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역사 세기 6,7,8』 「고구려」
○ 해동의 여러 오랑캐와 구려(駒驪)의 족속들이 무왕(武王)이 상(商)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 《상서전(尙書傳)》
“공안국(孔安國)이 《서전》 ‘뇌숙신지명(賄肅愼之命)’의 주(注)에서 이르기를, ‘해동의 구려(駒驪)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들이 무왕이 상을 이기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
성주(成周)의 회합에서 북방대(北方臺)는 정동쪽의 고이(高夷)로 겸양(嗛羊)이었다. 《급총주서》고이(高夷)는 동북쪽의 오랑캐로 고구려(高句驪)이다. 《급총주서주》
9월에 고구려가 위나라로 연왕을 잡아 보내지 않으면서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풍홍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위나라 임금이 고구려 왕이 조명(詔命)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치기로 의논하고, 농우(隴右)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다.(왜 요동을 치는데 롱우의 기병을?)(樂平王) 비(丕)가 말하기를, “화룡(和龍)이 새로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농사와 누에치기를 장려하여 군비를 풍부히 한 뒤에 나아가 취하면 고구려를 일거에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위나라 임금이 출병을 중지하였다. 《자치통감》
○ 위 태화(太和) 15년에 장수왕 79년 고구려 왕 고련이 죽었는데, 나이가 1백여 세였다. 고조가 동쪽 교외에서 거애(擧哀)하였다. 《자치통감》에, “위나라 임금이 장수왕을 위하여 소식(素食)을 하고 현관(玄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거애하였다.” 하였다. 그러고는 알자복야(謁者僕射) 이안상(李安上)을 파견하여 책명(策命)으로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또 대홍려(大鴻臚)를 파견하여 고련의 손자 고운(高雲)에게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31자을 제수하고, 의관(衣冠), 복물(服物), 거기(車旗) 등의 장식을 내려 주었다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시경》에 ‘술병이 비는 것은 오로지 술동이의 부끄러움이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지난날 공물을 빠뜨린 것은 그 책임이 오로지 연수(連帥)에게 있다. 경은 마땅히 짐의 전지를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서, 위압하고 회유하는 방도를 잘 써서 못된 무리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동쪽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두 읍(邑)으로 하여금 다시 옛 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그 지방의 토산물을 상공(常貢)에서 빠뜨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후위서》
○ 위나라 효명제(孝明帝) 희평(煕平) 원년에 문자왕 25년 유유(蠕蠕)의 임금 배노(配奴)가 용병을 잘하여 서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해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드디어 그 강역이 넓어져서 동쪽으로는 옛 조선 땅의 서쪽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건너서 한해(瀚海)에까지 다달았고, 남쪽으로는 대적(大磧)에까지 이르렀다. 《문헌통고》
○ 신귀(神龜) 2년에 문자왕 28년 고운(高雲)이 죽었다.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거애(擧哀)하였고, 사신을 보내어 책명을 내려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21자추증하고, 또 그의 아들인 세자 고안(高安)을 안동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20자 책봉하였다. 《후위서》
○ 대업(大業) 3년 영양왕 18년 8월에 수나라 황제의 거가(車駕)가 유림(楡林)을 출발하여 돌궐의 가한(可汗) 계민(啓民)의 장막(帳幕)에 행차하였다. 이때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먼저 돌궐과 통하였는데, 계민이 감히 이를 숨기지 못하고 사신을 데리고 함께 가서 수나라 임금을 만났다. 배구(裴矩)가 이를 인하여 수나라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땅으로,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에게 봉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세 군(郡)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나라에서도 역시 요동에서 통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이역(異域)이 되었습니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ㆍ장잠(長岑)ㆍ명해(溟海)ㆍ개마(蓋馬)ㆍ건안(建安)ㆍ남소(南蘇)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부여(扶餘)ㆍ조선(朝鮮)ㆍ옥저(沃沮)ㆍ낙랑(樂浪) 등 도(道)로 나오고, 양제가 여러 군이 진격할 길을 지시하면서 한나라의 옛 현명(縣名)을 썼는데, 《한지(漢志)》를 보면, 누방ㆍ장잠ㆍ조선현은 낙랑군에 속하였고, 개마는 현도군에 속하여 개마대산(蓋馬大山)과 요동(遼東)이라는 한나라 군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명해는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해명현(海冥縣)이고, 건안, 남소, 부여는 모두 고구려에서 성을 쌓아 지키던 곳이며, 옥저 역시 옛 지명인데, 이때에는 그 지역이 이미 신라의 경계 안으로 속하여 있었다. 