산행 예약을 부득이 취소를 하실 분은 목요일까지는 댓글이나 전화로 연락바랍니다. 집결 시간은 반드시 지켜주시고 혹여 늦을 경우에는 최종 집결지 비엔날레로 오십시오.
☞ 산이모 산악회는 산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산을 동경하고 사랑합니다.
집행부는 산행지 선정과 적정한 코스를 안내만 할뿐 산행 중 개인의 부주의로 일어나는
제반 사고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므로 항상 안전사고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고혈압, 심장질환 등 질병이 있으신 분은 무리한 산행은 절대 금물입니다.
산행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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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 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9.05km, 높이는 7.3 m이다.
원래 2천여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왕 때 쌓은 토성이었으나, 이를 신라 문무왕 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그 옛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8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상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을 이때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만 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곽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된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사당, 숭렬전,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 중 4대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등산을 겸한 봄, 가을의 관광은 성남시를 거치는 남문코스가 좋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끼고 있는 동문 코스가 좋다.
▶사적 제 57호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인조때 쌓은 산성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중의 하나로 신라문무왕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에 축성하였다.
남한지의 기록에 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 서가 총융사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26년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들이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했고 인조때부터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간반 하궐 154간이었다. 재덕당은 1688년에 세워졌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천이 세워졌다. 그리고 사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워졌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은 1829년에 수리되었다. 관아로서는 좌승당,일장각,수어청,제승헌등이 군사기관으로서는 비장청,교련관청,기패관청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마랑,뇌옥,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서낭당, 여단등이 들어서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으로서의 불도의 힘은 대단히 컸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는 승려 각성의 도총성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 한흥,국청,장경,천주,동림,남단의 7사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있다.
남한산성의 수리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라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현재는 서장대 하나만이 남아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간, 측면 3간이고, 위층은 정면 3간,측면2간이다. 지붕은 팔짝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있다.
성문은 홍예문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 문루를 올려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 이시백이 축성후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를 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하였으니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주요문화재 1) 남한산성(성곽) : 국가사적 제 57호 2) 수어장대 : 도유형문화재 제 1호. 산성 축성 당시 동서남북에 세워진 4개 의장대 중 으뜸가는 장대이며 또한 유일하게 남은 장대이다. 성곽을 따라 멀리 내다보며 적을 감시하고 주변을 살피기 위해 세원진 목조건물 2층 집이다. 3) 숭열전 : 도유형문화재 제 2호.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모시는 사당으로 정조 19년(1795)에 숭렬전이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4) 청량당 : 도유형문화재 제 3호. 남한산성 축성때 모락을 받고 죽은 이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5) 현절사 : 도유형문화재 제 4호. 병자호란 때 청에 끝까지 항복을 반대한 삼학사,홍익한.윤집.오달제의 넋과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6) 장경사 : 도문화재자료 제 15호. 남한산성 축성과 유지, 보수를 위해 산성내에 두었던 9개의 사찰 중 하나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절이다. 7) 침괘정 : 도유형문화재 제 5호. 8) 연무관 : 도유형문화재 제 6호 9) 지수당 : 도유형문화재 제 14호 10) 망월사 : 도기념물 제 111호 11) 개원사 : 도기념물 제 119호
*** 병자호란 ***
1.병자호란의 원인
여진족은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누르하치가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여진 여러부족을 통합하고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합니다
조선은 광해군 때까지는 후금과 중립 외교 정책을 펴며 전쟁을 피할 수 있었으나 후금 세력이 점차 강해져,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후금의 요구에 의해 형제의 관계을 맺습니다.
후금은 1636년 4월에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태종 홍타이지가 스스로 황제라 칭했으며 형제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조정하고 조선의 왕자를 볼모로 청에 보내라는 통보를 했고, 11월 왕자대신 척화를 주장하는 신하들를 압송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지만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자 그해 12월 바로 조선침공을 개시합니다.
2.병자호란의 과정
1636년 12월 청 태종은 직접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친정을 합니다
조선에서는 의주부윤 임경업이 주력군으로 백마산성에서 적을 맞았으나 청군의 선봉은 그곳을 피하여 한양으로 기습공격을 합니다.
