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에비타(Evita Peron) 공연 관람기 (LG 아트홀)
- 가난한 자들의 성녀, 부자들에게는 창녀 에비타 !!-
아르헨티나 시골 농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삼류배우에서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국모의 자리에 까지 올랐던 에바 페론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로부터 성녀로 추앙받았으며 뛰어난 미모와 패선감각으로 50년대초 유럽사교계를 주름잡은 여인의 일대기다.
에비타는 에바 페론(Eva Peron)의 애칭이다.
에바 페론은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 초원의 시골 마을에서
농장 주인과 농장의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 다섯을 낳았는데 에바는 그 중 네번째 아이였다.
굳이 홍길동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사생아의 설움이 얼마나 많았었는지를 추측한다.
에바 페론은 15세 때 옷 가방 하나만을 달랑 들고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무작정 상경한다. 무작정 상경하여 서울역에 갓 내렸을 1960년대의 영자가 그러했듯이 이 시골 처녀 에바에게도 낯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생활은 막막하였다
그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지닌 강점인 미모를 무기 삼아 삼류 배우나마 배역을 따기 위해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게 된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목축업과 곡물 수출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전체 도시들 가운데 뉴욕 다음의 대도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민이 유입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 노동자들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화와 사상까지도 함께 신대륙 아르헨티나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운동과 그동안 대지주들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들의 요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안 페론은 1943년「통일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과 함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후안 페론은 국방부장관·노동부장관·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했다.
에비타가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 25세 때 그녀보다 나이가 2배가 많은 50세의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카페에서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밀회를 즐기다가 장기적인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에바는 힐러리가 빌 클린턴에게서 미래의 대통령 싹수를 발견한 것처럼 후안 페론에게서 미래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보았다. 그리고 힐러리가 그랬듯이 자신의 연인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민정 이양문제로 반대파에 의하여 후안 페론이 연금당하자 타고난 미모와 달변을 가진 에바 페론은 페론의 추종 세력들과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페론 석방운동을 벌였고, 밤낮없이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사주하여 마침내 노조 총파업을 유도해내면서 후안 페론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준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준 정부(情婦) 에바에게 새삼 사랑과 신뢰를 느낀 후안 페론은 죽는 날까지 함께 하기를 맹세하고 결혼한다.
페론은 1946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다. 페론은 기존의 지지 세력이던 군부·교회 노동조합의 지지를 확보하여, 노동자의 처우 개선,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 여성의 시민적 지위 개선,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등
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페론이 집권 초기에 이렇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은 세계 식량 수요 증가로 농축산물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벌어들인 외화 덕분이었다.
이런 호황 속에서 추진된 개혁 입법들은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의 입김 속에서 추진된 것이었고, 노동자와 여성, 빈민들은 그녀를 성녀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국민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우호적인 이 아름답고 총명한 그녀에게 열광했고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페론의 공업화 정책은 수입 대체 전략에 기초한 경공업·소비재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본재 수입의 증가로 외환 사정을 다시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 페론주의와 아르헨티나는 점차 독재의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페론은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반대 세력에게는 독재의 압력을 가했다.
에비타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의 사랑을 이용하여 남편과 자신을 포장해나갔고, 대중이 원하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선사하기도 했다.
에비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서 학교, 병원, 고아원을 단기간에 전국에 건립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병원기차가 의료장비를 싣고 전국을 누비면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이런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적 정책 덕분에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런 위세를 등에 엎고, 심지어는 초등학교에서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고 수업 시간에는 에바의 자서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하기도 했다.
에바 페론은 단순히 퍼스트레이디로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상징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정계의 핵심 요직에 올라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에 오르고자 애썼다.
대선에서 유권자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남편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재선되자 노동자총연맹 등의 단체가 에비타를 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다 군부와 마찰을 빚었다.
부통령 지위에 실패하자 대신 정부의 주요 요직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며 자신의 정적들을 비밀리에 체포·고문하여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들기도 했다.
이들 부부는 독재를 위하여 군부를 강화함으로써 권좌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부도 이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하여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드러났다.
호조를 보이던 농축산물 수출도 자국의 농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영국 등이 아르헨티나산 농축산물의 수입을 제한하고, 아직 선진국들과 경쟁할 만한 단계에 오르지 못한 아르헨티나의 외환 사정은 더욱더 나빠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르헨티나를 어렵게 만든 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부터 뿌리깊었던 지배 계급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였다. 지배계급들은 누구도 아르헨티나 국민과 함께 고통을 나누려 하지 않았고, 페론 정권이 베푸는 사회복지 정책은 개혁적이어야 할 노동자들을 당장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마비되도록 하여 그들을 중독시켰다.
혹자는 에바 페론의 진보적 여성 정책들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여성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그녀가 일조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에바 페론이 반드시 그런 순수한정신으로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켰다고 볼 수는 없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녀는 여권 신장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면서도, 결국 그렇게 해서 달성된 결과물들을 자신의 남편인 후안 페론에의 충성으로 귀결시켰다. 그녀는 여성 당원들에게 이렇게 강론했다.
"여러분, 남자는 지성을, 우리 여성은 감성을 투쟁에 바쳐야 합니다. 지성과 감성을 모두 합하여 보다 정의롭고 보다 행복한 최상의 조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페론 장군을 우리는 적극 지지해야 합니다. 우리 여성은 남녀 모두 뭉쳐야 하기 때문에 남자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의 이런 여성운동은 결국 가부장적 권위에 복종하는 여성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고, 자기 자신이 그런 전형적인 모델이고자 했다.
저물어가는 에비타의 영광, 꺼지지 않는 신화
일명,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라는 말보다 그녀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다른면으로는 그녀를 아르헨티나의 독재에 봉사하였고, 노동자·빈민계급을 마취시킨 악녀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그녀가 행한 수없이 많은 초인적인 봉사와 헌신들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녀는 가진 자에게는 더할 수 없이 표독한 영부인이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자상한 나라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녀의 이런 모순된 삶의 동력을 그녀의 출생과 살아온 경로가 순탄치 않았고 그 와중에서 그녀 역시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가슴에 한(恨) 새긴 탓이라고 보고 있다. 다분히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본다.
그녀는 다른 대통령의 영부인들 처럼 단순히 의전행사의 들러리 역할에 멈추지 않았고, 후안 페론을 대통령의 직위에 오르게 했으며 그를 여러 차례의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냈고, 그의 정치 철학의 상당수를 입안해낸 장본인이었다.
에바 페론은 국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수많은 일들을 초인적으로 처리해갔다.
수없이 많은 노동자, 빈민, 여성들을 만났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었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그들을 조직화하여 남편의 정치적 동지가 되도록 했다.
그러나 하늘은 에바 페론의 영광을 시기했을까,
계속되는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의 악화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그리고 이런 악조건 하에서 고군분투하던 에바 페론은 1952년 척수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쓰러져 눈을 감고 만다. 이때 그녀의 나이 34세였고, 후안 페론을 만난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큰 국장으로 한달 간 성대히 치러졌다.
뮤지컬은 장례 장면에서 시작되고 장례 장면에서 막을 내린다. 인생무상(人生無常)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