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야 !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
지금 쯤 넌
절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있겠구나
사위까지 본 너의 기도는 다른 해보다 더 간절할 듯하다.
난 지난 - 4둴 25 ~ 26 일까지- 내가 공부하고 있는
' 원예치료'에서 체험학습으로 충청도에 위치한
세계꽃식물원 - 고운 식물원 - 청양고추랜드- 캄 카밀레- 천리포수목원을 다녀왔단다.
넌 늘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의 동생이니
흙의 혜택을 넘 잘 알고 있을테고 식물 박사인
네게 어설프게 식물 자랑을 하느니
내가 가장 감명을 받은 곳 '천리원 수목원 '
그 중에서도 민병갈 원장님에 대해 소개코저 한다.
그곳은 지금 한창 꽃 박람회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안면도에서 한 10 분이면 도착되는 곳이고
천리포 해수욕장 바로 옆이란다.
1945 년 9 월 8 일 연합군 미군 장교 - 해군통역관 중위- 신분으로 우리나라로 오게 된
펜실베니아 출신 젊은 청년은
우리 산하와 우리 풍물에 반해서
고국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을 잊지 못해
1946 년 정책고문관이라는 민간인 신분으로
다시 한국에 나와서 한국 사랑으로 일관된 삶을 사신 분
-1921 년 출생 하시고 2002 년 82세로 돌아가심- 이란다.
민둥산의 박토였던 천리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가꾸신 분!
푸른 눈의 한국인이었던 분 !
민병갈- 본명은 '칼 밀러'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황무지 소금땅을
꽃과 나무들의 천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땅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과
너무나 많이 읽어 귀퉁이가 낡을 정도로
손에서 놓치기를 아쉬워하셨던
열성적인 식물공부가 아니었을까?
식물분류 백과 사전 편찬으로 유명하신 분 이창복 명예교수는
40 년 간 교단 생활을 했었지만
학습진도도 민병갈 원장이 가장 빨랐고
열심으로 임하는 그는 늘 식물도감을 끼고 살았다 하시면서 놀라워 하신다 한다.
그의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셨다는
목련을 400 종이나 심으셨던 효자이기도 했던 그는
우리 초가를 넘 사랑했던 나머지 초가를 모두 없애게 하던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던 그때 그 시절에도
수목원 내의 초가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셨던 분이다.
지금도 수목원 입구에서 바라다 보이는 초가 모양의 하얀 집- 관리건물- 엔
그가 가장 사랑했다는 목련 꽃 사진 틀 4 개가 걸려 있고 단아한 책상엔
그가 그토록 애착을 가지고 공부하셨다는 ' 한국 식물 도감 ' 이 다 헤어지고 닳은
검은 표지의 두터운 식물도감이 민원장의 손길을 못내 그리워 하면서 놓여져 있더구나
사방을 들러봐도 두 서너 평도 되지 않을 듯한 그곳엔
그의 초상화 한 점이 조촐하게 걸려 있을 뿐 -누가 갖다 둔 듯한 그의 인물화
동판이 한쪽 벽에 비스듬히 놓여진 곳-너무나 소박한 집무실이었다
그곳에 머문 잠간동안
그저 숙연해 지고 그를 생전에 뵙지 못한 게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한국은행 투자 고문으로 1960 년 휴가차 들른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만난 한 노인의 간절한 부탁
- 딸을 시집보내려 하는데 혼수비용이 없으니 내 땅을 제발 사달라는 - 을
거절하지 못해 사들인 2,000 평이 천리포 수목원의 시작이 될 줄이야!...
욕심없이 산 땅은 30 cm만 파도 소금기 뿐인 박토였으나
그는 50 세 되던 1970 년부터 나무를 심고
파란눈의 미국인은 돈이 많으니 땅을 무조건 사준다는 입소문으로
그 인근의 박토를 너도 나도 사달라는 인근주민들의 간청에 못이겨 사들이고
그 박토를 옥토로 만들기 시작하여 1979 년 재단 법인으로 만들었고
2000 년에는 수목원에서 바라다 보이는 낭새섬- 닭섬- 을 포함한
7 개 구역 18 만 7,000 평을 수목원으로 만들고
현재는 그 중 2 만평만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고 있었단다.
