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반의 영국은 이제 산업혁명이 폭발적 분출을 눈앞에 두고 사회 도처에서 변화의 조짐이 꿈틀대던 시기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주동하는 힘은 이미 상공업을 통해 재산을 축적한 신흥계층들로부터 나오고 있었고 자연히 전통적 기득권자들은 그들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려고 했다. 종교적으로 보면 신흥상공업자들은 종교개혁의 세례를 받아 이른바 프로테스탄트를 형성하고 있었고, 구세력은 주로 전통적인 지주층으로 처음에는 카톨릭을 옹호했으나 국왕과 결탁하면서 영국 국교회를 지지해 왔다. 신흥세력은 의회를 세력기반으로 삼아 사사건건 국왕의 행태에 제동을 걸었다. 이 두 파의 파쟁은 급기야 1642년부터 1648년까지 피비린내 나는 내란을 초래하게 된다. 의회파는 크롬웰이라는 뛰어난 지도자의 통솔력에 힘입어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한다. 이러한 정국변동을 통해 영국 정계는 영국 국교회를 지지하며 지주층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파가 토리당으로,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며 의회정치를 주장하는 신흥세력이 휘그당으로 양분되었다.
한편 크롬웰의 내란 이후 국왕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어리석게도 영국 상황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카톨릭을 복구시키려고 시도했다가 양파로부터 공격당하는 처치에 몰리고 만다. 이렇게 해서 제임스 2세는 쫓겨나고 양 파는 네덜란드에서 윌리엄을 초빙하여 자기들 말을 잘 듣는 왕으로 옹립한다. 이것 이 1688년의 명예혁명이다. 의회에서 다수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휘그당은 다시는 국왕의 독재가 불가능하도록 문서로서 "국왕은 법의 집행을 정지시키지 못하며, 의회의 동의없는 조세 징수는 안된다."는 <권리장전>을 발표한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의회의 입법권, 의원의 면책특권, 언론의 자유 등이 모두 이때 영국의 의회가 국왕과의 투쟁속에서 만들어 낸 것들이다. 그러나 휘그당이 주도하는 정치개혁은 국민일반의 이해를 대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신흥 상공업자들은 이미 경제적으로는 지배층의 지위에 오른 자들로 오로지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국왕의 임의적인 세금징수를 가장 크게 문제삼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돈많은 자신들의 이해와 직결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 쫓겨난 몰락 농민들, 도시의 하층민들의 눈으로 보면 휘그당이나 토리당이나 다 가진 자들의 정파이고 서로 자기 몫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데 불과했다. 구두굽 높이 2mm의 차이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었던 것이다.(자료 출처 : http://www.kyoyon.co.kr/year/77.htm)
첫댓글 무혈혁명이기에 명예혁명이라고만 알고있었는데요..^^;;
조세율이나 과세품목등이 법으로 정해져있다면 멍청한 왕이 집권하고 있는것보다는 훨씬 더 국민들에게 이득이 아니었을까요??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