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닦을 수건을 가슴에 꽂은 채 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입학식을 가지던 날, 난생 처음 데이트 약속을 하고 카페 창가에서 이성의 출현을 기다리던 햇살 짠한 오후, 사회라는 곳의 막연한 공포를 체험하며 처음 출근하는 아침…. 데뷔를 앞둔 신인감독의 심정이라고 이와 다를까. 2002년에도 충무로에선 두근두근 콩닥콩닥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누며 자신의 첫 작품이자 ‘이 세상에서 꼭 하나뿐인’ 데뷔작을 만들려는 신인감독들의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건 분명히 올해 한국영화의 가장 새롭고 충만한 기운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신인감독들은 한해에 제작된 한국영화 중 절반 정도를 차지해왔다. 우리가 그들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른 배경을 갖고 영화를 꿈꿔왔던 이들이 보여줄 낯선 세계가 기대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들의 영화가 어설프고 매끄럽지 않더라도, 기존 영화가 보여주지 못한 신대륙을 조금이나마 드러낸다면 우리는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굳이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창동의 <초록물고기>,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 정지우의 <해피엔드> 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난해 우리는 그동안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 창창한 신인들을 접할 수 있었다. <소름>의 윤종찬,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꽃섬>의 송일곤,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번지점프를 하다>의 김대승,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의 박흥식 등이 그들이었다.
올해 출발선에 서서 관객이라는 심판의 총성을 기다리는 신인감독은 20명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신인감독 14명의 프로젝트와 출사표를 공개한다. <YMCA야구단>의 김현석, <아유레디?>의 윤상호, <데우스 마키나>의 이현하, <해적,디스코왕이 되다>의 김동원, <귀여워>의 김수현, <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명랑만화와 권법소년>의 조근식, <정글쥬스>의 조민호, <일단 뛰어!>의 조의석, <서프라이즈>의 김진성, <오버 더 레인보우>의 안진우, <로드무비>의 김인식, <H>의 이종혁, 추구하는 세계와 경력은 다르지만 모두 당당한 이름들이다. ‘인상적 데뷔’를 넘어, 어쩌면 영화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을지도 모를, 그 미지의 순간을 맞이하길 간절히 기대하며 비밀의 문을 활짝 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날>을 보고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온 지 15년 만에 자신의 영화를, 그것도 40억원 가까운 제작비를 들여 만들게 됐는데도 김현석 감독은 그닥 긴장하지 않는 눈치다. 여기엔 우선 그가 이은 감독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에서 연출부를, 김기덕 감독의 <섬>에서 조감독을 맡았다는 경력이 한몫하는 것 같다.
“모셨던 두 감독이 모두 빨리 찍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각각 이유는 다르지만 제작비를 걱정한다는 점도 비슷하니, 나도 제작비를 아껴가면서 빠르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느긋해 보이는 데는 제작사가 명필름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명필름이 감독을 잘 뒷받침해준다는 점도 있지만, 명필름과 김 감독이 오랜 인연의 끈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듯 보인다.
대학 시절 막연하게만 영화를 생각했던 김 감독은 우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다. 그중 가장 먼저 빛을 본 작품이 입대하기 직전 당시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에 냈던 <사랑하기 좋은 날>. 입상권에 들진 못했지만, 심사위원이던 박종원 감독의 눈에 띄어 권칠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게 됐다. 군대에 있으면서 썼던 <대행업>이라는 시나리오는 95년도 대종상 시나리오 부문에서 당선하기도 했다.
그의 각본에서 “똘똘하고 쿨한 느낌”을 받은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카투사로 복무중이던 그를 찾아가 개발중이던 한 시나리오에 관해 논의를 시작했다. 여건이 맞지 않아 그 시나리오를 포기할 때쯤, 김현석 감독은 <일출에 관하여>라는 시나리오 초고를 제시했다. 훗날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으로 제목이 바뀐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신뢰감을 갖게 된 심재명 대표는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그의 희망을 받아들여 아예 이 영화의 연출부로 투입하게 된다.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에선 박찬욱 감독의 각색작업을 도왔고, <섬>에선 조감독을 맡았던 김 감독을 외부인들이 명필름의 직원으로 오해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3월 말쯤 촬영에 들어갈 예정인 <YMCA야구단>은 1905년 YMCA에서 조직한 한국 최초의 야구팀을 그린다. “실제로 사료에 나와 있는 야구단이다. 근대의 물결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일제의 위협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불안해하던 민초들에게 힘을 줬던 이들의 이야기가 재밌을 것 같았다.” 한데 좀 이상한 점이 있다. <사랑하기 좋은 날>의 여주인공은 야구 아나운서고, <해가…>의 주인공은 야구 심판인데다, 데뷔작 <YMCA야구단>은 아예 팀을 다룬다. 구상 단계인 차기작도 야구를 소재로 한다나. “야구광은 아니다. 하긴, 다른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에 비하면 야구는 그런 대로 관심을 갖는 분야긴 하다.” 거대 서사보다는 작은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고, “메인스트림이 아닌 상업영화”를 만들겠다는 그에 관해 심재명 대표는 “매우 독특한 코미디 감각을 보여주는 감독이 될 것”이라고 소개한다.
대대로 선비가문이자 마을 서당 훈장의 아들인 호창(송강호)은 우연한 기회에 야구를 접하게 된다.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내 최초 야구단인 YMCA야구단에서 아버지 몰래 야구를 배우게 된 그는 이 운동이 주는 매력에 빠져든다. 곧 민영환의 딸이자 해외 문물에 밝았던 민정림이 통역 및 감독으로 나서 호창과 다른 선수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여기에 정림의 옛 연인이자 일본에서 야구를 배운 대현이 합세해 YMCA야구단은 그야말로 국내 최강의 야구단의 위치에 오른다. YMCA야구단은 전국 각지를 돌며 연승행진을 기록하고, 야구단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지지와 호응도 높아간다. 하지만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는 등 일본의 압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정림과 대현은 야구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 한다. 결국 YMCA야구단은 야구에서도 조선을 누르려 하는 일본 군대팀과 숙명의 일전을 치르게 된다.
[2002 신인감독 14인] <아유레디?>의 윤상호 감독
내가 죽여버린 과거, 그 악몽으로의 초대
“힘드냐구요? 재밌습니다.” 80억원이라는 큰 예산에 타이 로케이션까지, 신인감독이 감당하기 만만치 않은 영화를 데뷔작으로 선택한 이사람, 배짱이 만만치 않다. 타이의 수도 방콕에서 차로 꼬박 5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상카브리 촬영현장에서 만난 <아유레디?>의 윤상호(34) 감독은 “이왕이면 큰 영화가 좋지 않으냐”며 여유까지 부린다. “능구렁이처럼 영 신인같지 않다”는 것이 현장스탭, 작가, 프로듀서들의 그에 대한 중평. 그러나 이런 배짱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건 아니다.
93년 고려대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뉴욕행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그의 꿈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MFA 과정을 밟으면서 뉴욕영화아카데미 수업을 병행하게 되었어요. 관심이 자연스럽게 극영화로 옮겨졌죠.” 96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김종학 감독의 <백야 3.98>의 조연출로 일하게 되면서 고국땅을 밟자마자 러시아로 날아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4개국에서 거의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됐는데, 스케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것도 해외 프로덕션의 감도 그때 생겼나봐요.” 이후 김종학 감독이 장윤현 감독과 손잡은 아이오직에서 이현우 주연의 인터넷영화 <메이>를 찍으며 감독으로서 ‘아 유 레디’되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는 기회를 얻었다.