일만 삼백종( 우리나라 식물의 종이 4,300 종 남짓 )의 수목원이 되어
연구자들을 불러 들이는 곳으로 만드신 분 !
생명있는 모든 것이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면서
벌레 조차 귀히 여겼던 선한 심령을 가지셨던 분
2000 년 세계 수목학회로 부터 아시아 최초로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되게 하셨고
'목련학회' ' 호랑가시학회' 총회를 유치하신 분 ! - 목련410 종, 호랑가시 나무 400 종
동백나무 320 종, 단풍 200 종 등 그 외 희귀 식물의 종도 많이 있음 )
2,000 년 임업인으로서 최고인 ' 금탑 산업훈장'을 받으시기도 하셨던 분 !
그분의 하신 말씀
" 나무 사랑의 첫걸음은 관심이다. "
" 자연이 겪고 있는 아픔을 외면한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자격이 없다. "
"나무를 키우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
"나무를 지켜 줄 뿐 지배는 말아야 한다. 식물은 식물을 위한 것이어야지
사람을 위해서는 키우지 말자."
"자연은 창조자, 인간은 자연 파괴자 "
분재, 수석, 야생화 채집 등을 가장 싫어 하셨던 분 !
59 세에 한국인으로 귀화 하신 분 !
원불교 신자셨던 분 !
서울 홍제동의 전통가옥이 헐린다는 말씀을 듣고는
해체하여 주춧돌 하나 기둥 하나 다칠세라 조심 조심
천리포수목원 내 '개스트 하우스'로 복원하신 분 !
내가 죽으면 산소 만들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고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고 당부 하시던 분 !
평생을 결혼 않고 독신으로 사셨던 분
"왜 결혼 하지 않으셨어요? " 하는 질문에
늘
" 나무와 결혼 했어요 !
만족해요, 기분 좋아요."
" 아마 제가 결혼 했으면 수목원을 만들 수 없었을 거예요..."
라고 하시던 분
"나무를 왜 심으셨나요?"
"그냥 내가 좋아서요..."
작업하는데 방해 된다하여 작업인부가 나뭇가지를 잘랐다하여
바로 즉시 해고를 하신 분 !
수목원 입구의 커다란 연못을 한 삽 한 삽 떠서 인공으로 만드신
집념의 화신이셨던 분 !
여든이 되시고도 수목원의 재원조달을 위해
서울의 증권회사 고문으로 일하시던 분
80 세에 암 선고을 받으신 후에도
몸을 아끼셔야지 해도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지으시면서 술을 한 잔씩 하시던 분 !
병원 침상에서도 "천리포에 가고싶다 ."
고통의 순간에도
"수목원 나무들이 잘 자라야 할 텐데... 훼손됨 안될 터인데...
"수목원 나무는 내가 죽은 뒤에도 자식처럼 몇 백년은 더 살 것이다
나의 제 2 조국 한국에 주는 나의 마지막 선물이다. "
영원한 천리포 식물원 지킴이 민병갈 원장님이시여 ! ....
순옥아 !
네가 내 동생이 된 지도 벌써 20 년이 다 되었구나
참 시간이 된다면
이번해 4 월부터 민간인에게 언제든 사시 사철 무휴일로 개관되는
'개스트 하우스'에서 너랑 머물면서
반야 너의 생기있고 감동적인 네 삶의 얘기들 들으면서 밤을 새웠음 싶고
또한 수목원 앞쪽으로 지는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낙조도 함께 봤음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참 수목원 앞쪽으로 보이는 둥그런 '낭새섬'으로 바닷길이 한 번씩 열린다는구나
그 시간에 맞춰 그곳으로도 거닐어 본다면 모세의 기적도 체험할 듯하지 ?
언제든
시간이 남 네 희망대로 이 언니와 하루를 보내기로 하자꾸나
늘
농장에서 힘차게 살아가는
내 자랑스런 반야의 봄이
생기롭고 아름답기를 빌면서
이번 체험 학습의 백미였던 천리포 수목원의
민병갈 원장님의 일대기는 아니지만
한 부분 부분의 삶의 소개를 여기서 접으려 한다.
2009.5.2 토요일 온천천 변에서
널 보고파하는 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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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내용이라 이렇게 올려 봅니다...간간히 이렇게 메일로 후배들에게 편지를 보내주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