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옆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에 신경이 쓰일 때가 있다.
아무 때나 그런 것이 아니고 그들의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끌 만한 뭔가가 있을 때인데
그런 이야기는 희한하게도 내가 책을 읽을 때나 신문을 읽을 때 잠깐 마음을 놓고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
전광석화처럼 내 귀에 꽂혀 들어 온다.
방심한 그 틈을 타고 들어오는 단어 하나에 꽂히면 들어야겠다고 작심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낚시바늘에 코 꿴듯 마음이 쏠려 들어간다.
그렇게 끌려 들어가면 하든 일을 멈추고
아니 엿듣는 나를 들킬까 오히려 하든 일에 더 열중하는 척 하면서
이어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온 몸의 세포가 다 곤두선다.
이야기는 엿듣는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다는 말도 있다.
엿듣는 말이 가장 재미있다면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는 상대방이 말을 하나 들리지 않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는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핸드폰 통화하는 사람을 가장 교양없고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명분이야 공공질서를 어기면서 공공의 장소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로 떠드는 행위라 몰아부치지만
그 이면에는 전화 저 편에서 말하는 상대방의 대화를 듣지 못해 성질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쪽의 이야기만 들리고 상대방의 말은 들리지 않으니 그 대화의 한 쪽을 제가 구성해야 하는 불편함이 엿듣는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화의 한 상대자가 없다는 것 그렇다고 연극의 독백이나 방백처럼 수미일관 이야기의 완결성이 있는 것도 아닌
반 쪽 뿐인 그래서 그 나머지 반 쪽을 자신이 구성해야 하는 불편과 정신적 노동을 하게끔 만드는 행위는 분명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것 그것이 소리라면 바로 소음일 수 밖에 없고 소음은 그 자체로 사람을 짜증나게 할 뿐이다.
퇴근 길 환승역인 신도림역을 한 정거장 남겨 놓고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말이 갑자기 내 귀를 울린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 하나"
엥 무슨 사연이 있길래 집에서 져녁 먹는 것을 직장동료에게 물어볼까?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서 있다.
"왜 집에 무슨 일 있어"
"장모님이 와 계셔, 아내가 아파서 누워있거든
아내가 아프니 차려 달랄 수도 없고 장모님 와 계신데 내가 차려 먹기도 그렇고"
말을 받는 상대방도 난감한 문젠지 아니면 그런 경우를 당해보질 못해선지-내가 보기에는 비혼인 남자같은데- 별 다른 대꾸가 없다.
별다른 대꾸가 없으니 질문을 한 남자는 말을 이어서 혼자 질문하고 답하는 형국이 되었는데
"부천에 가서 잘까"
"......................."
"햄버거나 이런 것 하나 사먹고 가"
"요즘은 포장마차가 너무 없어. 그런 곳에서 먹고 들어가면 될 텐데"
두 남자의 말을 듣다보니 끼어들어 한 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기는데 엿듣는 체면에 그럴 수도 없고......
그 사이 지하철은 신도림역에 도착했다.
고민할 것도 아닌 일에 주제로 대화하는 두 남자를 보니 세상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부인과 장모 사이에 끼어 있는 모습이 꼭 시어머니와 부인 사이에 끼어 있는 남자의 모습이 중첩되고,
장모와 어머니로 대표되는 구세대의 가치와 신세대의 가치가 한 남자의 내부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세월의 변화의 한가운데 서있는 남자의 모습을 본 것 같다.
그런 장면이 싫어 아예 집을 안들어가고 본가에 가겠다고 생각하는 모습에서 퇴행-이런 것을 보면 아직 햇병아리 신혼같기도 하고-하는 남자의 유약함도 보이고
햄버가 하나 사먹고 들어가라는 동료의 조언도 우습지만 그 조언에 담긴 뜻(일단 배고픔을 면하고 들어가 어떻게 하나 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을 새기먼 살아남기 위한 처절함도 보인다.