“지연도 중요하던걸요.” 우연인지 인연인지 아이오직 사무실은 당시 <번지점프를 하다>로 간판을 내건 눈 엔터테인먼트 사무실과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있었고, 그런 지리적 여건(?) 덕에 최낙권 대표와는 자연스럽게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감독 후보와 프로듀서 후보로서의 탐색과정”은 그렇게 <번지점프를 하다> 촬영장과 <메이> 촬영장을 서로 찾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2001년 11월부터 ‘눈 엔터테인먼트선(船)’에 몸을 실은 윤 감독은 <번지…>의 고은님 작가가 완성한 초고를 디벨로핑하는 8번의 고개를 넘고, 김정학, 김보경 등의 과감한 신인 캐스팅에 맞추며, 지난해 말 촬영에 돌입했다.
현재 타이 촬영중인 베트남전쟁신도 쉴새없이 폭탄이 터지는 고난도 작업이지만, 어드벤처영화의 성격상 앞으로 가야할 길이 첩첩산중이다. 그러나 지진에 차 액션, 늪, 절벽, 폭포로 이어질 촬영을 앞두고도 그는 “도박이지만 해볼 만한 것 아닙니까?”라며 웃는다. 리스크를 즐기는 자만이 더 큰 결과를 얻는다는 말을 반드시 증명해보이겠다는 태세로 말이다.
저마다 사연을 안고 테마파크에 모인 사람들. 첫사랑의 여자에게 생선장수 아들이란 이유로 모욕당한 뒤 비린내나는 과거를 죽여버린 성형외과 의사 강재(김정학). 남동생을 낳기 위해 대신 죽음을 선택한 엄마 때문에 남자에 대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테마파크 직원 주희(김보경), 베트남전 당시 비겁했던 자신의 선택을 평생 짐처럼 안고 살아가는 황노인. 티격태격하는 모범생과 날라리, 준구와 현우(이종수). 어딘가 부모가 살아 있을 거라 믿는 고아원 아이 찬희. 동물원 사파리버스를 타고 가던 중 ‘아유레디’라는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빠져들어간 이 여섯 사람은 각기 다른 판타지의 장에서 애써 외면해왔던 자신들의 진짜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2002 신인감독 14인] <데우스 마키나>의 이현하 감독
인간, 시스템에 인간을 잃다
많은 감독이 그렇듯, 이현하 감독도 영화와의 질긴 인연을 실감하는 사람이다. ‘도망’까지 치며 영화계를 뜨려 했으나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대학 시절, 연극과 미술에 관심을 둔 불문학도였던 그가 199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며 전공을 미학으로 선택한 게 발단이었다.
흔히 소르본이라고 불리는 파리4대학에 도착해보니 영화미학이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었고, 그 역시 관심을 갖게 됐다. 강의를 듣거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건 필수적이었다. “시네마테크에 죽치고 앉아 하루에 3편씩 볼 정도로 정말 많이 봤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직접 만들고픈 욕심이 생기더라.” 구로사와 아키라에 관한 석사논문을 쓴 뒤, 실험영화를 전공 삼아 박사 코스를 마치니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더했다. 결국 그는 프랑스영화자유학교(CLCF)에 들어가 실기를 익힌다.
95년 귀국했을 때, 그는 영화와의 기이한 인연을 느끼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교사였던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고, 대학교 연극동아리 1년 선배 박흥식 감독은 이창동 감독과 함께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 연출부로 활동한 바 있었다. 인연에 이끌린 그는 박 감독의 소개로 이 감독의 <초록물고기> 연출부에 막내로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충무로 현장은 프랑스에서 배운 것과 너무 달랐다. 육체적인 고통을 강요하고 주먹구구식 해결법이 판치는 충무로를 ‘탈출’한 그는 광고계로 향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익혔던 미술 실력을 발휘해 아트디렉터로 활약했다.
IMF사태가 없었다면 그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997년 독립을 해 자신의 업체를 차렸건만, 몇달 되지 않아 종잇값을 대기도 힘든 상황이 찾아왔다. 다음해 초 사업을 깨끗이 접은 그는 영화계 언저리로 돌아온다. 영상원, 연세대 등에서 실험영화, 세계영화사 등을 강의하기도 했고, 월간지에 평론도 기고했다. 인연은 그의 몸까지 자극했다. 어느날부턴가 자신의 몸이 현장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시나리오를 썼고, 마침내 <데우스 마키나>까지 오게 됐다.
“일본만화 <총몽>,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아키라> 등을 적극 차용한” 이 작품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보독재가 우려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의 감정이 어느 정도까지 억제되고 말살될 수 있나” 하는 메시지만이 아니다. 형식을 극단화하는 실험영화 전공자답게 형식미를 살리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절제된 역동성’은 그가 이 영화에서 추구하는 형식미학이다. “<와호장룡> <매트릭스> 등과는 달리 원심력과 중력이 느껴지며, 움직임과 기하성을 조화시키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상업영화이므로 어느 정도 한계는 있겠지만, 최소한 형식적 일관성을 보여줄 생각이다.”
시큐라 시스템이라는 경비업체와 합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씨티맵이라는 회사의 빌딩에 테러범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빌딩 직원들을 인질로 잡은 이들은 전산실을 점거하고 특정 데이터를 빼내려 한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잘 훈련된 특수부대원들이 출동하지만, 전멸되다시피 한다. 테러범들이 목적을 달성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로터스’라는 정체불명의 부대원들이 나타나 눈깜짝할 사이에 테러범들을 진압한다.
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본 인질들까지 무참히 살해한다. 하지만 작전을 끝낸 로터스 대원 2명이 타고 있던 헬기가 로켓포를 맞고 추락하고, 오토바이 폭주족인 도영이 추락한 헬기에서 살아남은 소녀 주니를 발견한다. 한편 국회에서는 국가의 치안을 민간업체에 넘기려는 논의가 진행되고,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경비시스템을 갖춘 시큐라 시스템이 가장 유력한 업체로 떠오른다.
[2002 신인감독 14인] <해적, 디스코왕 되다>의 김동원 감독
쌈마이 미학의 진수를 보여주마!
“60년대, 80년대 정서가 좋다. 플라스틱보다는 유리병이 주는 느낌, 팩보다는 병의 선이 더 좋고.“ 74년생답지 않은 늙은 취향을 가진 김동원 감독이 좋아하는 사람들도 일괄적이다. 시인 황인숙, 가수 김광석, 김수철, 인순이, 소설가 김승옥 등. 대학 시절 즐겨 찾았던 장소는 명동 남산골 부근에 있는 장미다방. “다방의 인테리어와 원두커피 블루마운틴이 어우러지는 분위기가 좋다. 이쪽 탁자에서는 돈문제로 목청높여 다투고, 저쪽 탁자에서는 우리 딸이 어쨌는데 말이야 하고….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가만히 듣는 게 즐겁다.” 감독 데뷔작도 버스 안내양, 달동네, 디스코텍이 등장하는 80년대풍 코미디가 된 건 전혀 우연이 아니다.
