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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람들이 오늘날 오키나와인 유구국에 표류하여 견문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피다가 가장 이른 기록이 보이네요(≪단종실록≫권6, 1년(1453) 5월 11일). ≪단종실록≫에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1450년(세종 32)에 표류하여 유구를 견문한 내용이라 4년 정도의 차이가 있네요. 표류인 만년(萬年)과 정록(丁祿)의 출신지(?거주지)가 나타나 있지 않는 것이 뒤따르는 표류견문기와 다른 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들은 유구국 사신 도안(道安, 세조 때에도 몇 번 들리는 사신이어요)을 통해 보낸 국서(≪단종실록≫6, 단종 1년(1453) 4월 24일)에 따르면, 태풍을 만나서 바다 위에서 표류(漂流)하다가 일본 살마주(薩摩州) 칠도서(七島嶼)에 배가 파손된 채 겨우 몸만 육지에 올랐지만, 섬사람들이 붙잡아서 노예로 삼아 부리었다가 마침 유구국 순해관선(巡海官船)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기어서 이들을 사서 유구국에 데려온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국서에는 만년과 정록의 이름이 보이지 않고, 복마령(卜麻寧)·전개(田皆)라는 이름이 보여 동일 인물인지의 여부와 또 다른 쇄환 조선인으로 보아야 하는지 망설여지네요.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유구국으로의 조선인 표류 기사는 1397년(태조 6) 처음 보이고 있어요. 당시 아홉 명의 조선 사람이 유구국에 표류하였는데,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치면서 이들을 함께 돌려보냈지만, 표류한 조선인들의 견문기가 없어 아쉽기는 하네요.
그런데, 1430년(세종 12) 윤12월 유구국에 다녀 온 통사(通事) 김원진(金源珍)을 통해 보내진 유구국 장사(長史) 양회(梁回)의 서한에는 “본국에도 선왕 때부터 지금까지 귀국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들어온 사람이 상당히 있으니 마땅히 돌려보내야 될 것이나, 모두 이 나라에서 가정을 이루고 정착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유구국에 표류한 조선인들이 유구국에 정착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음을 전하고 있는데, 아래 전하는 “조선 사람 60여 명이 유구에 표류하여 왔으나, 모두 사망하고 다만 나이 많은 다섯 사람이 생존하여 있고, 그들의 딸과 아들들은 모두 (그) 나라 사람들과 혼인하였고 가산(家産)도 부유합니다. 노인(老人)들은 조선말을 조금 알고 있습니다.”라는 기록과 서로 관련이 있을 듯하네요. 이제 원문을 소개하도록 할게요.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의 사자(使者) 도안(道安)을 예조(禮曹)에서 연회하였다. 예조에서 도안의 말을 기록하여서 아뢰었다:
“1. 지난 경오년(1450, 세종32)에 귀국(貴國) 사람 4명이 표류하다가 와사도(臥蛇島)에 정박하였는데, 그 섬은 유구도(琉球島)와 살마(薩摩)의 사이에 있어서 반은 유구국에 속(屬)하고, 반은 살마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2명은 살마인(薩摩人)들이 데려가고, 2명은 유구 국왕의 동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포도(岐浦島)를 정벌하다가 이들을 발견하고 사서 국왕에게 바치니, 왕께서 궐내(闕內)에 두고 후하게 무휼(撫恤)하기를 더하였습니다.
1. 중산왕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우리나라 사람 12명이 조선(朝鮮) 해변의 축산포(丑山浦)에 이르었는데, 조선에서 후대하여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 돌려보냈으니, 우리가 지금까지 깊이 감사한다. 이에 두 사람을 항상 안전(眼前)에 두고 의복과 음식을 후하게 주었는데, 네가 지금 마침 왔으니, 내가 매우 이를 기뻐하여 너희들에게 부쳐서 송환(送還)하겠다.’ 하였습니다.
1. 유구국은 땅이 따뜻하고 수전의 곡식이 1년에 두 번씩 익고, 토산은 오직 베와 모시뿐이나, 그러나 상선(商船) 4척이 있기 때문에 사방의 물화를 갖추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조관(朝官)의 의복(衣服)은 중국 사람과 다름이 없으나, 관직(官職)이 없는 사람의 옷은 소매통이 조금 넓은데, 색실[色絲]로써 소매 통에 수(繡)를 놓아서 존비(尊卑)를 구별합니다.
1. 유구국과 살마가 서로 통호(通好)하기 때문에 박다(博多) 사람으로 살마를 거쳐서 유구국에 가는 자는 장애(障?)가 없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서로 화목(和睦)하지 못하여 노략질을 마구 행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큰 바다를 돌아서 물결에 시달리면서 가므로, 심히 고생스럽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나올 때에 상선(商船) 2척도 또한 창탈되어 사로잡혔습니다.”
이어 박다·살마·유구의 서로 떨어진 지도(地圖)를 내보였다.