조선 조정은 적의 기습에 당황하던 중, 12월 14일에 적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빈 강씨와 원손 그리고 봉림대군 등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켰습니다. 또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한양을 지키게 하고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향했으나 청군이 이미 홍제원에 도달해 길을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군사는 1만 3천이었고 군량은 50일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청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다음해 1월 1일에는 청 태종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직접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며 주화파와 척화파가 대립하던 조선조정은 강화도가 함락되어 세자와 봉림대군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기가 꺽이게 되어 주화파인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어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됩니다 .
3.병자호란의 결과
전쟁중에는 최명길로 대표되는 화친주장의 주화파와 김상현으로 대표되는 결사항전주장의 척화파가 격렬히 대립했으나 강화도 함락을 계기로 결국 1월 30일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되고 조선은 명을 섬겼듯이 청을 군신관계로 섬기며 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여러 신하와 백성들을 볼모로 청에 보내게 됩니다.
또한 청과 명이 전쟁 할 경우 청에 군사와 물자를 공급하기로 약속을 하게 되는 등 청의 완전한 속국이 되는 결과를 가져 오며 청은 명의 배후세력인 조선을 완전 속국으로 만듦으로서 명과의 대륙통일전쟁에 집중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로 결국 명을 점령하고 중국을 260년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은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분석하지 못하고 대명의리라 하는 명분론에만 집착한 결과로 구한말의 상황과 많은 유사한 점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4.삼전도의 굴욕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0여일간 치열한 전투를벌이게 되지만 1637년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어 세자와 봉림대군이 포로가 되자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게 되어 결국 화친을 하자는 최명길의 주장을 가납한 인조가 서울 송파나루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신하의 의복을 입고 삼배구고두례라 하여 세번 절을 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의식을 치르며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합니다. 청태종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삼전도비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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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지 개념도
▶ 산행지 사진 (빌려옴)
좌석배치도
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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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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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재무 |
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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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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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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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등반대장 |
06 |
총무 |
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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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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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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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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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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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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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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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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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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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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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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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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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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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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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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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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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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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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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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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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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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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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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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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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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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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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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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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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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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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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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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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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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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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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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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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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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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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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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 : 닉네임 또는 실명 / 하단 : 버스 승차 장소 (염주, 시청, 비엔)
1~8번 좌석 : 지정석입니다...^^
확인 시점 까지 ( 명) 함께 하십니다....^^
(대기 신청자 명단)
운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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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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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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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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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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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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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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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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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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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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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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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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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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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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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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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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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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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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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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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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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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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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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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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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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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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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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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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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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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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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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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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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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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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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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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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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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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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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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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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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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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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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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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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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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을 하다 보면 1년 중 크게 3번 정도 회원들의 참석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 한식을 전후로 시제 모신다고 한 번, 여름휴가 기간 중, 그리고 한가위 전 벌초 기간으로 생각됩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조상님들 모시는데 시간 투자를 많이 하는 것 같아 울 회원님들 복도 많이 받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올 해는 아직까지 전반적인 영향은 없는 듯 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앞서는 한편,,
이 번 산행은 가볍게 문화산책을 겸한 역사 현장을 체험하는 테마산행으로 잡았으니
회원님들 일정 등을 형편에 맞게 조율하시어 함께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깊은 생각 회원님들 베려하시는 대장님의 수고에 큰를 보냅니다^^
저도 역사 공부하려 갑니다
이건 내가 갈께요!
느낌 아니까~!!!ㅎㅎ
부득이 남한산성 역사탐방 산행 계획을 취소합니다.
산행 공지 이후 13일 경과한 확인일 현재까지 315명 조회하였으나 신청하신 분이 2명입니다.
아마도 한가위 직전 휴일이면서도 벌초 시즌이 겹쳐 호응도가 낮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번 산행은 광주에서 가깝고 산행도 짧게 마칠 수 있는 곳으로 수정하여 게시할 예정이니
넓은 마음으로 혜량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아쉽고,,,,
이미 신청하신 두 분 회원님에게는 정말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ㅡㅜ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