서울예대에 진학하기 전인 고2 때 어느날 본 영화가 그의 평생 직업을 정했다. “TV에서 하는 한국영화였다. 제목도 기억이 안 나는데 너무 못 만들었더라. 내가 하면 잘할 텐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결심했다.” 감독이 되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길로 담배도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졸업작품이었던 26분짜리 단편 <81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를 장편으로 다시 버전업시킨 영화다. 단편으로 만들고 나니 뭔가 부족한 듯 아쉬움이 남아 졸업여행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다시 해보고 싶은데, 그러면 시간이 길어져서…” 하는 말이 씨가 됐다. 스승인 강한섭 교수가 관심을 가져주었고, 수차례 회의를 거듭하며 “단편영화와 장편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으니 전문제작자를 만나서 진행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여기까지 왔다.
교복과 사복이 공존하고 두발자율화가 갓 시작된 시대, 부와 빈이 혼재됐던 그 시절을 재현해내기 위해 택한 공간은 난곡 재개발지역. 달동네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김동원 감독에게 그 시절 그 동네를 그리는 건 어쩌면 SF영화 같은 상상력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쌈마이가 좋다. 그 어설픔이. 지루한 건 싫다. 못 참는다”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김동원 감독이 빚을 “퍼포먼스 같은 느낌”의 코미디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는 강추위 속에서 난곡에서 달동네 장면 촬영을 강행, 현재 15% 정도 진행된 상태다. 충무로 경력은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연출부가 전부인 김동원 감독이 <해적, 디스코왕이 되다>에서 바라는 감독으로서의 바람은 확실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다.
때는 80년대 초. 싸움질로 시간을 보내던 달동네에 살고 있는 세 소년이 있다. 터프하고 귀여운 소년 해적(이정진), 바보스러울 만큼 순둥이인 봉팔(임창정), 못 말리는 뺀질이 성기(양동근)는 달동네를 주름잡는 의리의 삼총사. 어느날 패싸움을 벌인 뒤 으쓱대며 거리를 걷던 해적은 아름다운 소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며칠 뒤, 해적과 성기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 봉팔의 집을 찾아오는데, 달동네 꼭대기 봉팔의 집에서 해적은 그 소녀가 봉팔의 동생 봉자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봉팔이 던진 벽력같은 한마디. “울 아부지가 다쳐서 내가 똥을 펐어. 그런데 동생이 술, 술집에… 흑흑” 술집이라니? 분기탱천한 삼총사는 “봉자를 구하자!”며 룸살롱으로 쳐들어가지만, 봉자는 이미 더 무서운 ‘큰형님’이 운영하는 디스코텍으로 넘겨진 상태. 디스코텍의 큰형님은 자신들이 개최하는 디스코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면 봉자를 내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주어진 기간은 1주일. 할 줄 아는 건 싸움질밖에 없던 삼총사, 어떻게 디스코를 연마할까?
[2002 신인감독 14인] <귀여워>의 김수현 감독
순이씨, 나 오늘 외로워∼
“아무 생각없이 달리고만 싶었다.” 5년 전, 김수현 감독은 촬영현장이 아닌 길 위에 있었다. 시나리오 대신 오토바이 핸들을 쥐고 있었고, 방한모 대신 헬멧을 쓰고 있었다. 난생 처음하는 퀵서비스 일이었지만, “현장을 버리고 길 위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악몽을 바람에 떨쳐낼 수 있어 좋았다.
돌이켜보면 모든 게 다 그놈의 현장사고 때문이었다. <꽃잎>을 끝내고 난 뒤, “데뷔 전에 뭘 하나 해보고 싶어” 시작한 조그만 단편영화 한편이 문제였다. “길에서 사는 10대 아이들의 고단한 삶을 담고 싶어” 신탄진에서 촬영을 시작했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촬영은 중단됐고, 뒷수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혹시 내가 책임지지 못할 일을 벌인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짓눌려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치유될 것 같지 않던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한 것도 ‘시간’이 아니라 ‘영화’였다. <나쁜 영화>에 조감독으로 합류하게 되고, 10대들과 어울리면서 점점 자신을 다독일 힘을 얻었다. 오토바이 타고, 레카차 타고 무작정 떠돌면서 만난 길 위의 사람들 이야기를 <귀여워>에 판각하면서 다시 해보자는 의욕도 얻었다. <귀여워>의 시나리오 초고만 하더라도 거칠고 황폐한 인물들을 쭉 보여주는 식이었지만, 도중에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순이라는 ‘촉매제’ 같은 인물을 넣은 것도 그런 심경의 변화와 무관치 않았다. 물론 오랜 시간 보듬고 다듬는 과정이 만만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캐릭터 위주로 후닥닥 편하게 써내려갔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걸 두고 자꾸 해석하려 들었고 그걸 시나리오상에서 어떻게든 풀어주는 게 무척 힘들었다.”
가끔 “쉽게 내린 결정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 것 같다”는 그를 맨 처음 유혹한 건 영등포 재개봉관에서 본 <레이더스>. 관람 내내 “저런 거 딱 한번만 해보고 싶다”는 소망뿐이었다. 한번의 가출과 아버지에게 얻어맞은 뺨 한대로 쉽사리 영화과 진학의 뜻을 이뤘고, 아는 형의 권유로 동국대 연극영화과 87학번이 됐다. 당시로선 영화연출을 지망하는 이가 거의 없어, 바깥으로 돌며 정지우, 김용균 등 다른 학교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다 만난 구성주 감독 덕에 졸업할 무렵 데뷔하는 이가 없으면 자리가 잘 나지 않았다는 장선우 감독의 연출부가 됐다. <경마장 가는길>을 보면서 쾌재를 불렀다는 그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시작으로 “착취도 많이 당했지만, 한없이 열린 좋은 스승” 아래서 수학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첫 번째 카니발을 준비하고 있다. “단순한 카타르시스와 순간의 엑스터시를 넘어 영원한 카니발의 세계로 들어간” 에밀 쿠스투리차를 경쟁자로 삼고서.
무너지기 직전의 오래된 아파트. 철거 직전의 상황이다. 물론 이곳은 신내림을 받았다는, 자칭 용한 점쟁이 한진희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한때 반듯한 외모와 그럴듯한 말솜씨로 여신도들을 몰고 다니며,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전력이 있는 이 사이비 교주는 50살이 넘어서도 아이를 갖길 원하는 중년 부인에게 부적을 써주는 대신 관계를 갖는 식으로 자신의 신통함을 과시한다.
퀵서비스맨 963과 레카차를 모는 개코, 그의 배다른 두 아들 역시 내일 없는 하루를 연명하는 건 아비와 마찬가지. 그러던 어느날, 개코는 적적해뵈는 아비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끼고 고속도로에서 뻥튀기를 파는 젊고 예쁜 처녀, 순이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순이의 등장으로 한진희, 963, 개코의 애정 3파전이 벌어지고, 여기에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또다른 아들 머시기가 순이를 향한 순정을 품게 되면서 철없는 부자간의 말릴 수 없는 싸움이 이어진다.
[2002 신인감독 14인] <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
웬만해선 백수를 막을 수 없다!
“저 사람 어디서 봤더라….” 장항준 감독은 방송을 통해 꽤 알려진 인물이다. 야심한 시각 모 방송의 토크쇼에 나와 ‘의무방어전’을 치러야 하는 남편의 부담에 대해서 거침없는 수다를 늘어놓았고, 얼마 전엔 시트콤 <웬만해선 이들을 막을 수 없다>에 출연해서 단짝인 윤종신과 못 말리는 악동(이면서 비실이) 형제로 등장, 마니아 팬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본업은 충무로와 여의도를 오가며 활동해온 재기발랄한 이야기꾼. <박봉곤 가출사건> <북경반점>의 시나리오를 썼고, <깜짝 비디오쇼> <좋은 친구들> <천일야화> 등에서 방송작가로 뛰었다.