우(右) 12군은 점제(黏蟬)ㆍ함자(含資)ㆍ혼미(渾瀰)ㆍ임둔(臨屯)ㆍ후성(侯城)ㆍ제해(提奚)ㆍ답돈(蹋頓)ㆍ숙신(肅愼)ㆍ갈석(碣石)ㆍ동이(東暆)ㆍ대방(帶方)ㆍ양평(襄平) 등 도로 나왔는데, 《한지》를 보면, 점제ㆍ함자ㆍ혼미ㆍ제해ㆍ동이ㆍ대방 등의 현은 낙랑군에 속하고, 후성ㆍ양평은 요동군에 속하고, 임둔 역시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한 군의 이름이며, 답돈은 바로 한나라의 요서(遼西)로 오환 답돈(烏丸蹋頓)이 사는 곳이며, 숙신은 옛날 숙신씨의 나라로 그 지역에 이때에는 말갈(靺鞨)이 살고 있었으며, 갈석은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갈석이다. 두우(杜佑)는 이 갈석이 고구려에 있다고 여겨 “갈석산(碣石山)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나라 장성(長城)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을 살펴보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횡단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터가 아직도 있다.” 하였다. 각군(各軍)이 잇달아서 길을 따라 나와 평양에 총집결하였다. 군사가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 만이라 호하였고, 군량을 운반하는 자는 군사 수의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桑乾水) 가에서 의사(宜社)하였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께 제사 지내었으며, 계성(薊城)의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내었다
태종이 고건무가 죽었다고 듣고는 거애(擧哀)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해 조제(弔祭)를 지냈다. 《구당서》
○ 10월 계묘에 옹주(雍州)의 부로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황제가 이르기를,
“요동의 몇몇 성은 중국의 옛 땅이며, 고구려의 막리지가 이리와 같은 야심으로 제 임금을 시해하였다. 짐이 고구려를 보존해 주고 고구려의 백성들을 위로해 주고자 한다. 이에 장차 낙양(洛陽)으로 가 경략(經畧)에 나서서(洛陽이 고구려 平壤城?필자생각) 삼한 지역을 안정시키고 한두 해 뒤에는 돌아올 것이기에, 부로들을 불러서 이별하는 것이다. 출정에 따라가는 아들과 손자들은 짐이 잘 돌보아 줄 것이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책부원귀》
장검(張儉) 등이 요수(遼水)가 넘쳐서 오랫동안 건너지 못하고 있자, 황제가 겁을 내어 건너지 않고 있는 것이라 여겨,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장검이 낙양에 이르러서 산천(山川)의 험하고 평이한 것과 수초(水草)의 좋고 나쁨을 모두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자치통감》
장사귀(張士貴)ㆍ장검(張儉)ㆍ집실사력(執失思力)ㆍ계필하력(契苾何力)ㆍ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ㆍ강덕본(姜德本)ㆍ국지성(麴智盛)ㆍ오흑달(吳黑闥)을 모두 행군총관으로 삼아 이세적에게 속하게 한 다음, 보기(步騎) 6만 명 및 난주(蘭州)ㆍ하주(河州) 두 주의 항복한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아가 두 군(軍)이 합세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경자에 제군이 유주(幽州)에 모두 모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부 소감(少部少監) 구행엄(邱行淹)을 보내어 먼저 공인(工人)들을 독촉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원근에서 응모하는 용사(勇士)와 성을 공격하는 기계(器械)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황제가 몸소 손익을 따져 편리하고 좋은 것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이때 고구려에 나이가 많고 매사에 익숙한 대로(對盧)가 있었는데, 설거정(薛居正)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관직 가운데 높은 자를 대대로(大對盧)라 하는데, 1품직으로 국사를 총괄한다.” 하였다. 그가 고연수에게 말하기를,
“진왕(秦王)은 안으로 군웅(群雄)을 베어 없애고, 밖으로 이적(夷狄)들을 굴복시켜 홀로 황제가 되어 우뚝 섰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뛰어난 인물이다. 지금 중국의 모든 군사를 몰아 왔으니, 맞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생각 같아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은 채 오래도록 날짜를 끌면서 기병(奇兵)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돌아갈 길이 없어서, 곧 이길 수 있을 것이다.”-해동역사
첫댓글 요서에 오환이 살았군요. 요동, 요서를 가르는 강의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요? 그리고 비옥한 땅에 온난한 기후에 물이 풍부한 중국의 위치는 어디인지 정말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