2010.3.31 서울 지하철 2호선에서
첫댓글 늘 먹는 밥에 얽힌 애환이로군요. 이 문제의 원인을 뭐로 봐얄까? 당당하게 밥 달라고 요구하지 못하는 사내의 나약함인가, 아니면 사내를 그렇게 만든 여자의 문제인가,남자 스스로 밥차려 먹는 행위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주변인들의 태도가 문제인가,그걸 문제라 생각하는 그 남자가 문제인가..생각하려니 머리가 아플라하네요.ㅎㅎㅎ
굉장히 복합적이죠.....어렵더라구요 ㅎㅎㅎ
그래도 남자들은 좋겠다. 장모가 와 있어도 집에 안 들어가도 되고... 여자들이라면 시어머니가 오셨다고 어딜? 꼼짝없이 일찍들어가 밥 차려야지. 아닌가?
들어 갔을 껄요.........말만 그렇지............아직은 여자가 더 힘들긴 하죠
"장모님 와 계신데 내가 차려 먹기도 그렇고"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가네요. '아내 대신 장모님이 차려주셨음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게 되긴 힘들겠다'란 의미인지, 장모님이 엄격하셔서 아파서 누워있는 딸을 일으켜서 '남편 밥은 차려줘야지!'하실 것이 뻔하기에 그 과정을 겪기 싫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본인이 손수 밥상을 차려야 하는데 음식 솜씨가 좋지 않아 함께 드실 장모님께 송구스럽단 뜻인지...갈수록 이해력이 떨어지네요...ㅜㅜ
그냥 대강 생각하세요......부인한테 피해 안줄려고 노력하는 마음만 보시길
낳아 주신 엄마같으면 '엄마, 밥!'하고 한끼 얻어 먹거나 바쁘니까 니가 채려먹으라는 소리에 군지렁거리며 채려 먹을수도 있지만 장모님과는 좀 예를 갖추어야 하는 거리감이 있다는 말 아닐까요?
딸아이 퇴원하고 다다음날, 과로로 본인도 쓰러졌는데(?) 같이 사는 남자에게 아침 밥을 줘야겠기에 힘들게 일어나 선지국을 한냄비 퍼담아 끓여놓고(딸아이꺼까지) 들어왔더니, 이 남자는 혼자서 쏠랑 다 먹어치우고 출근하더이다. 같이 사는 남자만 그런건가 아님 다른 남자도 그런건가 아픈 사람 생각은 전혀 못해요.
너무 맛있게 끓인 하늘빛님이 잘못입니다. 딸래미는 아직 못 먹을줄 알았나봅니다. ㅎㅎㅎㅎ
많이끓여 놓으시지..하늘빛님꺼까지... ...또 쬐금 드시고 나가면 아픈사람성의 무시한다고 속 끓일것같군여...ㅎ
무지 서운하셨겠어요. 남편 붙잡고 좀 물어보시지 그랬어요. 저도 예전 같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삐져있지 않고 남편이랑 한바탕 해요. 나도 이해해야하고 남편도 해명할 기회를 주어야 다음에 또 그런일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효과도 기대하고요..
정작 남자들 이야기보다 엿듣는 청한님이 그려집니다. "전화 저 편에서 말하는 상대방의 대화를 듣지 못해 성질부리는 것일 수도 있다." 라는 것도ㅋ 여기서 사람의 셩향이 나오는군요. 엿듣고 싶어하는 욕망이 강한 사람은 대부분 관계지향적인 사람이고. 다만 시끄럽고 조용했으면 하는 사람은 일을 해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죠.ㅋ
이야기 즉 서사가 완결성이 있으면 소리가 대화가 되고 그러면 소음이 아니라는 점이 핸드폰 통화와 대화의 차이겠죠,,,,대화도 대화 나름 완결성과 재미가 떨어지면 즉 흡인력이 없으면 소음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겠고............듣는 사람의 관심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소음일 수도 이야기일 수도 다 다른 점에서 엿듣는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필이 꽂히느냐가 더 중요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