1년 전, 그는 한 중범죄자가 새로 만들어진 재활프로그램의 하나로 평범해 뵈는(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한 가정에 던져지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 <불타는 우리집>으로 감독데뷔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작품을 바꾼 이유는 뭘까. <신라의 달밤>의 박정우 작가가 쓴 <라이터를 켜라>의 연출 제의를 한때 익영영화사에 머무르다 인사를 텄던 이관수 프로듀서로부터 건네받았을 때, 그의 심정은 이랬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감독이 남의 시나리오로 데뷔를 해? 세상에 이처럼 쪽팔리는 일이 있나” 처음엔 그래서 고사했다. 그런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춘 것이, 파장이 상당했다. 평소 자신이 즐겨 찾는 메뉴인 소시민에 대한 애정 듬뿍한 시선을 좀더 쳐넣거나,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다양한 계층들의 가지각색 반응을 통해 뭔가를 보여줄 수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감독 데뷔는 상당한 수준의 ‘구라’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원래 말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이 쏟아내는 말의 3분의 2는 ‘구라’라고 서슴없이 털어놓는 그는 고등학교 시절, 영화포스터만 보고선 애들 불러모아 침 튀겨가며 정말 영화를 본 것처럼 믿게 할 정도로 스토리구성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장래 희망으로 ‘시나리오 작가’라 적은 건 자연스런 일. 하지만 그의 전공은 서울예대 연극과. 그것도 연기 전공이다. 자신의 입시지도 교사가 연극쪽이어서 할 수 없이 택한데다, 들어간 뒤에도 연출 정원이 적어 재빨리 포기하고 대신 독학의 길을 걸었다.
2년 내내 극작법 수업만을 골라 들으면서, 그가 읽은 시나리오와 극본은 무려 2천여편. 학교 도서관과 영화진흥공사 자료실을 뒤져가며 양장 표지에 등사된 <시민 케인>부터 프랑스 누아르 영화까지 종횡, 섭렵했다. 그게 살이 되고, 피가 된 것일까. 지금도 그의 뇌수에선 아이디어가 둥둥 떠다닌다. 그가 꼽는 비결은 ‘산만’. 뭐 재밌는 일 없나 싶어 더듬이를 가만두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도 “공연히 웃기려 드는 건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명확하고 엄격한 ‘원칙’이 있다. 인간을 뒤쫓되, 삶과의 마찰이 풍겨내는 진한 페이소스가 이야기에 스며들어 있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란다. 평소 지론을 따라, 지금 그는 울산과 서울의 촬영장을 오가며 부지런히 뛰고 있다.
백수 허봉구(김승우)는 오늘도 노부모의 쌈짓돈을 노린다. 예비군 훈련시에 점심값을 해결하기 위한 절박한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의 미션은 역시 임파서블. 새벽 길에 어머니가 적선해준 몇 천원으로 하루를 연명해야 했던 봉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수중에 고작 300원이 전부임을 알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가엾는 자신의 처지를 달래고자 그는 일회용 라이터에 전재산 300원을 투자한다.
훈련장에서 만난 남자의 도움으로 재수좋게 봉구는 일단 서울역까지 택시를 얻어타고 나오지만, 이때부터 봉구의 목숨을 건 라이터 되찾기 여행이 시작된다. 갑작스런 복통에 찾았던 화장실에 두고 나온 빨간색 라이터는 조폭 보스 양철곤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이를 알게 된 봉구는 청탁을 받고서 보궐선거를 도왔지만 당선된 뒤 입을 씻은 박 의원에게서 받지 못한 돈을 돌려받기 위해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는 철곤을 추격하는 것. 과연, 봉구는 라이터회수작전에 성공할 것인가.
[2002 신인감독 14인] <명랑만화와 권법소년>(가제)의 조근식 감독
네가 양아치의 순정을 아느뇨?
영화아카데미 13기. 충무로에 어느 기수가 많이 데뷔했냐는 세간의 잣대로만 보면, 고참 기수에 비해 아직까진 열등하다. 따져보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민규동과 김태용 둘뿐이다. 하지만 단순한 그 기준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직 이른 판단일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조근식 감독의 데뷔는 4년 전, 졸업작품전에서 영화인들에게 고른 수준, 너른 관심을 선보여 남다른 기대를 모았던 이들 13기의 저력을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남의 시를 수첩에 적어두는 버릇이 있는 여자와 청각장애인이지만 감성적인 남자의 어긋남을 통해 탄탄한 드라마를 선보였던 <워너비>를 공동연출, 호평을 받았었다.
그런 그였지만, 영화와의 만남은 ‘3수’ 끝에서야 발견한 우연이었다. 국문학과와 철학과를 번갈아 써내며 대학문을 두드렸지만, 그에게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당시 서울예대 미술과에 적을 두고 있던 친구의 조언을 듣고서 남산의 캠퍼스로 발길을 옮겼다. 그렇다고 영화과를 택한 건, 자신도 모르고 있던 욕구의 뒤늦은 발현 때문은 아니었다. 까닭은 단 하나. “미모의 여학생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 하지만 “진실이 아니었음을 확인한 순간”부터 매 학기 1편씩 만들어 제출해야 했던 교칙상 8mm 홈비디오를 들고 뛰어야 했다. 그리고 함께 만든 이들과 시사실에서 어울려 자신들이 찍은 흔적들에 왠지 모를 희열이 투사되는 걸 경험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설의 장산곶매 선배들과 모르는 것 없는 영화광 동기들 사이에서 서성이면서, 영화는 기쁨인 동시에 콤플렉스를 안겨줬다. 곧바로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더 배워야 한다”며 별 망설임 없이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던 것도 그런 연유. 그곳에서 그는 소중한 친구들, 민규동, 김태용, 박윤경을 얻기도 했다. 97년 백댄서 아이들 셋을 쫓아다니며 찍은 <열일곱>은 이들 셋이 공동으로 연출하고, 그가 촬영을 맡은 작품. “화면과 사운드의 조합이 수준급이었다”는 칭찬을 듣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심한 기계치였는데 도대체 내가 저걸 어떻게 찍은 거지”라고 스스로를 향한 반문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하긴 학교에서 8mm 카메라를 처음 보았을 때는 모양새롤 보고서 “무슨 헤어드라이기인 줄 알았다”라고 하니, 대단한 발전이긴 하다.
<거짓말>. 그에게는 유일한 충무로 현장 경험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얼마되지 않아 예전부터 궁리했던 아이템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나리오가 거의 완성된 <명랑만화와 권법소년>이 그것. 처음엔 그냥 “얼굴 하얀 소녀와 양아치 같은 남자애의 사랑이야기”였지만, 자신이 살아온 80년대의 갑갑한 시간축과 학교라는 답답한 공간축을 사용, 재미나게 격자를 짜보고 싶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아직 그의 맘이 흡족하진 않다. “처음에 반짝이며 생동감 있던 캐릭터가 내러티브를 다듬으면서 조금씩 깎인 것 같아서다. 드라마 내에서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쫑알대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내가 받아쓰는 순간이 되면 좋겠는데…” 더 다듬고 싶지만, 정신없을 촬영현장이 그를 지금 부르고 있다.