또 표류한 사람 만년·정록 등의 말한 바를 기록하여서 아뢰었다:
“경오년(1450, 세종 32) 12월에 우리 두 사람과 돌[石乙]·돌돌이[石石今]·덕만(德萬)·강보(康甫) 등 6명이 한 배에 같이 탔다가 갑자기 바다 가운데에서 바람을 만나서 표류하여 와사도(臥蛇島)에 표류 정박하였는데, 강보·덕만은 모두 병사(病死)하였습니다. 섬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 30여 호(戶)였는데, 반은 유구국에 속하고, 반은 살마에 속하였습니다. 섬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거느리고 수로로 3일 노정(路程)을 가서 가사리도(加沙里島)에 10여일 동안 억류되었습니다. 유구국 사람 감린이(甘隣伊)·백야귀(伯也貴)가 일로 인하여 본도에 이르렀다가 만년을 보고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대궐에 나아가서 백단자(白段子)·청단자(靑段子) 각각 2필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즉시 나를 거느리고 대궐로 나아갔으니, 나를 반드시 사서 바쳤던 것이라 추측됩니다. 중산왕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려서 화통(火筒)을 배울 만하니, 화통을 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3인이 같이 거처하였는데 1인이 저고(苧庫)에 들어가서 모시를 훔치는 것을 내가 마침 이를 보고 일을 맡아 보는 사람에게 고하여 중산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은 노실(老實)하다.’ 하고, 인하여 안전(眼前)에 두고 모든 철물(鐵物)·단자(段者)·향목(香木)·동전(銅錢)을 저장하는 창고를 나로 하여금 간수(看守)하게 하고, 창고 안에 출입하는 자들은 옷을 벗고 (일을) 보았습니다.
3개월 간 머물렀는데, 유구인 완옥지(完玉之)가 또 가사리도에 도착하여 동전(銅錢)을 주고 정록을 사서 데리고 돌아와서 일을 시켰습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와서 만년에게 고하므로, 만년이 즉시 왕에게 고하니, 만년에게 명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그 집에 가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노예 1인을 주고 맞바꾸었고 인하여 같이 거처하였습니다. 비단 옷[羅衣] 각각 2벌[領]씩을 내려 주고 하루에 세끼씩 음식을 먹이었는데, 한 때의 쌀이 두 되[升]이었습니다.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도안(道安) 등이 (섬)에 들어왔다가 돌아가니, 왕이 말하기를, ‘항상 풀어서 보내고자 하였으나,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너희가 그를 데려가거라. 만약 조선에서 기뻐하거든 여러 곳에서 표류하여 온 조선 사람들도 또한 모두 쇄환(刷還)하라.’ 하였습니다.
1. 유구국은 땅이 따뜻하여 겨울철에 얼음과 눈이 없고, 매년 9월에 파종(播種)하였다가 11월에 모종을 옮겨 심고 5∼6월 사이에 베어 거두는데 기름진 땅에서는 두 번 심어서 결실(結實)을 하고, 척박한 땅에서는 이미 베어 낸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삭이 팰 따름입니다. 또 곡식이 익으면 이삭만 따고 짚은 그대로 두어서 그 땅의 거름으로 합니다.
1. 땅이 편편하거나 넓지 못하며 길이 많이 높고 낮아서 차량(車輛)이 없습니다.
1. 부모가 죽으면 상복(喪服)을 입지 않고, 고기를 먹기를 보통 때와 같이합니다. 곡(哭)하는 데 슬퍼하지 않고 제사(祭祀)도 지내지 않으며, 불사(佛事)를 행하지 않습니다.
1. 조선 사람 60여 명이 유구에 표류하여 왔으나, 모두 사망하고 다만 나이 많은 5인이 생존하여 있고, 그들의 딸과 아들들은 모두 (그) 나라 사람들과 혼인하였고 가산(家産)도 부유합니다. 노인(老人)들은 조선말을 조금 알고 있습니다.
1. 유구국왕은 혹은 1∼2개월에 한번 조회(朝會)를 받기도 하고, 혹은 1개월 안에 두번 조회를 받는데, 조회할 때에는 3층 전(殿) 위에 앉고, 여러 신하들은 관대(冠帶)를 갖추어 입고 뜰 아래에서 배례(拜禮)합니다.
1. 중국(中國) 사신(使臣)의 배 2척이 면(◆ : ?-尺+沔-?)·꿀[蜜]·양(羊)·술[酒] 등의 물건을 가지고 나라에 이르렀는데, 중산왕의 동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고(旗鼓)와 우산(雨傘)을 갖추고서 교외에까지 나가 맞이하여, 전(殿) 안에 들어와서 연회(宴會)하여 위로하였습니다.
1. 남자는 항상 소매가 장삼(長衫)처럼 넓은 옷을 입고, 존귀(尊貴)한 자는 소매통과 옷 위에 오색실[五色絲]로써 짐승의 모양을 수놓았고, 옷의 색깔은 혹은 검기도 하고, 혹은 희기도 하고, 혹은 붉기도 합니다. 부인들은 혹은 장삼처럼 소매가 넓은 옷을 입기도 하고, 혹은 짧은 도포[短?]와 치마[裙]를 입는데, 수를 놓지 않으며, 짧은 도포의 제도는 우리 나라의 것과 비슷하나 조금 길고, 중[僧人]의 장삼은 또한 우리나라와 비슷합니다.
1. 토산(土産)은 오직 삼[麻]과 모시뿐이며 목면(木綿)은 없고 인호(人戶)의 1/10 정도가 양잠(養蠶)을 하지만, 이 또한 부실(不實)합니다.
1. 남자는 머리털을 왼쪽 귀 위에서 맺고, 나머지 머리털은 오른쪽 귀 위에서 고리로 맺고서 흰 수건으로서 속을 싸서 회회인(回回人)의 모양과 같으며, 부인들의 머리털은 뒤로 향하여 상투[?]를 틀어서 마치 우리나라의 향리(鄕吏)의 상투와 같습니다. 어린 계집애들은 뒤로 향하여 (머리털을) 내려뜨렸습니다. 겨울철에도 따뜻한 도포 옷을 입지 아니하고, 소와 말은 사철 푸른 풀을 뜯어 먹습니다.” |