문덕고의 1인자인 중필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다. 전국체전 입상자인 대명고의 태권도 부장도, 난폭하기로 유명한 강성고의 헤글러도 그의 무공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문이 내려온다.
교내 폭력서클인 단군파도 풍문 때문에 때론 어리숙해 뵈는 그를 어쩌지 못한다. 그런 천하무적 중필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철가면’이라는 별명의 학생주임 선생 때문. 중필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홀어머니를 짝사랑하는 철가면이 자신에게 과도한 관심을 쏟는 것이 영 마뜩찮다. 부담스럽다. 춘화를 미끼로 삥을 뜯거나 당구장을 들락거리는 것이 예전같지 않은 중필은 고작해야 초코우유를 마시며 무료한 학교생활을 달랜다. 그런 중필에게 치아교정기를 달고 다니는 새하얀 얼굴의 소녀 민희는 뒤늦게 발견한 생의 기쁨. 하지만 그것도 잠시. 험악한 외모의 칼잡이 상만이 전학오면서 중필은 첫사랑 대신 결투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2002 신인감독 14인] <정글쥬스>의 조민호 감독
청량리 누아르. 삼류인생에도 빛을
대학 1학년 시절, ‘아나키스트적 공상’이나 하며 소일하던 조민호 감독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고등학교 시절 문학반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 감독이 고교 시절 썼던 중편소설의 일부를 단편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것. 쉽게 허락을 하고 나서 어쩌다 보니 각색 작업에도 참여하게 됐고, 촬영현장까지 찾아가게 됐다. 장비도 부족하고 여러모로 어수룩한 초보자들의 영화 현장은 “진짜 코미디”처럼 보였지만, 무언가 탈출구를 바라고 있었던 그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첫 작품 <짜장면집 살인사건>(1985)은 이때 인연을 맺은 제작진과 함께 만들었다. 이 코믹한 분위기의 스릴러영화를 통해 입소문을 얻은 그는 한 젊은이가 공짜 술을 먹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8mm영화 <봄비>로 청소년영화제에서 동상을 받기도 한다.
대학 시절 4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진로를 고민하다가 당시 연극을 하던 최인기 유니코리아 이사를 만나게 된다. 그와 함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일명 노문연 영화분과로 들어가 ‘사상’을 익히기도 했던 조 감독은 “너의 갈 길은 이쪽이 아니라 상업영화”라는 주위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충무로행을 결심한다. 임종재 감독과 준비하던 영화가 무산된 뒤 91년 영화아카데미 8기로, 그중에서도 “꼴찌로” 들어갔다. 졸업 뒤 김영빈 감독의 <비상구가 없다>의 연출부, 이민용 감독의 <개같은 날의 오후> <인샬라>에서 조감독을 마친 뒤 “더이상 감독과 싸우기 싫어” 1998년부터 데뷔를 준비한다.
데뷔를 결심한 그의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은 장르영화였다. “한국영화에는 정통적인 장르영화의 흐름이 없다. 장르 파괴와 뒤틀기만 있을 뿐이다. 프랑스의 누벨바그도 장르적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처음 준비한 것은 <사랑의 스파이>라는 사회풍 액션영화였다. 시나리오를 쓰고 나니 <도니 브래스코>와 비슷한 이야기였다. 다시 쓴 작품은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청량리를 배경으로 한 어두운 갱스터영화 <죽을 때까지>. 하지만 다 써놓고나니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에 ‘왜 장르라는 공식에 맞추려고만 했을까’라는 생각이 확 들어왔다. 내가 자신있어 하는 것은 생생한 인물과 대사였는데 말이다.”
이렇게 시작한 게 ‘변칙장르영화’ <정글쥬스>였다. <죽을 때까지>가 청량리의 그림자만 표현했다면, <정글쥬스>는 청량리의 밝은 면에 집중적으로 눈길을 보내는 영화다. 지난해 7월부터 촬영을 시작, 11월쯤 마치고 현재 편집을 마무리하는 단계. 다음 영화로 “에밀 쿠스투리차의 <아빠는 출장중> 같은 분위기를 가진 절박하고 시끄러운 멜로영화”를 구상중인 그는 앞으로도 “주관적이지만 작은 진실이나마 분명 들어 있는” 스스로의 체험에서 영화를 끌어내볼 생각이다.
어떤 영화?
제작사 싸이더스 출연 장혁, 이범수, 손창민, 전혜진 후반작업중(3월말 개봉 예정)
기태(장혁)와 철수(이범수)는 청량리 588을 빈둥거리는 양아치들. ‘멕 라이언’(전혜진) 같은 창녀들과 시간이나 죽이는 게 일상인 이들에게도 꿈은 있다. 폭력조직에 들어가 화끈하게 살아보는 게 그것이다. 어느날 이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악어라는 깡패가 예비군 동원훈련에 간 사이에, 조직에서 마약거래가 이뤄지게 된 것. 조직의 중간보스 민철(손창민)은 아쉬운 대로 기태와 철수를 데리고 거래 현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거래 상대의 배신으로 부상을 입고 마약을 뺏긴 민철은 경찰에 잡히고, 기태와 철수는 보스에게 불려가 없어진 마약을 되찾거나 돈을 뱉어내라는 협박을 받는다. 거래 현장을 다시 찾아갔다가 경찰에 붙들려 보스를 팔아먹은 두 양아치는 우여곡절 끝에 엄청난 양의 마약을 손에 넣게 되고, 이를 팔기 위해 멕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간다. 민철 일당도 이들을 붙잡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면서 요란뻑적지근한 추격전이 시작된다.
[2002 신인감독 14인] <일단 뛰어!>의 조의석 감독
문제적 고딩들, 모험과 맞장뜨다
요즘 심경은? “하루에도 수만번씩 자신이 있다 없다 한다. 전형적인 신인의 증세다.” 76년생. 현장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린 축에 드는 조의석 감독은 “진짜 고충은 나이보다는 역량부족”이라고 말한다. 영상원 최연소 합격생이라는 타이틀에 대해서도 “나이에 맞게 학교를 들어간 것뿐인데 다른 사람들이 나이가 많다보니 어쩌다 그런 타이틀이 붙은 것”뿐 이라며 어색해한다.
어렸을 적 꿈은 회사원이었다. 아버지가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를 좋아해 어려서부터 가족과 극장에 가곤 했는데 영화 속 비즈니스맨의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맨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영화에 관심을 두었고, 연극영화과를 준비하던 고등학교 시절, 친구 따라 이탈리아 문화원과 시네마테크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다. 거기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작품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등을 만났다.
원래 뭔가를 찾아다니며 보는 능동적인 스타일이 아닌데 친구를 잘 만났다. 외국 고전문학에도 푹 빠져들었다. 독서실에서 친구들의 비웃음에 시달리며 곰팡내나는 책장을 넘겼던 세로편집의 <죄와 벌>의 기억들. 그러나 아직 인간의 심연을 파고들어가는 영화는 자신없어,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다독이고 있다. 영상원에서 나이 많은 동기들 덕분에 접했던 코언 형제의 영화와 마르케스, 보르헤스, 요사 등 남미 환상문학작품도 영혼의 자양분.
<일단 뛰어!>는 10억원이 넘는 돈이 든 가방을 주운 세 고교생과 그들을 쫓는 형사가 벌이는 해프닝을 그린 코믹액션영화다. <일단 뛰어!>를 쓴 동기는 단순하다. 영상원 졸업작품 <환타 트로피칼>을 좋게 본 영화사 사람이 “장르, 내용 불문하고 시나리오를 써봐라”라는 제안을 해왔고, 청춘물 시나리오를 쓰다가 스스로 지겨워서 코미디로 방향을 확 틀었다. “생각없어 보이지만 순수한 10대의 모습, 지금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건 내가 갓 거쳐온 그 세대가 아닐까 싶었다.” 우섭, 성환, 진원 등 등장인물 세명은 모두 고교 시절 친한 친구 이름에서 따왔다. 대사 느낌도 많이 빌려왔다. 친구들은 서로 자신들을 더 멋있게 그리지 않았다고 투덜거린다고. <일단 뛰어!>는 시나리오에서부터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같은 가파른 호흡이 느껴진다. 조의석 감독도 점프컷을 많이 쓰는 등 편집에서 그런 호흡을 최대한 살릴 생각이다.
어떤 영화?
제작사 기획시대 출연 송승헌, 이범수, 권상우, 김영준 촬영중 촬영중(4월 말 개봉 예정)
조기유학 때 사건치고 돌아와, 한국생활에 몸이 근질근질했던 21살의 늦깎이 고등학생 성환(송승헌)과 가정방문 호스트 아르바이트에도 불구하고 학급석차 20등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우섭(권상우), 인터넷 방송사를 운영하며 PD의 꿈을 키우고 가끔 엉뚱한 행동으로 주위를 썰렁하게 만드는 진원(김영준). 성환 아버지의 생일잔치에 다녀오던 세 소년의 차 지붕으로 수십억원이 든 가방과 피로 범벅이 된 시체가 떨어진다. 한편 거물 사채업자 김 선생의 집 경보시스템이 작동하자 출동한 신참형사 지형(이범수). 하지만 김 선생은 도난당한 것이 없다며 얼버무린다. 그러나 사건을 계속 수사하던 지형은 성환, 우섭, 진원의 행동이 미심쩍다고 생각,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에 이른다.
[2002 신인감독 14인] <서프라이즈> 김진성 감독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일단은 드라마부터! 단편 <어디 갔다 왔니?>에서 쥐를 잡다가 스스로 쥐가 되고 마는 중국집 주방장의 ‘꿈 이야기’를 코믹하고도 의미심장하게 그렸던 김진성 감독. 그가 장르부터 심상치 않은 로맨틱코미디인 첫 장편 <서프라이즈>에서, 1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일어나는 세 남녀의 심리변화를 경쾌하고도 진지하게 그려가고 있다. 코미디 속에서 인간 내면의 표정을 잡아내는 그의 주특기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팽팽한 공중곡예. ‘드라마’는 천릿길이 될 앞으로의 필모그래피에 한 걸음을 내딛는 그가 진중하게 택한, 공중곡예줄 아래의 ‘안전망’이다.
김진성 감독의 이력은 특이하다. 강원도 시골에서 출생, 고향마을이 바다 속에 수몰되자 상경한 후 늦은 나이에 연세대 심리학과에 입학, 스물아홉에 졸업했고, 8년간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아카데미 담당 사무직원으로 일했다. 영화 공부를 시작한 건 서른이 된 후. 직장생활 1년 쯤 되었을 때, 권태롭기도 하고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영화 일이 재밌어 보이기도 하여 퇴근 뒤 시나리오작가양성기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어느 일요일 하루 만에 첫 영화 <환생>을 만들어냈다. 두 번째 작품 <부처를 닮은 남자>부터 인디포럼 등 영화제에 초청, 네 번째 단편 <어디 갔다 왔니?>(1999)는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작품상, 관객상, 기자상 등을 휩쓰는 등 단편감독으로서 그는 성공적 행로를 밟아왔다. 장편 프로젝트에 손대기 시작한 건 2000년. 영진위를 관두고 나와 강제규필름의 미스터리 프로젝트팀에 1년간 참여했으나 <단적비연수> 여파에 지지부진했고, 지난해 4월 비로소 <서프라이즈>를 만났다.
<서프라이즈>는 변혁 감독이 원안을 내고 씨네2000이 오랫동안 시나리오작업에 매달려온 기획영화다. 아내 변원미씨가 시나리오작가였던 덕에 제작사 씨네2000과 자연스럽게 논의, 지난해 7월 감독계약을 맺었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쓴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이 영화는 “시간 속에 놓인 인간이 갑자기 자기가 모르던 자기를 보게 된다”는, 그의 단편들을 관통하는 이야기줄기와 통하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첫 작품부터 내 스타일을 각인시키기보다는 평생 많은 작품을 하고 싶다. 난 이야기꾼”이라는 그는 일단은 자기색깔을 내세우기 보다는 충무로에서 드라마적으로 완벽하고 탄탄한 작품으로 인정받을 생각이다. “내던져진 존재, 슬픈 존재인 인간이 21세기를 어떻게 살아가는가” 사유할 만한 이야기가 그가 정말 하고픈 이야기라고. 그런 이야기를 담아 직접 시나리오를 써 연출하는 영화는 이후 천천히 할 계획이다. “5년 뒤 혹은 10년 뒤, 점점 더 좋은 게 나오네, 하는 소리를 듣는 그런 감독”이 되고 싶기 때문에. 첫 장편 <서프라이즈>에서는 우선, 서프라이즈 파티가 끝난 후 살짝만 그의 색채가 스민 ‘심리학적 성찰’을 내비칠 거라고 귀띰한다.
여의치 않게도 친구의 애인을 탐하게 된 한 여자와 그녀의 친구, 그 사이의 한 남자. <서프라이즈>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정된 시간 동안 기묘한 삼각관계가 발생하는 과정을 담는 로맨틱코미디다. 오랜만에 외국에서 돌아오는 남자친구. 그러나 숨겨오던 그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여자쪽 부모의 반대가 일고, 여자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지연작전을 쓴다.
부모를 설득할 때까지 친한 친구에게 남자친구를 12시간만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 그러나 저녁 7시 서프라이즈 파티 때까지 그 12시간 동안 붙어 있던 둘 사이에는 그만 사랑이 싹트고 만다. 재밌고도 슬픈 이 기발한 이야기는 톡톡 튀는 주연배우들과 더불어 기승전결이 뚜렷한 탄탄한 드라마가 될 전망. 남자친구 정우 역에 신하균, 친구에게 애인을 뺏길 위기를 맞는 미령 역에 김민희, 그녀의 친구 하영 역에 이요원이 분한다. 지난해 12월27일 촬영을 시작했고, 3월 중순 크랭크업하여 월드컵 중계 TV 앞에 남자들이 모여앉아 있을 5월, 여성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으겠다는 계획이다.
[2002 신인감독 14인] <오버 더 레인보우>의 안진우 감독
기억 저편 그대가 울고 있었네
안진우 감독이 ‘무지개’를 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1998년 폴리비전에서 <접속>의 조명주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까지 마쳤던 영화. 캐스팅 등 프리프로덕션을 상당부분 진행한 상태였지만, 도중 투자사였던 삼부파이낸스가 무너지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디즈니 등의 직배사에서 투자 의사를 밝혔지만, ‘한풀 꺾인’ 영화가 캐스팅이 순탄할 리 없었다. 그렇다고 3년 전 들이킨 고배가 그에게 쓰디쓴 경험만은 아닌 듯. 지난해 11월부터 촬영에 들어갔지만, 오랜 ‘되새김질’ 덕분에 첫 영화치고 망설임 없이 수월하게 찍어나가고 있다.
그를 영화의 길로 이끈 건 알게 모르게 누이와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영화광이던 누이가 사들인 잡지를 뒤적이며 상당한 정보를 습득했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귀한 비디오 플레이어 덕에 영화의 매력에 일찌감치 중독됐던 것이다. 그러던 중 고2가 될 무렵, 그는 다니던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선 “뭐든 제대로 하고 싶다”는 욕심에 앞뒤 안 재고 연극영화과 출신 교사가 많다는 안양예고 1학년으로 재입학했다(전학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중앙대 영화과 시절에도 그의 부지런함은 유별났다. 마음 씀씀이가 후한 주진숙 교수에게서 2년 동안 700편의 희귀 영화들을 빌려봤고, 방학 때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의 연출부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현장감을 익혔다. 군 제대 뒤 <베사메무쵸>의 전윤수, <튜브>의 백운학 등 먼저 충무로 현장에 들어갔던 동기들을 보면서 충무로행 기차에 빨리 몸을 싣고 싶은 맘이 없지 않았지만, 졸업작품 시나리오를 바꾸라는 교수와 설전을 벌인 끝에 원안을 포기하지 않은 고집의 대가로 남들보다 늦게 졸업했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그가 ‘지켜낸’ 졸업작품 <무지개를 찾아서>에 미스터리한 설정을 가미하고 인물을 보강한 작품. 사고로 인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진수가 연희의 도움을 받아 과거를 더듬어가면서, 결코 자신이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만 품고 있던 대학 시절 첫사랑의 흔적과 서서히 조우한다는 줄거리다. 아무래도 이정재, 장진영, 두 배우의 몫이 큰 터라 그쪽에 온 신경을 쏟다보니 현장에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실수도 이따금 발생한다고. 부산역에서 극중 진수가 군대가는 회상장면을 찍을 때 동원된 엑스트라들의 열성 연기도 그중 하나다. 서울발 기차인데, 나중에 사운드를 체크해보니 여기저기서 “이제 가라 마” 등의 사투리가 터져나오더라는 것이다. 데뷔작 <오버 더 레인보우>에 “배우들의 호흡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감독의 독특한 색깔을 담아내는” 두 가지 소원을 걸었다는 그는 “언젠가 거미줄처럼 얽힌 인간 군상의 욕망을 보여줄 누아르영화를 하고 싶다”는 욕심도 미리 풀어놨다.
기상캐스터인 진수(이정재)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행히 한쪽 다리만 깁스를 한 정도라 별 무리없이 업무에 복귀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사고로 인해 자신의 대학 시절 기억 중 일부분이 사라졌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자신이 졸업한 뒤에도 남몰래 혼자 연모했던 이가 누구였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사라진 기억을 인화하기 위해 진수는 함께 사진동아리에 있었던 연희(장진영)에게 도움을 구한다. 지하철 유실문센터에서 근무하는 연희는 처음엔 진수의 단짝 상인(정찬)과 연인이었다 헤어진 연유로 진수의 부탁을 거절하지만, 이내 과거를 재생하려는 진수를 돕게 되고, 그런 연희에게서 진수는 호감 이상의 끌림을 경험한다. 그러던 중 진수와 사귀었다는 후배 혜영이 등장하고, 진수를 향한 혜영의 적극적인 표현에 진수와 연희의 관계는 어색해진다. 하지만 진수는 혜영이 프리지어를 좋아했던 기억 속 여인이 아님을 직감한다.
[2002 신인감독 14인] <연애소설>의 이한 감독
사랑과 우정 사이, 슬프고 아득한
이한 감독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던 건 영화를 꿈꾸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고교 시절, 분방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방을 들락거리고 담배를 피우다가, 막상 대학에 가려다보니 아무리 찾아봐도 가고 싶은 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예체능계였고, 연극영화과는 이과 과목에 한 과목만 추가로 시험을 보면 된다는 이유로 선택했다. 좋아서는 아니었지만, 싫지도 않았던 과였던 셈이다.
각성은 늦게 왔다. 주말마다 허름한 재개봉관에서 <차타레부인의 사랑> 등의 에로영화, 이소룡 영화, 007영화를 섭렵하던 어느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허름한 극장에서 봤던 <욕망의 낮과 밤>의 분방한 표현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이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를 좋아하게 되었고, 대학 졸업작품에서 그 색감을 흉내냈는데 주변의 평은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프랑스영화 같다”와 “<우뢰매> 같다”. 결론은, “컬트다”.
대학 졸업반 때부터 광고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어느날 영화의 부름을 받았다. 불현듯 영화를 ‘무지’ 찍고 싶어진 것. 1년이 못 돼 회사를 때려치웠고, 배창호 감독을 찾아갔다. 배창호 감독 밑에서 영화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그 말을 잊지 않고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청운동 배창호 프로덕션에서 배 감독을 처음 만난 날, 너무 좋아서 다리가 막 떨렸던 기억이 난다.
<러브스토리> <정> 연출부를 하며 현장체험을 했다. <연애소설>은 <정> 끝나고 조금 쉬다가 생각해서 쓰기 시작했다. 원래 초고는 금방 쓰고, 다시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수시로 고쳐쓰는 스타일이라 수없이 고쳐쓰고 있다. 스스로의 경험을 많이 집어넣는 편이기도 하다. 여주인공 수인은 대학 때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만나 한눈에 반했던 여자 이름에서 따왔다. 다섯번쯤 만난 뒤 연락이 끊겨 지독한 가슴앓이를 했던 그 느낌이 어느 정도는 <연애소설>에 녹아들 것이라고.
신파는 싫지만 감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랑 영화를 좋아하고 모든 영화에 사랑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이한 감독은 첫 '사랑' 영화 <연애소설>이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정조의, 그러나 그보다 조금 밝은 톤의 멜로 드라마"로 모습을 드러내길 바란다. 영화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슬프지만 미소지을 수 있는, 그런 아련한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어떤 영화?
제작사 팝콘 필름 출연 차태현, 이은주, 손에진 2월중 크랭크인 (가을 개봉 예정)
넉넉지 않은 살림으로 학업과 택시운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는 25살 남자 지환은 지쳐 있다. 그런 지환에게 어느날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한장의 사진이 배달된다. 그 사진 속에는 나무, 꽃, 바람, 아이들의 싱그러운 미소가 담겨 있다. 오랜만에 웃음을 지으며 지난날을 떠올리던 지환은 사진을 보낸 이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그를 찾아나선다.
5년 전 스무살 시절, 지환은 두명의 여인을 만난다. 첫눈에 반한 여인 수인과 그녀의 오랜 친구 경희. 지환의 수인에 대한 구애는 실패로 돌아가지만 세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우정을 느낀다. 만남이 지속되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생겨난 감정에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세 친구. 지환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쪽지에 전해보지만 그 쪽지를 보낸 뒤 수인과 경희는 자취를 감춘다.
[2002 신인감독 14인] <로드무비>의 김인식 감독
길 위에서 인생 한 숟갈, 사랑 한 모금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하는데 그가 앞자리에 턱 앉는다. 미국의 폭주족이나 입을 법한 가죽옷을, 그것도 재킷에서 바지, 부츠까지 ‘풀세트’로 차려입은 그가 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사랑이야기 <로드무비>의 감독이라니. 뭔가 ‘튀는’ 사람일 것이라는 첫인상은 살아온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동아리, 동문회는 물론이고 어떤 모임에도 소속된 적이 없는”, 좋게 말해 자유인, 나쁘게 말하면 조직 부적응자다.
그런 그가 대학을 마친 1987년 ‘보헤미안의 고향’ 프랑스로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충직 교수의 소개로 박광수 감독이 다녔던 에섹(ESEC)에서 영화를 배웠고, 자유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 파리에서 4년을 더 머물렀다. 그 와중에도 영화에 대한 열정은 불타올라 방학마다 귀국해 <남부군> <베를린 리포트> <명자 아끼꼬 쏘냐> 등에서 연출부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데뷔 약속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93년 이후 그는 불운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영화기획정보센터와 함께 준비하던 <유레일 패스>라는 배낭여행족의 이야기는 수포로 돌아갔고, 신씨네에서 <바이올렛> 등의 작품을 놓고 작업을 했지만, 끝내 ‘노선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4년 만에 나오고 말았다. 이후에도 비슷한 나날이 반복됐다. “귀국 이후 함께 작업하는 회사는 항상 있었다. 하지만 장르적인 법칙을 지키지 않고, 뭔가 ‘다른’ 이야기를 추구하는 나의 태도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유레일 패스>만 해도 흔히 생각할 수 있듯, 유럽을 찾은 젊은이들이 낭만의 나날을 보낸다는 게 아니라, 세명의 친구가 유럽에 도착하자마자 헤어져 각자 고독한 여행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대중성이 부족하다는 반응을 들어야 했다.
준비를 시작한 지 거의 10년 만에 만들게 된 데뷔작 <로드무비>도 따지고보면, 김 감독이 직접 개발한 이야기는 아니다.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를 만났을 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시나리오는 테크노 문화를 다룬 ‘하드코어 성장영화’ <청춘>이었다. 캐스팅이 문제가 돼 이 영화를 접은 뒤, 차 대표는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돼 있던 프로젝트라며 ‘게이와 이성애자인 남성이 여행을 떠나 사랑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1주일간의 고민 끝에 그는 평소 만들고 싶었던 로드무비를 찍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차 대표의 아이디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이야기의 순도’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기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관객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느끼고 체험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노선이 작가주의는 아니라는 김인식 감독은 “요즘 한국영화에는 자폐아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극단적 상황에 몰렸음에도 직설적으로 행동하고 자유발랄하게 움직이는 인물을 보여줄 생각”이라고 말한다.
한때 유명한 산악인이었던 대식(황정민)은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의 내면을 더이상 속일 수 없어 산도, 아내도, 가족도 버리고 거리로 나앉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는 어느날 주가 폭락으로 재산을 모두 잃고 아내로부터도 버림받아 거리에서 노숙자 신세가 석원(정찬)을 만난다. 그를 보는 순간 사랑을 느끼는 대식. 길거리에서 이것저것 석원을 챙겨주던 대식은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목적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가는 여행길에서 대식은 한 여인이 바닷물에 빠져 있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녀를 구한다. 그녀는 커피를 배달하며 몸을 파는 일주.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일주는 이들의 여정을 악착같이 쫓아나서고, 어느새 대식에게 마음을 빼앗긴 자신을 발견한다. 서로가 각기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가운데, 이들의 여행길도 갈수록 팍팍해진다.
[2002 신인감독 14인] <H>의 이종혁 감독
선을 위한 악, 그 역설의 매력
“아니, 저렇게 선비 같은 사람 머릿속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나오다니….” 지난 99년 <반칙왕> 개봉 직후, 사무실에 날아든 시나리오 <살인비가>를 읽은 영화사 봄 식구들은 시나리오와 이종혁 감독의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그 엄청난 간극에 당황해 마지않았다고 회고한다. 잔혹하단 말로는 부족한 느낌이 드는, 엽기적인 살인행각, 그 모방범죄를 소재로 한 <살인비가>의 시나리오는 그날로 봄 식구 전원의 만장일치를 얻어 인큐베이팅에 들어갔다. 캐스팅이 늦어지는 바람에 숙성 기간이 2년 반으로 길어지면서, 제목도 ‘너무 정직한’ <살인비가> 대신 ‘신비스런 여운’이 남는 <H>로 바뀌었다.
첫 장편의 크랭크인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동안 데뷔를 앞둔 감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바심을 냈을 법한데, 이종혁 감독, 과연 선비의 기품을 담은 목소리로 느긋하게 답한다. “제가 박광수 감독님, 박종원 감독님 연출부를 했거든요. 그분들 보통 2년 넘게 준비하세요. 장편은 다 그렇게 걸리는 줄 알았죠. 크게 걱정하진 않았어요.”
군대가 아니었다면, 이종혁 감독은 지금쯤 영화 아닌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용산 미부대에서 카투사로 복무하던 당시, 영화에 늦바람이 들어버린 것이다. 직배영화도 없던 시절, 미국에서 건너온 신작들을 챙겨 보다보니 고전도 궁금해졌고, 마침 군대에 있던 비디오 라이브러리까지 유랑하게 됐다. 장르, 감독, 국적, 가리지 않고 보기 시작한 영화들이 데이터베이스를 이룰 무렵, “그 좋은 영화를 직접 만들어보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제대 뒤에 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갔고, 독립영화 워크숍에도 부지런히 따라다녔다.
재학중에 만든 단편 <AD BASE>와 <네크로필리아>는 “이미지들로만 구성한, 표현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품들. 졸업 뒤에 뛰어든 충무로 현장에서 그는 두명의 스승을 모시게 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연출부와 <송어>의 조연출을 거치면서, 박광수 감독에게서는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과 한결같은 자세”를, 박종원 감독에게서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영상으로 정확히 표현해내는 과정과 그 해석 방향”을 배웠다. 그의 영화세계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다.
스릴러는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로 알려져 있지만, 이종혁 감독은 그런 선입견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사건 해결을 지연시켜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이야기 방식이 서스펜스잖아요. 이런 영화는 오히려 대중적인 요소가 크죠. 멜로도 일종의 서스펜스인걸요.” <H>는 그 ‘서스펜스’를 잘 활용한 스릴러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생명을 위해선 죽음을, 선을 위해선 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매력적인 역설”에 끌려 이야기를 만들게 됐고, 어울리는 틀을 찾다보니, 스릴러였던 것뿐, 특정 장르를 고집하는 건 아니라고. 기본적으로 두뇌 싸움에 초점을 맞춘 심리스릴러이지만, 형사물로서 필요한 액션은 확실하게 보여줄 작정. 지난 연말 크랭크인해, 촬영에 여념이 없는 이종혁 감독은 장기적인 플랜 공개를 유보하는 대신, “나는 나, 영화는 영화, 관객이 그 둘을 이어준다”는 믿음을 전했다.
6명을 죽인 연쇄살인범 신현은 자신이 죽인 여자의 토막난 시체를 들고 시경으로 걸어들어와 자수한다. 담당 형사는 이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정신 이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신현은 수감돼 사형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여고생과 임산부가 참혹한 사체로 발견된다.
이상한 우연은 그 살해방법이 신현의 범행수법과 일치한다는 것. 이 사건을 맡은 미연(염정아)과 강 형사(지진희)는 신현의 모방범죄로 추정하고, 수사를 벌여나간다. 이들의 직감대로 신현의 살인패턴과 유사한 살인사건이 연달아 발생한다. 미연과 강 형사는 수감중인 신현을 찾아가지만, 연쇄살인사건의 단서를 캐내는 데 실패하고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